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시 꽃 향기는 날리고
아까시 꽃향기는 날리고
차만 타면 어지럼을 토로하는 한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28년 전 마흔이 되던 어느 날 어지럼증이 생겨버렸다. 심지어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울렁증으로 괴로워하는 어머니는 그래서 28년 간 동네 밖을 나가 본 적 없다. 그러던 어머니에게 고민이 하나 생겼다. 막내 딸 결혼식이 코 앞에 다가왔는데, 결혼식에 참석하자니 막막할 뿐이다. 속 모르는 자식들은 등에 업히거나, 가마를 타거나, 배를 타거나, 심지어 수면제를 먹고 가자고 한다. "해남에서 목포까정... 이 백리인데..... 걸어가면 얼마나 걸리랑가?....."
차를 못 타면 걸어서라도 막내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한 어머니의 의미심장한 첫 나들이가 시작 되는데...산 넘고 물 건너 해남에서 목포까지 걸어갈 수 밖에 없는 어머니의 3박 4일 아주 특별한 여행. 그 가깝고도 먼 길에서 어머니가 만나는 어메이징 스토리는 어떻게 펼쳐질지... - 영화 엄마 소개 글에서 인용-
R에게
아마 흥행은 실패한 영화이지 싶다.
꼭 보고 싶은 영화이기는 하나 마땅히 같이 갈 사람도 없어 미루다가 나중에 비디오라도 나오면 봐야지 하는 영화다.
드디어 지난 토요일 비디오방에 들려 비디오를 빌려 틀어놓고는 잠이 들어버렸다.
다시 보려고 처음부터 돌려놓고 또다시 잠들고 말았다.
꼭 보고 싶은 영화였지만 피곤했던가 보다.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잠간씩 눈을 떠 보다 말다 했는데, 기억이 영 나지 않는다.
비디오를 돌려주면서 ‘언젠간 꼭 보고말테다~ 치토스’ 하고는 돌아 나오면서, 언제가 언제일까? 하는 생각만 한다.
R, 오늘은 네가 무척이나 그립다.
지독한 차멀미로 자전거도 못타던 너는, 물론 지금은 과거형이겠지만 아까시 꽃만 보면 네가 그리워진다.
고등학교 때, 20년도 더 지난... ...,
읍내에서 차로 거의 40분여 분이나 걸린다.
거리로는 불과 50여리 밖에 되지 않지만, 누런 먼지가 황사보다도 더 지독하게 날리는 비포장 도로 옆으로는 아이들 무릎 굵기의 아까시 나무가 하얀꽃을 날리는 봄이면 까아만 교복을 입은 키 작은 형제가 헤진 운동화를 끌고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너는 지독한 멀미로 자전거도 타지 못했다.
너와 난 다닥다닥 붙은 초가집 몇 채를 두고 살았다.
이른 새벽 샛강에 나가 동그란 오리알을 주워 용돈벌이하는 것을 가르쳐준 동무가 너였다. 까맣고 빠알간 털이 송송한 토끼 두 마리를 키우며 학비를 스스로 벌던 키 작은 아이.
지독한 멀미라기보다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자동차는 커녕 자전거도 타볼 기회가 없었던 아이.
두 살 터울 형과 학교 앞 비탈산집에서 자취를 하던 너는 늘 멀미를 핑계로 자동차 대신 빨리 걸어도 네시간 반이나 걸리는 시골집까지 걸어 다녔다.
네가 다니던 A고등학교에서 시골집까지 가는 길은 이른 봄부터 참꽃이랑 개나리에서 5월이면 능금꽃, 배꽃, 아까시꽃이 번갈아 피어나곤 했다.
지금도 매일같이 그 길을 다니는 나는, 반변천을 끼고 돌아가는 낡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키 낮은 형제가 걸었을 그 길, 난 매일 그 길을 지나며 아까시 꽃을 보면 네 형제가 떠오른다.
아까시 꽃 항 웅큼 베어 물고 갈증을 달래던 너, 낡은 교복을 둥둥 걷어 올리고 반변천에 뛰어 올라 송사리 떼를 몰고 다니던 모습.
깊은 숨 들이키면 알싸한 아까시향보다 먼저 까칠한 먼지가 튀어들던 그 길을 매일같이 다니며 눈이 빨갛던 토끼밥을 구하러 다니고 이른 새벽 오리알을 주으러 다니던 내 유년의 동무.
지금은 대구 어느 고등학교에서 국어 과목을 가르친다는 그에게 아마 지독한 멀미는 오히려 넉넉한 추억이라는 축복으로 남았으리라.
아까시향이 짙은 늦은 봄날
괜스레 아까시꽃 하나 입에 물고 싶은 것은 유년의 동무가 걸어가던 먼지 날리던 낡은 비포장도로의 기억이 부러워서 일게다.
엄마라는 영화를 오늘은 다시 빌려봐야겠다.
아까시 꽃이 다 저물기 전에.
R 네가 그립다.
(주. 아까시 : 우리가 흔히 일본인들이 우리 강산에 나쁜 기를 심기 위해 심었다는 것으로 알려진 아카시아. 잘 관리하면 참나무보다 더 훌륭한 자원이 된다더군요. 유럽에는 참나무보다 오히려 아까시를 선호하고 있구요. 잘 자라고, 또 나무가 단단하다네요)
*배옥 자유기고가,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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