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쌍벽당공파의 종택 쌍벽당(雙碧堂)

person 경북미래문화재단
schedule 송고 : 2010-03-24 17:41

1. 종가 소개

소재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거촌 1리 148번지

연락처

   010-7845-4304

경북 북부지역에는 많은 반촌들이 있지만, 봉화에는 유난히 사화나 당쟁을 피해 낙향한 유현(儒賢)과 관련된 곳이 눈에 띈다. 기묘사화를 피해 낙향한 충재(?齋) 권벌(權?)의 유곡리 닭실마을과 단종의 영월 유배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의 도촌리 공북헌(拱北獻)이 그러하다. 예부터 봉화는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에 둘러싸여 산세가 험준한 까닭에 깊은 골짜기마다 사연 많은 사람을 품어왔나 보다.

봉화군 거촌리에 자리잡고 있는 쌍벽당(雙碧堂) 역시 사화를 피해 낙향한 집안 중 하나이다. 광산김씨(光山金氏) 쌍벽당공파(雙碧堂公派)의 종가인 쌍벽당의 시조는 조선 중기 연산군 때의 성리학자인 쌍벽당 김언구(金彦球; ?~1507년) 선생이다.

추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들과 발맞추듯 이어진 기찻길 끝에 자리한 거촌리의 쌍벽당을 찾았다. 명절준비와 집수리로 바쁜 와중에도 불쑥 찾아간 필자를 종가 식구들은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2. 쌍벽당 김언구 선생과 자손들

쌍벽당의 조부인 담암공(潭庵公) 용석(用石)은 영남사림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성종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피해 안동 풍천면 구담으로 내려왔다. 낙향한 그는 “성균관 진사만은 아니할 수 없으나, 대과에는 참여치 마라.”, 즉 관직에 나서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이 유훈이 후대에 얼마나 엄하게 지켜져 왔던지, 성주목사를 지낸 그의 셋째 아들은 무과도 벼슬로 여겨져 족보에서 제척(除斥) 당하기까지 했다. 이후 묘소도 실전(失傳)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찾았다고 한다.

담암공은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둘째가 죽헌공(竹軒公) 균(筠)이다. 그는 선친의 유훈에 따라 수양과 후학양성에만 힘 쏟았다. 군위 현감을 지낸 장인의 권유로 봉화 거촌에 터를 닦고 자리 잡았으니, 그가 거촌리에 거주하는 광산김씨 동성촌락의 입향조인 셈이다.

죽헌공의 맏아들인 언구는 25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역시 조부인 담암공의 유지를 받들어 관직을 멀리하고 수양과 후학양성에 매진하였다. 그는 인품이 고매(高邁)하고 벼슬을 탐하지 않았으며 이 고장의 미풍양속 권장에 앞장섰다. 특히 소나무를 사랑하여 집 안팎과 주변에 많은 나무를 심었다. 이러한 행적으로 말미암아 많은 학자로부터 추앙을 받았는데, 유림에서는 쌍벽당 정자를 지어 그의 유덕을 기리기도 하였다. 광산김씨 쌍벽당공파는 바로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종가 마당 한쪽에는 그가 심은 소나무 중 한 그루가 거목으로 자라 남아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 안타깝게도 고사하고 말았다. 종손인 김두순(77세)씨는 그 남은 뿌리를 캐내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데, 역사의 깊이가 느껴지는 거대한 뿌리를 보고 있노라면 소실된 소나무가 참으로 아깝고 아쉽기 그지없다.

쌍벽당의 아들인 득려(得礪)는 일찍이 퇴계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에 뛰어나고 효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손자인 백웅(伯熊)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정제장(整齊將)으로 활약하였으며, 증손인 석중(錫重)은 학봉의 문인인 장경당(張敬堂)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당대의 명사들과 친교를 맺었다. 이토록 뛰어난 후손들이지만, 모두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관직에는 진출하지 않았다. 이후 20대(代)를 내려오면서 많은 생원과 진사를 배출하였으나 대과는 한 명도 없다.

