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시스템의 향상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 - 박명배
지역에서도 시민들의 작은 권리 찾기와 좀 더 나은 사회로의 변화를 위한 견인차 역할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각종 시민운동 현장에서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만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박명배 안동자활후견기관팀장을 만나봤다.
지금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가?
- 2000년 국가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실시와 더불어 본격적인 자활사업이 시작되었고, 안동자활후견기관도 그 일환으로 복건복지부에서 지정한 곳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영세민들을 취업 알선이나 직업훈련교육 또는 그것을 통해 ‘자활공동체’ 창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등인데, 시에서 지정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상 수급자 8000명중에서 250명 정도가 우리 기관에 소속되어 있다.
어떤 연유로 그 일을 하게 되었는가?
졸업을 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대구에 가서 전통신발 사업도 하고, 지하철 공사현장에서 일도 하면서 생활하고 있던 중에 2001년 7월에 안동자활후견기관이 설립되면서 조창래 신부님의 추천으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본업이 헷갈릴 만큼 이름 뒤에 붙는 직책명이 많은 걸로 안다. 몇 개쯤 되는가?
- **대책위. **협의회 같은 이름의 명함만 7개 쯤 있었다. 그 중에서 몇 개는 사안 자체가 없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진 것도 있고, 최근에 개인적인 이유 -사회복지 쪽으로 공부를 할 계획이다-로 그만둔 것도 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것은 최근 ‘화력복합발전소 유치위원회’ 실무책임자를 맡고 있고, ‘임하댐 탁대협’이 진행되고 있으나 물이 맑아지면서 활동의 의미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시민연대 사무국장직의 경우엔 스스로 그만 둔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능력의 한계도 있었고(머쓱한 웃음), 또 하나의 이유는 한 직책을 오래 맡고 있다 보면, 그 단체보다는 실무자책임자 개인에게 집중이 되면서 그것이 또 하나의 권력화가 되고, 이권에 관계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것은 시민활동가로서의 모습이 아니다. 실무책임자 역할을 2년 이상은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지역사회에서 시민운동을 하다보면 지연, 학연 등의 이유로 한계에 부딪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경우가 그러한가?
개인적으로는 시민운동을 시작하면서 출신교 동창회를 나가지 않았는데, 사전에 그러한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아직까지 시민운동단체에서 추진하는 일에 있어 학연, 지연 등의 이유가 장애가 되거나 그렇다고 득이 되지도 않았다.
물론 일부이긴 하지만, 시민운동이 정치적 입문을 위한 하나의 발판으로 여겨지는 경우나 이권에 개입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를 들어 어떤 사안이 하나 발생해서 우리단체가 관여하게 되면, 당사자 측에서는 주민들과는 다르게 우리를 로비대상로 본다. 그렇다보니 행사에 초대해서 뒷돈을 주거나 회의비 명목으로 큰 액수를 책정해주는 경우도 자주 생기는데, 여기서 시민단체들이 잘못하면 압력단체로서 이권만 챙기고 끝나는 게 될 것이다. 사실 이권에 개입해서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단체나 실무자가 있기도 하다.
일단 시민운동을 하려면 일단 법률적 지식과 로비-여기서 로비란 시민들의 입장을 잘 반영할 수 있기 위한 로비를 의미한다-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본다. 둘 중에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왜곡된다면 하나의 압력단체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정치를 하기 위해 시민운동을 하는 이들은 지속적이지 못하며, 쉽게 흥분한다. 또한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을 경우엔 금방 시민운동단체들에게 화살을 돌려버리기도 하는 등 금방 표시가 난다. 순수하게 시민운동을 하는 이들은 급하지 않다.
공부에 비중을 두고 싶다는 말은 의외다.(웃음) 개인 신상의 큰 변화인 듯한데, 그런 결심을 하게 이유가 있는가?
