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안동부(安東府) 풍산현(豊山縣) 구담리(九潭里)에서 출생한 동리 김윤안(金允安)선생(1560-16922)은 순천인(順天人)으로 자는 이정(而靜), 호를 동리(東籬)라 하였다.
조부(祖父) 자순(自順)은 효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과 언양(彦陽), 고창(高敞) 두 고을 수령을 지냈으며 모친은 진성 이씨(眞城 李氏)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셋째형인 의(?)의 따님이다 동리는 아들 5형제 가운데 막내인데 맏형인 윤흠(允欽)과 둘째 형 윤명(允明), 넷째 형 윤사(允思)가 모두 생원(生員)이고 막내인 동리가 생원(生員)ㆍ진사(進士)에 합격하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였으니 한 집안에서 4생원, 1진사, 1문과(文科)가 배출되어 일시에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다.
12세 되던 해(1571년)에 넷째 형 윤사와 더불어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세 때(1577년)에는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을 하회로 찾아가서 배웠는데 겸암은 자제들과 함께 거처하게 하며 매우 애중(愛重)하였다.
이듬해에는 일시 귀향한 겸암의 동생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평소 공부하다가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였고 그 뒤로도 서애가 일시 귀향할 때마다 찾아가서 모르는 곳을 물으며 사제간의 정의를 돈독히 쌓아 나갔다. 같은 해에 구씨(具氏) 부인을 맞아들여 성가(成家)하였는데 장인 언령(?齡)은 백담(百譚) 봉령(鳳齡)과 형제간이니 동리에게 퇴계는 외종조부(外從祖父)요 백담은 처숙부(妻叔父)가 된다.
이런 연유로 백담의 문하에서도 배우게 되었고 그 밖에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한강(寒岡) 정구(鄭逑)등 계문(溪門)의 고제(高弟)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의문점에 대하며 질의하고 토론하였다. 이처럼 동리는 당대의 석학, 명사인 소고, 겸암, 서애, 학봉, 백담, 한강 등 여러 스승을 두루 섬기며 학문을 넓히고 심화시켰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기간 꾸준히 배우고 섬긴 인물은 서애였다.
따라서 동리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더불어 서애 학맥의 핵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우복에게 일두지를 양보해야 하겠지만 우복이 하회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상주(尙州)에 거주하고 있음에 비하여 동리는 하회에 이웃한 풍산에 거주하고 있는 관계로 사제지간의 정리(情理)는 동리가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관계로 서애가 타계한 이후로 서애를 제향(祭享)하는 일은 동리가 바로 윗형인 윤사(호:松陰송음)와 더불어 주도적으로 처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리형제는 1610년 병산(屛山) 존덕사(尊德祠)를 영건하여 서애의 위판(位版)을 봉안하는 일을 주관하였으며 병산서원의 서애 위패를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이봉(移奉)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을 때 동리 형제는 병산서원의 위패 이봉 문제는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점을 내세워 이를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영중(嶺中) 사림의 공론이 이봉하는 쪽으로 기울고 또 우복이 동리형제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낸 까닭에 이에 동의하고 1920년 서애위패의 이봉행사에는 아들 기후(基厚)를 보내 참여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에는 서애의 위패를 병산서원에 다시 봉안해야 한다는 의론을 제기하여 그 가부를 우복에게 질의하였던 바 우복은 주자(朱子)의 위패도 두 곳에 봉안된 전례가 있음을 들어 적극 찬성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동리가 다음 해에 작고함으로써 진척되지 못하다가 동리가 작고한지 7년 뒤에 성사되어 서애는 여강서원과 함께 병산서원에서도 제향하게 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송음, 동리 형제가 안동지역에서 서애의 학맥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확인 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동리는 29세 되던 1588년에 생원, 진사 양시에 동시에 합격하여 스승인 서애의 뒤를 이을 재목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생원, 진사, 문과에 모두 합격하는 것은 율곡(栗谷) 이이(李珥)나 서애같은 타고난 천재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리는 임진왜란과 대북정권(大北政權)의 난정으로 대과 급제가 늦어져서 벼슬은 겨우 대구부사(大邱府使)에 그치고 말았다.