3. 종가 건물과 그에 얽힌 이야기

쌍벽당공파의 종택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있는 낮은 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종택 양옆의 높은 산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각각 ‘백호뜽’, ‘청룡뜽’이라고 불린다. 쌍벽당의 아버지인 죽헌공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원래 거촌은 양옆과 뒤가 산으로 막혀 있고 앞은 틔어 있는 소쿠리형으로 매우 아늑하고 산세가 좋은 곳이다. 그러나 뒷산이 낮아 다소 기가 약하고 근처에 물이 없다는 단점이 있다. 풍수지리상으로는 물이 없으면 벼슬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일부러 죽헌공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대과에는 참여치 말라.”는 담암공의 유훈을 자손 대대로 지키게 하기 위함이니 참으로 대단한 후손들이 아닐 수 없다.

곧게 뻗은 마을길을 지나 쌍벽당 앞에 서면, 한적하고 작은 시골마을답지 않은 큰 규모와 500년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고색창연한 종가의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자연 그대로 완만하게 경사진 터를 살려 건축하였고, 일반 한옥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굵고 튼튼한 목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화려하진 않지만, 제대로 잘 지은 집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 행랑채>























커다란 솟을대문이 있는 긴 행랑채는 팔작지붕의 독립건물이다. 대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중문채와 사랑채, 안채로 구분된 본채가 있다. 중문채와 사랑채 사이에 난 낮은 중문을 통과하면 입향조인 죽헌공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안채가 나온다.

<중문>






















 

 <대청의 싸리나무 기둥>

안채는 ‘口’자 형으로, 너른 대청과 그 앞에 한 아름도 넘는 굵기의 쭉 뻗은 두 개의 큰 기둥이 무척 인상적이다. 집안에 전해지는 말로 이 기둥은 싸리나무인데 이 집터에서 자라던 것을 베어 기둥으로 삼은 것이라 한다. 거촌의 원래 이름이 거수촌(巨樹村)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이다.

<쌍벽당의 개자난간>

 

 

 

 

본채의 오른쪽 뒤편에는 별당이자 정자인 쌍벽당이 자리 잡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팔작지붕 건물로 대들보 하나가 어지간한 한옥의 기둥보다 더 굵고 좋을 정도로 좋은 재목을 사용하였으며, 개자난간을 둘러 멋을 더했다. 이곳에 걸려 있는 ‘쌍벽당 중수기’에는 명종 21년(1566년)에 안채를 지었다는 것과 그 이후 이루어진 수리와 증축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당>


집의 가장 뒤에는 방형의 담을 쌓아 사당을 배치하였다. 사당에는 현 종손의 4대 조상까지 열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입향조와 불천위 제사는 따로 대사당이라는 별묘에서 모시고 있다.

종택은 쌍벽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규모 큰 집이지만, 짜임새 있게 지어진 집안 이곳저곳은 예부터 정겨운 이름으로 불려왔다. 행랑채를 지나 본채 앞마당은 ‘큰마당’으로 사랑채 앞이라 하여 ‘사랑마당’이라고도 불린다. 그 옆의 쌍벽당 앞마당은 ‘정자마당’이다. 큰마당을 지나 중문을 통과하면 사랑채에 불을 지피는 작은 부엌이 있는데, 가마솥이 걸려 있는 부엌이라 하여 ‘가마벅’ 또는 ‘가마정제’라고 불린다. ‘벅’이나 ‘정제’는 부엌의 봉화 사투리이다.

또한, 본채와 쌍벽당 사이의 작은 정원은 ‘북창뜰’, 대부분의 가사일이 이루어지는 본채 남쪽의 작은 정원은 ‘남쪽뜰’, 채소를 갈거나 나무를 심은 본채의 뒤쪽은 ‘뒤안’, 사당과 쌍벽당 사이의 공간은 ‘정자뜰’이라고 부른다.

