쑤세미의 궁상일기 - 불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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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원작으로 한 마츠모토 준 주연의 영화<나는 여동생을 사랑해>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데 정말 제목부터 깬다. 얌전한 얼굴의 AV스타가 많은 일본답게 파격소재를 상큼한 러브스토리로 포장해 만들어내는 능력은 세계 제일인 것 같다.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류의 음료도 아니고 무슨 영화제목이 이렇게 엽기발랄하단 말인가. 러브레터, 하나와 앨리스, 눈물이 주룩주룩,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젊은층의 감성을 사로잡은 일본영화가 많다. 심지어 소설까지도 일본소설이 잠식했다.
그들 일본세대 젊은 작가들의 책은 디자인도 세련됐고 제목도 대놓고 통속소설 같지 않고 지하철에서, 혹은 스타벅스에서 맘껏 펼쳐 꺼내 읽기 좋은 소품으로 적절히 활용되고 있다. 물론 대중의 감성을 훔치지 못하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문제도 있겠지만 삶의 본질에 좀 더 묵직하게 다가가는 진지함을 몰라주는 사람도 많은 듯하다. |
문화의 허영이란 게 나쁘다기 보단 본인에게 그닥 도움이 되진 않는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말인데 19금 딱지가 붙은 <나는 여동생을 사랑해>를 읽느니 만화가 박은아의 <불면증>을 권하고 싶다.
불면증은 <다정다감>으로 유명한 만화가 박은아의 2권짜리 책이다. 고교생 희진과 영호가 부모의 결혼으로 가족이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생일이 빠른 희진이 누나가 되지만 둘은 평화로운 가정을 위해 서로의 감정을 숨긴다.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갈 때쯤 불면의 밤은 시작되고 영호의 엄마가 눈치를 채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흔한 소재이지만 흔하지 않는 스토리전개로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쯤엔 고교생의 러브스토리임에도 불구, 가슴이 헛헛한 기분이 든다.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절제된 화면구성과 인물의 심리가, 이야기가 한정 없이 늘어져 삼천포로 빠지고 있는 <다정다감>의 작가와 동일인이라는 게 놀랍다. 작가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단편을 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불면의 밤은 영호의 독백처럼 스산하다.
누나. 이 호칭으로 유희진을 부를 때 난 항상 긴장하고 신경 쓴다.
'절대 실수하지 말자'고, 내가 부르는 ‘누나’는 사전적 의미의 ‘누나’와는 다르다. ‘누나’로 부르되, ‘유희진’으로 생각한다. 만약에 ‘너’나 ‘희진’이라고 부르면, 목소리에 감정이 묻어나와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면 ‘유희진’은 갑자기 차갑게 돌변해서 날 경계할 것이다. 매일 한 집에서 그런 ‘유희진’을 보느니 차라리 철딱서니 없는 동생으로 남아 있는 게 낫다. 그럼 ‘유희진’도 가끔 무방비 상태가 돼서 보너스 같은 걸 떨어뜨려 주기도 하니까...그런데 어떨 땐 그 보너스라는 게 너무 벅찰 지경이어서, 날 어떤 착각까지 하게 만든다
도도한 희진과 귀여운 영호의 러브스토리는 소설 소나기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풋풋한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어른이 되어가는 청춘들의 이야기. 이루어질 수 없고 슬퍼서 더 아름다운 이야기.
새로운 가족의 맺음이 많은 요즈음, 부모세대의 사랑을 인정해주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사랑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어른들이 있을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할 방법 없이 빠지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세대를 아울러서 진지하고, 지나고 나면 유치한 것.
그러나, 역시나, 사랑의 열병은 청춘의 특권이다.
그건 마치 몽롱한 입 속에 굴러들어오는 알싸한 박하사탕 같기도 하고 이 계절, 쿨하고 청춘만화 같은 연애를 꿈꾸는 이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여름밤, 잠 못 드는 당신에게 이 팬시러브를 바친다.
글/ 쑤세미
TV드라마 주인공 ‘대구’와 도니와 돌 + 아이를 합쳐놓은 인물이 이상형. 비 오는 날 방구들에 엎드려 무한도전 재방을 틀어놓고 만화책 보는 게 취미. 최근 만화책이 예전같이 재미있지 않음에 무척 상심해 있는 중. 예의 없는 사람을 보면 에네르기파를 날려주고 싶지만 특유의 소심함으로 그냥 참음. 올해가 가기 전, 비 오는 날 포장마차에서 홀로 소주마시기에 도전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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