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진 전남대 교수, 영남학 배경 다룬 역주서 5권 출간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신해진 교수는 작년 1월부터 최근까지 아주 신문(鵝洲申門, 아주신씨)과 관련된 역주서 <역주 퇴재선생실기>, <역주 회당선생문집>, <역주 성은선생일고>, <역주 난적휘찬>, <역주 창의록> 등 5권을 잇따라 출간했다.
이 역주서들은 고려조에 대한 절의정신과 계유정난 생육신의 의리정신이 영남학에 접목된 구체적 사례를 밝힐 수 있는 인물과 경상도 의성의 향촌사를 살필 수 있는 인물 등이 소개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동안 경상도의 사적을 밝힐 수 있는 기초 역사자료와 양 호란 때 모두 의병장을 지낸 인물의 체험기 등이 소개되어 있다.
<역주 퇴재선생실기>는 여말선초 때의 ‘절의와 효성’의 표상으로서 개성의 ‘두문동서원’과 의성의 ‘속수서원’에 봉향되어 있는 퇴재 신우의 문집을 역주한 것이다. 신우는 고려조에서 전라도 안렴사를 지냈던 인물로, 조선조 태조의 형조판서 제의를 뿌리치고 당시 상주목 단밀현 만경산에 은둔했다. 그리고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는데, 그 자리에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난 것이 알려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리기도 했다.
이 효행은 조선조 성리학적 상례(喪禮)문화가 정착되기 이전의 행실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선구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절의와 효행과 아울러 김숙자ㆍ김종직 부자의 족조뻘인 김성미를 사위로, 절의의 대표적 인물 길재를 조카사위로, 생육신 이맹전을 외손서로 삼은 인물인 것을 고려하면, 상주와 선산 일대가 강직한 절의와 사림의 고장으로 자리를 잡는데 수좌 역할을 했고 또한 영남학 형성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보인다.
<역주 회당선생문집>은 의성의 ‘장대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회당 신원록(신우의 6세손)의 문집을 역주한 것이다. 그는 신재 주세붕, 퇴계 이황,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서 통섭의 학문을 하고 문향(文鄕)으로서의 의성을 중흥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특히, 김안국을 흠모하여 형 신원복과 더불어 시작한 지 14년 만에 장천서원을 세워 선현을 받들고 학문 진흥에 이바지하였다.
이 서원은 의성에서 최초의 사액서원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옮겨서 건립되어 지금의 빙계서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모친상을 당하여 눈비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성묘를 하다가, 그로 인해 결국 3년상을 마치지 못하고 여막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인물이다. 그의 형이 쓴 <효우록>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신원록의 아들 성은 신흘이 남긴 글은 <역주 성은선생일고>와 <역주 난적휘찬>으로 역주하였다. 신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신심과 의병을 일으켰으며, 아울러 김해, 유종개, 정세아 등에게 연합전선을 펼치자는 서신을 띄우기도 했다. 의병 사이에도 공적 다툼이 심했던 당시로서 연합하자는 이 제안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1603년 ≪난적휘찬≫을 찬진하여 편수청에 올렸는데, 이 일을 관할하던 이원익이 “근거가 넓으면서 정밀하고, 글의 이치도 전아하며, 깊이 체득할 만한 기사로 갖추었다.”고 평했다 한다. 임진왜란 동안 개인의 체험기로서가 아니라, 꽤 이른 시기에 경상도 사적의 당시 문건을 엄정히 조사하고 견문한 바를 보탠 것인 바, 이 발굴된 기초 역사자료는 이 방면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할 것으로 생각된다.
신흘의 아들 호계 신적도는 조부로부터 가학을 전수받고, 또 정구와 장현광의 문하를 좇아 수학했는데 의성의 ‘단구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그가 기록한 것을 역주한 <역주 창의록>은 양 호란에 모두 참가한 의병장으로서의 체험 및 여러 정황이 구체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정묘호란 당시 경상좌도 호소사였던 장현광의 천거로 54세 때 의병장이 되어서 분연히 몸을 떨쳐 일어나 우국충정을 펼쳤으나 강화가 체결되는 바람에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병자호란 때는 의성 유생들의 추대로 6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장이 되었으나 이 역시 화친이 맺어지는 바람에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병자호란 당시의 기록은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의 막내 동생 신열도도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며 척화를 주장하였는데, 뒤에 전라도 능주 목사를 지냈다.
경상북도 의성 출신으로 고려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신 교수는 6.25 때 전사한 백부에게 입양되어 8대 주손으로서 자신의 뿌리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양모의 유지를 따르기 위해 이러한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양모는 작년에 남편의 6.25 무공훈장을 받기 이틀 전 폐암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신 교수는 선조 문집에 대한 역주작업을 두고 “처연한 아픔을 씻어내는 자기정화의 과정이었다.”고 하면서, “양모의 유지를 완전히 받들기 위해서는 아직 신적도 문집의 <창의록>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대한 역주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의 이러한 작업들은 ‘효성과 의리’라는 가풍의 형성 및 그 실천 과정이 드러난 것으로, 영남학의 형성과 지성사, 임란사, 의병사, 향촌사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할 것이라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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