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栢巖) 김륵
공의 휘는 륵(?)이요. 자는 희옥(希玉)이며 호는 백암(栢巖)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예안인(禮安人)인데 중세에 영천(榮川)으로 이사하여 시거(始居)하였다. 어릴 때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장중하여 타고난 성품이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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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재사(문화재자료 제303호, 경북 봉화군 상운면 운계리 635), 사진자료 문화재청 |
십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여 집상(執喪)과 애모(哀慕)의 범절이 성인과 같아 숙부인 사호(士?)가 사람을 볼 줄 아는 지감(知鑑)이 있었는데 언제나 찬탄하여 이르기를 “이 아이는 장차 반드시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나게 할 것이니, 선묘(先墓)의 수갈(竪碣)에는 백비(白碑)로 두었다가 후일을 기다려서 하라.”라고 하였다.
공이 자라면서 소고(嘯皐) 박공(朴公) 승임(承任)과 금계(錦溪) 황공(黃公) 준량(俊良)의 두 선생에게 사사(師事)하여, 이미 내외경중(內外輕重)의 분수를 터득 하였고 또 퇴계 이선생 문하에 들어가서는 침식을 잊은 채 뜻을 가다듬고 학업에 힘을 쏟았으나 비록 어버이가 계신고로 과거 공부에는 종사 하였지만 이것을 소중히 여기지는 않으셨다.
병자년(선조 9. 1576년)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와 승정원(承政院) 임시 주서(注書)에 보직 되었으며 일찍이 일본사자(日本使者)의 호송관도 역임하였다.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는 곧은 말과 바른 논의를 서슴없이 하였으며 임오년(선조 15. 1582년)에는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군덕(君德)과 시정(時政)에 관한 소(疏)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언사(言辭)가 매우 절박(切迫) 하였으므로 임금께서 불쾌하게 생각하시고 공을 불러 세워 놓고 힐책(詰責) 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굽히지 않은 채 곧은 말로서 응대하니 임금은 더욱 화를 내시었다.
마침 그 자리에 모여 있던 근신(近臣)들이 공을 위하여 극구 변명하여 임금께서는 화를 푸시고 술을 내리시어 위로 하면서 물러가게 하였다. 경인년(선조 23. 1590년)에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로 승진되었고 다시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으로 전임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의정부 검상(檢詳)에서 다시 사인(舍人)으로 전임되었다. 성균관 사성(司成)을 역임하고 장악원(掌樂院) 사복사정(司僕寺正)에 전임되었다. 이 무렵 임금께서는 공을 총애하심이 지극하여 일찍이 전교하기를 “옥임자(玉任者)를 임명함이 옳다.”라고 하면서 집의(執義)에 임명시켰다가 수찬(修撰)으로 다시 임명 하였다.