생원, 진사시에서는 각각 3등으로, 문과는 갑과(甲科) 2등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청요직(淸要職)과는 거리가 먼 한직이나 외직을 역임하다가 치사(致仕)하였다. 동리가 29세 되던 선조 21년(1588)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대과를 준비하고 있던 중에 33세 되던 선조 25년(1592년) 느닷없이 임진왜란이 터져 버렸다.
이에 동리는 둘째형인 윤명(允明)을 따라 김해(金垓)를 대장으로 추대한 안동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그런데 다음 해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난리의 와중에서 장사를 지내고 삼년복을 있었으며 복상기간이 끝난 뒤에는 다시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져서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친상과 난리로 10여년간을 향리에 은거하며 독서와 강학으로 심신을 연마하였다.
그 사이 퇴계선생연보를 편찬하고, 별시(別試) 동당초시(東堂初試)에 합격했지만 급제에는 실패하기도 했으며 여강서원(廬江書院) 산장(山長)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당시 여강서원은 경상도 유생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만큼 경상도 일대에서는 동리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가 선조 37년(1604)에 오현(五賢)의 문묘(文廟) 종사(從祀)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동리는 영남 유생들을 이끌고 상경하여 대궐 앞에 엎드려「회재선생신변소」(晦齋先生伸辨疏)을 올렸는데 이는 동리가 소두(疏頭)가 되어 스스로 지은것이다. 상소가 받아들여지고 선조의 긍정적 비답이 내리자 이어서 「오현종사소」(五賢從祀疏)을 올렸는데 역시 동리가 소두가 되어 자작(自作)한 것이다.
선조는 두 차레의 상소에 대하여 총답(寵答)을 내릴 뿐 아니라 먼길을 온 영남유생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궁정 안에서 별과(別科)를 특설하여 영남유생들에게 응시하게 하였는데 동리는 이 별과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선조는 관례에 따라 장원인 동리를 급제(及第)시키려 하였으나 조정의 반대가 심하여 포기하였다.
이 두 차례의 상소와 별시 장원으로 인하여 동리의 명성이 경사(京師)에서도 융숭해졌는데 서애는 동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 상소가 내용이 평온(平穩)하고 적당(的當)하며 흥분이 지나쳐서 중도(中道)를 벗어난 표현이 없다.”고 상찬하였다.
선조 38년(1605)에 처음으로 음직(陰職)으로 소촌도찰방(召村道察訪)을 제수 받아 임진란으로 황폐해진 역로(驛路)와 해이해진 역졸들의 기강을 회복시키는데 전력하였다. 광해 3년(1611년)에 내직으로 옮겨서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을 제수 받았다가 곧 가례낭청(嘉禮郎廳)으로 개배(改拜)되었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이 북인의 권세를 등에 업고 퇴계 선생을 무함하니 동리는 「척정인홍현소」(斥鄭仁弘誣賢疏)을 지었으나 현직에 있는 관리로서 자기 소관사항이 아닌 관계로 상소를 올리는 것은 포기하고 말았다.
같은 해에 형인 송음공의 간곡한 권유로 대과를 포기하려던 뜻을 거두고 별시에 응시하여 동당초시(東堂初試)에 다시 한번 합격하였다. 다음해 53세의 나이로 문과에 갑과 제 2등으로 급제하여 조정으로부터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을 제수받고 품계가 당상관(堂上官)인 정 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다음해 (1613년)에 대구부사를 배수(拜受)받고 부임하여 탐학한 관기를 바로 잡고 효자를 위하여 백안정(百安亭)을 지어 주는 등 백성을 교화하는데 힘썼다. 광해군 7년(1615년)에 과만(瓜滿)으로 벼슬을 내놓고 귀향한 뒤 더 이상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동리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해평(海平)과 구담(九潭)을 오가며 살 곳을 물색하다가 결국 구담에 소우당(消憂堂)을 짓고 동리라고 자호하였는데 이는 모두 중국 진(晋)나라 은사인 도잠(陶潛)의 작품에서 따온 명칭이다. 56세의 나이에 벼슬에서 물러난 후 63세에 타계하기까지 동리는 학봉의 연보를 교정하고 서애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 서애의 위패를 병산 서원에서 여강서원으로 이봉(移奉)하는 일 등 안동 유림의 중요 사업들에 관여하면서 강학(講學)으로 여생을 보냈다.
