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영조 때 경상북도 안동 고을에서 무섭게 찌는 삼복더위도 한풀 꺾인 듯싶은 구월 초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금사려, 소금이요!" 가냘픈 몸에 굵은 올로 짠 무명치마?저고리를 걸치고 목이 휘어질 정도의 소금 바구니를 머리에 인 복스러운 얼굴의 처녀 달래가 목이 터저라 소릴 지르며 지나갔습니다. "에구 저 불쌍한 것" 우물에서 빨래를 하던 동네 아낙네 하나가 처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리다가 하던 빨래를 그냥 내려놓고 일어나 "이봐, 처녀! 소금 한 되만 줘" 아무래도 그냥 보내기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늙은 부모 와
2009-06-04
우리민속이야기 (37건)
1519년 9월 9일(음), 농암선생은 이날 안동부사의 신분으로 '남여귀천'을 막론하고 안동부내 80세 이상 노인을 함께 초청한 실로 파격적인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를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은퇴를 전후하여, 고향(도산)에서 70세 이상 노인을 초청했는데, 마침 그 숫자가 아홉이고 '애일당'에 모였기에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라 했습니다. 농암은 이런 경로잔치 때마다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노인들과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렸습니다. '애일당구로회'는 근세까지 450여년을 이어와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2009-04-23
경북 의성군 단밀면 서제리는 서제, 구서당, 기동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동은 구서당 마을의 바로 뒤 고개를 넘어 서쪽 산중에 위치한 벽지마을입니다 지금부터 300여 년 전에 안동에서 김창일이란 사람이 옮겨와서 독가촌에서 온갖 어려움을 참고 산전을 개간하며 생업을 유지하다가 죽었으나 지지리도 가난한 탓에 아들(김태안)은 친상을 당하고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시신 옆에서 슬프게 곡이나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임시로 토령을 차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전답에 나가 땀을 흘려 일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엔가 길지
2009-04-09
전통사회에서는 남여(男女)와 상하(上下)의 역할분담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듯이 생활공간도 엄격히 구분되었는데 주부는 안채에서 의식주(衣食住)를 비롯한 모든 집안일을 운영하는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부가 해야 할 일도 많지만 그 권위도 또한 대단했습니다. 이를 주부권이라고 하는데 이 주부권을 내어주고 안방을 물려주는 풍습을 안방물림이라고 합니다. 안방물림은 안채에서 관리하는 일체의 열쇠꾸러미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넘겨줌으로서 이루어집니다. 안방물림은 안동을 비롯한 경상북도 전역과 경상남도 및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
2009-03-25
1. 복주목이었던 안동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킨 것입니다. 안동이란 지명은 고려 초기 930년에 왕건이 처음으로 내려준 바 있으나 몇차례 다른 이름과 교체되고 회복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민왕 몽진 후에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킴으로써 오늘날까지 안동이라는 지명을 확고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공민왕이 피난 와서 안동 고을에 머무를 때 봉환(당시 안동목사 김봉환. 김굉필의 5대조)이 힘을 다하여 대접하였다. 이 일로써 주를 승격시켜 대도호부로 하였으며, 임금이 환도하여 교서를 내려 표창하였다." 고
2009-03-12
구미시(龜尾市)와 의성군 단밀면의 경계를 이루는 열재(十嶺)라는 고개 중턱에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있었으니 오랜 세월의 흐름을 말하는 듯 벽은 바람에 군데 군데 허물고 문짝은 부서져서 형태만 겨우 남았고 마루 바닥엔 연륜이 깊이 새겨진 빈 집이 있었습니다. 조선 말기 동학란(東學亂)이 한창일 무렵 우리 사회는 지극히 불안하였습니다. 도처에 민란이 일어나니 관군은 이를 토벌하러 나섰고 그 틈을 타서 도적떼들이 우글거려 외진 산길을 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곳 열재도 산적이 자주 출몰하여 한 두 사람이 재를 넘는 것은 위
2009-02-12
안동에서 서쪽으로 4㎞ 정도 가면 풍산김씨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오미리입니다. 오미동은 뒤로는 학가산의 한 갈래인 죽자봉을 배산으로 하고 동(東)으로는 아미산을 좌청룡으로 삼고 서(西)로는 도인산을 우백호로 삼은 명당터에 자리 잡은 풍산김씨 500년 세거지입니다. 풍산 김씨가 이곳에 정착하기는 조선 초기 시조 문적(文迪)공의 8세손 자순(子純)공 때부터입니다. 이때에는 마을 이름을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렀습니다. 그 후 의정(義貞) 공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오무동
2009-01-29
1. 안동지방의 윷놀이? 안동지방의 윷놀이의 특징은 겅궁윷말과 윷노래가 있는 것입니다. 건궁윷말이란 윷말판 없이 윷말의 움직임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하는 것입니다. 윷말이 가장 많이 올라가는 경우는 자기편의 윷말 4동과 상대편의 윷말 4동이 합쳐 8동이 되지만 별 다툼 없이 놀이가 진행됩니다. 이는 안동지역에서 그 만큼 윷놀이를 많이 했다는 증거입니다. 윷노래는 북후면 도촌리에서 전승되는 것은 저포송이라 하고, 남선면 신흥리에서 전승되는 윷노래는 채윷대풀이라고 합니다. 2. 윷노래는 언제 누가 만든 것입니까? 안동의 윷노래는 저포송
2009-01-08
의성읍에서 남으로 4㎞ 정도 지점에 선암리(仙岩里)가 있다. 이 마을 뒷산에는 베틀모양의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데 이 바위를 일컬어 베틀바위라고 한다. 옛날 이 마을에 갑숙(甲淑)이라는 착한 마음씨를 가진 처녀가 있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파서 약을 구하러 갔다가 바삐 돌아오는 어두운 길에서 무엇에 부닥치고 말았다. 자세히 보니 불쌍한 몰골을 한 할머니였다. 남루한 할머니를 등에 업고 내려와서 어머니와 한 방에 눕혀 지성껏 간호하였다. 이튿날 갑숙 처녀가 일어나 보니 그 할머니는 흔적조차 없고, 위중하던 어머니 병환은 깨끗이
2008-12-11
이 나무는 청송읍 덕리(靑松邑 德里)와 파천면 관리(巴川面 官里) 경계에 있습니다. 청송읍에서 국도 31호선을 타고 진보방면으로 2km 정도 가면 오른쪽에 벽절 마을 입구가 있고, 왼쪽 도로변에 노송(老松)과 함께 다정스럽게 서 있는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나무의 수령은 400년, 높이 15m, 둘레가 5m이고 나무 아래쪽으로는 백전 마을 공동 우물이 있습니다. 왕버들은 버드나무목 버드나무과의 낙엽교목으로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으로 길이 4∼12㎝이며, 어린잎은 적갈색을 띠고 뒷면은 흰색입니다. 잎자
2008-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