행묘년(선조 24. 1591년)에 또 집의에 임명되었다가 동부승지로 승진 되었다. 이 무렵 처사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에 관한 송사로서 임금의 뜻에 거슬려 호군(護軍)으로 물리쳤다가 얼마 되지 않아 형조참의에 임명 되었는데 얼마 않되어 낮은 벼슬자리로 체직(遞職)되었다.(上護軍兼 五衛將)
임진년(선조 25. 1592년) 여름에 왜란을 당하고 수월 동안에 팔도가 무너졌다. 이에 공은 안집사(安集使)의 명을 받고 영남으로 내려와서 보니 병력은 흩어지고 낙동강 동쪽 수십 고을은 이미 적에게 점령되었으며 조정과의 소식은 불통된지 오래 되었다. 수령들은 도망가서 숨어 버렸고 유랑(流浪)하는 백성들로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은 도착하자마자 격문을 지어 도내에 포고하여 충의를 부추기고 인륜을 깨우치며 역순(逆順)과 화복(禍福)을 반복해서 일깨웠는데 지적하는 뜻이 간절하고 슬프며 글에 담긴 말과 정이 강개(慷慨)하였으니 이에 사민(士民)들은 감격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의분을 느껴 서로가 격려하면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공은 이러한 어렵고 위태로운 시기를 만나 행재소(行在所)는 멀고 왕래도 어려운데 만약 평상시의 법만을 고수하여 시의적절(時宜適切)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실기하여 도리어 일을 그르치게 된다고 하면 그 죄가 안집사의 명을 받지 않음보다 크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에 혹은 출척(黜陟)과 무마(撫摩)의 정사(政事)를 펴기도 하고 혹은 적을 무찌르고 독찰(督察)의 임무를 엄행(嚴行)하였는데 몸소 각지를 순행하면서 백성을 위로하여 따라오게 하고 전선을 순방하는 등 대소기무(大小機務)를 능동적으로 재결처리(裁決處理)하였으며 수령이 없는 고을에는 권의(權宜)를 두고 사람을 가려 뽑아 그 역량에 따라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장정을 불러 모아 경계를 지키면서 적을 토벌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때를 당하여 적세(賊勢)를 막고 적을 차단하는 공의 힘이 아니었다면 죽령이북의 제천 원주 땅이 모두 적의 통로가 되었을 것이고 도성의 적과 가등청정의 병력이 연결되게 하였다면 국토잠식의 근심과 좌우에서 닥치는 적병의 화근은 실로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병마사 박진(朴晉)은 영남동로(嶺南東路)에 머물고 있었는데 왕왕 의병의 공훈이 자기보다 우월 할 것을 두렵게 여기고 의병이 하는 모든 일을 간섭억압(干涉抑壓)하였다. 공은 이를 개의 하지 않고 전과가 있으면 박진에게 공로를 돌려 그로 하여금 스스로 조정에 상신하는 등의 양보를 하였다.
계사년(선조 26. 1593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계자(階資)가 승진되어 경상우도관찰사로 임명 되었는데, 그 교서의 대략을 보면 “흩어지고 도망간 백성들을 불러 모았으며 의병을 격려하여 수개 고을의 백성들이 안도를 얻었고 적으로 하여금 엿보지 못하게 한 것은 오로지 경의 힘이로다.”라고 하였다.
당시 명군(明軍)이 경상도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본도의 량료사(糧料使) 이성중(李誠中)이 병으로 졸(卒)하니 이때 공은 하나의 작은 몸을 일으켜 정무가 복잡다단한 시기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닥치는 일들을 민첩하게 대처 하면서 군량을 조달하고 기민(饑民)을 구휼하는 등 때에 따라 알맞게 조절하니 일도(一道)가 편안하게 되었다.
갑신년(선조 37. 1604년)에는 안동부사가 되어 나갔다 그 이듬해인 을사년에 큰 홍수가 발생 하였는데 고을은 낙동강변에 위치하였고 또 청송과 진보의 량수(兩水)가 합류하는 곳이라서 빠른 물살에 충격을 받아 물이 넘치고 솟아올라 집들은 무너지고 사람과 가축은 표류함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공은 노심초사 하면서 재민(災民)의 구휼작업에 나섰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안동 고을은 영남지방의 상부 동남에서 큰 도회지이고 나라가 위급할 때에는 믿을만한 요충으로서 다른 고을과는 다르다. 비록 일도가 힘을 다하여 복구작업을 한다 하더라도 지나친 일은 아니다.”라고 하며 사대(使臺)에 상신하여 이웃 고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송항(松項) 포구(浦口)의 양대제방을 쌓아 거센 물결의 수세(水勢)를 방지케 하였으니 고을 백성들은 지금도 그 혜택을 받고 있다.
안동고을 동쪽에 퇴계선생을 봉사하는 려강서원(廬江書院)이 있었는데 이 서원 역시 수해를 입었다. 공은 여러 고을의 부노(父老)들과 상의하여 서원이 있던 옛 터에서 백보가량 상거(相距)한 한적하고 앞이 트이고 밝은곳으로 옮겨 새로이 서원을 마련하고는 제기와 노비를 장만 하였는데 그 비용이 모두 공의 녹봉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수해로 파괴되고 민심이 어지러운 때라 할지라도 현인을 존숭하고 학문을 일으키려는 공의 뜻이 이와 같았다.