동리의 문하에서는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 가장 뛰어난 이가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이다. 동리가 타계한지 180여년이 지난 순조 3년(1803)에 사림의 공의로 화천서원(花川書院)에 제자인 졸재와 함께 동서로 배향되었다. 화천서원은 안동 하회(河回)의 북담(北潭)에 위치해 있는데 겸암 유운룡을 주향으로 세워진 서원이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의척정인홍무현소(정인홍의 현인을 배척하는 소에 비겨)
엎드려 아뢰옵니다. 정인홍이 이언적. 이황을 추하게 헐뜯어 무고한 말은 전하의 밝으심으로 이미 통촉하여 의심할 바가 없을 것입니다. 위로는 삼공과 원임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승정원이나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관학 유생에 이르기까지 번갈아 상소문을 올린 것이 며칠이나 계속되어 다 갖추어 아뢰었을 것이요, 전하 또한 공론의 과격함을 눌러 막을수 없는 것임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다만 전하께서 혹 정인홍의 사람됨을 깊이 알지 못한 까닭에 비판하는 사람이 암만 많아도 미덥지 않게 여기시고 일체 그를 가리고 비호하기를 마치 허물없는 사람 보호하듯 하셨습니다. 이것이 분노하는 사람을 더욱 격렬하게 하고 온 나라의 언론이 그치지 않게 하는 까닭일까 두렵습니다.
저희들이 엎드려 듣건대 전하께서 며칠 전에 승정원과 관학 유생들에게 비답하신 말씀에 “정인홍은 초야에서 독실히 글 읽은 사람이다”라고 하시고, 또 말씀하기를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셨다 합니다. 글 읽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까닭은 그가 의리를 알아 호오를 공정히 하며 사람의 본원인 심성을 함양하여 자신의 편벽된 자질을 고쳐나가기 때문이니 그런 연후라야 비로소 가히 글 읽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인홍은 국량이 편협하고 기질이 괴팍하며 사람 보는 눈이 밝지 못합니다. 남이 자신에게 영합하는 것을 기뻐하여 미워하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현인군자라 할지라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자에 대해서는 비록 행검이 개나 돼지 같은 사람일지라도 친히 하기를 마치 형제와 같이 하더니 그 해로운 짓을 행함이 결국 선정신을 욕보이는 데 이르렀습니다. 허구를 날조하고도 “자신을 끊을지언정 국량을 헤아리지 못한다(논어 중의 自絶不知量)”는 비판을 달게 받으려하지 않을진대 정인홍이 평소에 읽은 것이 무슨 글일 것이며 평소에 궁구한 것이 무슨 이치이겠습니까? 평소에 지키고자한 것이 무슨 도리일 것이며 평소에 높이고자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만년에 한번 차계를 올려 간흉을 격파할 때 홀로 서서 감히 언쟁하였으니 보통사람들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큰 업적을 살필 때는 반드시 그 처음과 끝을 다 살펴야 하는 법입니다. 처음과 끝이 막히고 어그러지면 진실과 거짓을 가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착한 일로써 그 평생을 논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인홍이 일찍이 중망을 업고 지위가 이공(참판)에 이르렀으니 당초에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요, 또한 그 처신에 취할 만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학술이 한번 어그러진 후, 자질을 함양하여 자신을 변화하는 공부를 지속하지 못하고서는 다만 긍지만을 숭상하되 온후하고 화평한 기상이 없이 그 스승을 위하여 보복하는 말을 강퍅히 하였으니 용렬하고 비루함이 도를 알고 덕을 갖춘 자가 아닐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를 지키고 있다는 명망을 정인홍에게 돌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희들이 요즘에 놀랍고 괴이하다가 이어서는 비통하고 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우리 동방은 한쪽 바닷가의 궁벽한 땅으로 비록 어진 부형과 어진 스승의 교화를 입었다 하나 위아래 수천 년 간 전쟁의 참화에 몰리다 보니 인심이 보잘것없고 비루합니다. 