- 사실 그동안 기관장님의 배려 덕분에 본업보다는 시민운동에 많이 치우치다보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긴 했다.(머쓱한 웃음) 그래도 몇 년의 경력이 쌓이다보니 복지관련 부분에서도 불합리한 문제 - 즉 사회복지부 예산이 가장 많이 책정됨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소외계층들이 받는 혜택은 보잘 것 없다는 것 등-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차에 작년 연말, 안동사회복지관장으로 취임한 최숭근 신부님이 안동의 복지 분야에도 변화가 있어야함을 지적하면서 같이 일해보기를 권했던 것과 최근 현 정부에서 네트워크를 이용해 확대되고 공개된 예산을 쓰겠다는 취지로 만든 ‘안동네트워크’가 출범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그 안에서 내 발언에 힘을 싣기 위해서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는 **디지털대학 사회복지학과에 편입을 하게 된 것이다.
얼마 전에 셋째 아이 돌잔치를 했던 걸로 아는데, 잘 치렀는가?
- 지난 5월 5일 날 돌잔치를 했었다. 공식적으로 연락을 한 적은 없었는데,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덕분에 잘 치렀다.(머쓱한 웃음)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현실에서 세 자녀를 둔다는 것이 국가적으로 봐서는 애국자이긴 한데, 솔직히 양육비 및 교육비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 아직까지는 아이들이 어리다 보니 피부로 잘 느껴지지 않는다. (집사람이야 나와는 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사교육비인데, 솔직히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킬 마음은 지금으로선 없다. 물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행히 초등학교에 들어간 큰아이도 친구들이 학원 다니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웃음)
부인이 상당히 미인인걸로 안다. 어쩌다가 그런 행운을 얻게 되었는가?
- 지금이야 애 셋 낳고 좀 망가지긴(?)했지만 학교 다닐 땐 참 예뻤다.
집사람을 첨 본 것은 92년도 6개월 정도 수감생활을 할 때, 총학생회에서 신입생도 몇 명 포함해서 면회를 왔었는데, 그 신입생 중에 한명이었다. 그걸 계기로 집사람이 먼저 관심을 보였었는데, 당시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때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믿기지 않겠지만...(웃음)
시간이 한참 흐르고 다음해 2월 쯤 총학생회에서 간부수련회를 갔을 때, 그 날 밤에 모두 술에 취해 잠들어 버린 후, 둘이서만 눈이 말똥한 채로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다.(멋쩍은 웃음) 그때부터 한 7년 사귄 끝에 99년에 결혼을 했다.
술을 부인보다 더 사랑할 만큼 애주가라고 하던데, 주량이 어느 정도 인가?
- 어릴 때야 호기 때문에 일부러 병을 세면서 마시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은 아니고 정확히 잘 모르겠다. 남들보다 술 마시는 속도가 빠른 편이긴 하다. 가끔 집 현관문 앞까지는 어떻게 해서든 왔는데, 그 때부터는 긴장이 풀려서 인지 열쇠로 문을 못 열어 헤맬 때가 있긴 하다. 물론 그 다음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각서를 써야한다.(머쓱한 웃음)
이정도 되면 가정에서의 썩 좋은 점수는 못 받을 것 같은데 어떠한가?
맞다.(머쓱한 웃음) 부모님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말 안 듣는 철없는 아들이다. 성격이 강하다보니 부모님께서 알아서 참아주시는 편이었고, 학생운동 때도 심하게 말리지 않았다.
집사람이의 경우엔 “통일과 평화만 생각하고, 가정의 평화는 언제쯤 생각할거냐.”고 불만을 자주 털어 놓는다.
대신 아이들은 가끔씩 라디오나 TV에 나오는 걸 보고선 아빠를 신기하게 여긴다. 아직까진 다행인데, 점점 대화 수준이 높아지는 것으로 봐선 머지않아 엄마와 한편이 되어 공격이 들어올 것 같은 조짐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나 방향이 있는가?
- 앞서 말한 대로 복지 분야 일을 제대로 할 것이다. 시민활동가로서는 제 능력에선 할 만큼 했고, 이젠 본업에 충실해야할 것 같다. 좀 더 욕심을 낸다면 개체화되어 있는 복지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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