병오년(선조 39. 1606年)에 체직(遞職)되어 돌아오다 무술년(선조 41. 1608년) 삼월에 선조 임금께서 승하(昇遐)하시고 광해(光海)가 새로 즉위 하였다. 공은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가을에 신병으로 그 직을 사퇴하였다.
경술년(광해 2. 1610년)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 되었다가 얼마 않되어 대사헌이 되었다. 기축년(선조 22. 1589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억울하게 죽은 이발(李潑), 이호(李浩), 백유양(白惟讓), 정개청(鄭介淸) 등을 신원(伸寃)하였다. 또 이조(李朝) 오현(五賢)에 대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도록 청하여 시행을 허락받았다.
병진년(광해 8. 1616年) 십일월 십육일에 졸(卒)하니 춘추(春秋)가 칠십칠세였다. 원근지방에 부음이 전해지자 모두가 달려와 마치 친척이 상(喪)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는데 장일에는 삼백여명의 조객(弔客)이 모였다.
경신년(광해 12. 1620년)에는 향인(鄕人)들이 사묘(祠廟)를 세워 선조 문절공(文節公)을 비롯하여 소고(嘯皐) 박공(朴公)과 공도 함께 병사(?祀)하였는데 천계(天啓) 갑자년(인조 2. 1624년) 곧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한 다음해였다. 공은 선조(宣祖朝)의 구신(舊臣)으로서 조제(弔祭)가 거행되지 않았으므로 특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문을 내려 치제(致祭)하였다.
송제사적비(松堤事蹟碑)
안동부(安東俯) 에서 십리 쯤 덜어진 가까운 곳에 송제(松堤) 라는 것이 있으니 동쪽에서 흘러오는 시냇물이 성밑의 낙동강물과 서로 입술과 이빨과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만력(萬曆) 흘사년(1605) 대홍수가 났을 때 부사인 백암(栢巖) 김공(金公) 륵 이 읍민들과 전 현감 이정회(李庭檜) 와 함께 온 힘을 다해 제방을 쌓아 바로 부딪치는 큰물을 방어하고자 했다.
지금 비석을 만들어 바위에 세워 두었으나 상(上) 의 원년 정유 (1777, 정조원년) 에 또다시 큰 풍랑을 만났는데 그 피해는 을사년 보다 더욱 심했다. 그래서 우리 김부사께서는 옛일에 의거해 영문(榮問)에 공문을 보내고 진관(鎭管) 에 알려 무술년 봄에 18만 여명의 일꾼으로 안 제방을 다 쌓고나서 이어서 송제(松堤)를 쌓았는데, 몇 달 되지 않아 공사를 모두 마치니 그것은 대게 귀신이 도와주었기 때문인 듯 했다.
아, 위대하도다! 이어서 성지(城地)를 공고하게 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며 만물이 살찜은 오직 부사의 덕이 지난일과 더불어 천고에 갑을이 되지 않겠는가
을사년의 예를 따라 빗돌을 세우려고 의논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3년 뒤에야 비로소 돌을 다듬어서 안 제방에 먼저 세우고 그 전말 및 앞뒤로 일을 맡은 이력을 기록하고 또 옛 비석 아래다 세웠으니 경자년 9월이다.
행현감 김후(金侯) 상묵(尙?)
영장 이공(李公) 건수(健琇)
도감유학 김시경(金時慶)
김시만(金始萬)
감관별장 권극리(權克履)
천총 박사룡(朴師龍)
영장초관 권창회(權昌晦)
김취흥(金就興)
도색 권창문(權昌文)
권봉신(權鳳薪)
김사휘(金思?)
권봉빈(權鳳彬)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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