이른바 문인과 선비들 중에 이단과 허무의 가르침에 빠진 사람이 없다 함은 공리와 사장의 습속에 국한될 것일 뿐으로 누구 한사람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을 들어 안 분이 있었음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고려조 말에 오직 정몽주가 있어 이락관민의 학문을 듣고서 동방이학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조정의 태조 태종 때 이르러서는 앞에서 배양하고 세조 성종 때 이르러서는 뒤에서 진작하시자 이 때 곧 김굉필 정여창이 나와 잠심 절학하고 의리를 창도하여 밝히더니 불행히도 사화의 참변을 만나 음모와 형벌을 입었습니다. 이어서 조광조와 이언적이 있었으니 이들은 자품의 순수함과 학문의 정확함이 비록 옛 어진이라 하더라도 더 낫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들이 지향과 학업을 성상에 지우 앞에 펴되 위급하고 혼란 할 때에도 충의와 정성을 다하더니 흉악한 무리들이 모함에 얽어 들이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뒤에 이윽고 이황은 벼슬에 나가기를 즐거이 여기지 않고 문을 닫아걸고 오로지 고요히 학문에만 침잠하였습니다. 스스로를 밝히고 앞일을 예견하여 그 몸을 보존하되 한마디 말과 한 개 동작조차도 선철들의 중도를 본받는데 힘써 성현의 미묘한 가르침을 밝히고 세속의 비루한 습속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성인의 학문을 천명한 일은 정도를 밝히고 세교를 부축하여 백성의 마음을 맑게 한 일이니 그 공적이야말로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질고 못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칭송하기를 동방의 주자라 하는 것입니다. 선왕 초기에 국사로서 초빙한 스승으로서 대우하시고 전하께서 즉위하자마자 묘정에 배식하고 문묘에 배향하시니 백성이 기쁘게 여기되 온 나라가 한 마음이었거늘 무고하여 헐뜯는 말이 유독 산림에서 독서한 사람에게서 나올 줄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아아, 도가 세상에 행하고 없어짐이 천명입니까, 아니면 운수입니까? 저 이극돈, 유자광, 남곤, 심정, 정순붕, 이기와 같은 사람이야 평소에 소인 짓을 행하였으니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다 하겠지만, 정인홍이야말로 친히 조식의 문하에서 훈도 받은 사람으로서 반드시 군자가 현인을 좋아하는 의론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인데도 그 논설을 거꾸로 뒤섞어 그 스승이 평소에 경앙하던 사람을 마치 원수 보듯이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정인홍의 하는 짓이겠습니까? 반드시 하늘이 하는 일이요, 운수가 그러해서일 것입니다.
엎드려 두렵게 여기건대 전하께서는 정인홍이 간흉을 격파한 절개가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다툴 만하다 하시고 당시 인물에 그보다 나을 사람이 없다고 여기시어 비록 그 논설의 괴이하고 요망함을 아시고도 결단, 채택하기를 주저하여 공론을 따르지 않으시니 이는 아마도 바른 것을 좋아하고 사특한 것을 미워함이 천하 사람들의 공통된 뜻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일일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따르면 복종하며 그것을 거스르면 배반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무도한 사람의 입장에서 그것을 보면 바른 것을 사특하다 하고 사특한 것을 바르다 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의 일을 관찰하건대 지금이야말로 바로 음과 양이 줄어들고 늘어나는 분기점이요, 국가의 안위가 판가름되는 때이니 전하께서 어찌 깊이 두려워하여 예방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컨대 전하께서는 거경궁리의 학문을 가일층 닦으셔서 호오와 순역의 계제를 살피신다면 나라를 위해서도 지극히 다행한 일이요, 우리 유학을 위해서도 심히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미관말직의 저는 언로의 직책을 맡아 머리가 부서져라 간쟁할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초야에서 발을 동이고 올라와 상소해야 할 선비도 아니면서 감히 참망한 말로서 우러러 전하의 귀를 더럽히는 까닭은 다만 바른 학문이 날로 사라지고 인심이 날로 그릇되는 일이 국가의 작은 근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밤이 깊도록 베개를 쓰다듬으며 크게 탄식하고 염려하다가 분수를 넘은 데 따를 죄를 피하지 않고 제가 아는 한 간하는 말씀을 다하려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참람됨을 용서하시고 조금만 굽어 살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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