 <곳감을 말리고 있는 남쪽뜰>

이러한 쌍벽당은 조선 중기 양반의 주거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아 지난 1984년 중요민속자료 제170호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아름다운 건물과 가옥의 구조, 재목 등을 연구하기 위해 관련 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쌍벽당을 둘러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보면, 남쪽뜰 한편에 작은 현대식 건물이 하나 지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소 어색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옛것을 지켜나가기 위한 후손들의 노력 중 하나이다. 집을 현대 생활에 맞게 고치는 대신, 별도의 신식 건물을 지어 생활의 불편함을 해결하고 고가옥의 원형은 그대로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4. 종가를 지키는 사람들

거촌을 다녀오고서 종택의 웅장한 건물도 인상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종가를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기억에 남는다. 쌍벽당의 후손들은 조상에 대한 자부심도 물론 있지만, 종가를 잘 지켜나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무척 컸다.

그 중 첫째는 벼슬을 하지 말라는 선조의 유훈을 20대(代)에 이르도록 지켜왔다는 자부심이다. 둘째는 거촌에 자리 잡은 지난 500년간 단 한 번도 종가를 비우지 않고 지켜왔다는 것이다. 특히 18대 종손인 김두순 어른은 지난 1954년 봉화에서 교편을 잡은 이래로 줄곧 인근지역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종가를 지켜왔다. 1999년에 교감으로 은퇴하기까지 후학양성에 힘썼으니, 선조의 유훈을 현대에까지 받들고 있는 셈이다. 셋째는 조상의 유산을 하나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지켜왔다는 자부심이다.

근처 사람들 말을 들으면은, “요즘말로 하면은 살림 들어먹고 다 못사는 게 종가집인데, 그래도 우리 쌍벽당 만큼은 예전 재물 고대로 지켜 내려오고, 고대로 내려온다.”는 그런 게 있죠. 그런 자부심은 있지요. 옛날 재물 손 안 대고 고대로 내려온다는 그런 거는 있어요. 다 팔아먹고 다 뭐 그런 게 아니고, “벼슬 하지 말고 딱 인제 요것만 지켜도 된다.” 그걸로 내려 왔었죠. [차종손 김동악(54)]

쌍벽당은 예부터 거촌리가 있는 동네 터와 인근의 산을 종손의 이름으로 대대로 이어오고 있다. 마을 땅을 타인에게 매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거촌에는 타성이 단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다. 500년 동안 자녀들에게 분할상속 하지 않고 또 물려받은 자손은 그것을 귀하게 지켜 왔으며, 다른 자손들 또한 그러한 점에 불만을 품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웅장한 종택과 동성마을을 이루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종손은 김두순(77) 어른이지만, 연로하신 관계로 작년부터는 차종손인 김동악(54세) 씨가 그 역할을 물려받아 문중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다. 집안 관리는 물론이고 묘사 참여와 서원 출입 역시 이제는 그의 일이 되었다. 필자가 쌍벽당을 찾던 날, 종손 어른이 계셨음에도 종가에 대한 인터뷰와 접빈(接賓)을 차종손이 도맡아 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전통이 대물림되는 현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에 거주하는 김동악 씨는 수시로 거촌에 찾아와 종택을 관리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좀 더 연로해 지면 부인과 함께 거촌으로 이주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스스로 종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힘이 닿는 한 온 힘을 다해 가문을 지켜나갈 생각을 하고 있다.

아, 이건 내 책임이구나. 이거는 내가 해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딱 박혀 있는데… (중략) …요즘 50대 중반 정도 되가지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굉장히 귀해요. 친구들 끼리 만나 가지고 이런 이야기 하면 저 어디 달나라 이야기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인제 내 대 까지는 어에 저거를 해도 내 하는 거는 틀림없이 내 할 자신 있고, 또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고. [차종손 김동악(54)]

요즘 체험관광이 유행하면서 수많은 한옥에서 숙박을 겸한 고택체험을 하고 있다. 그러나 쌍벽당은 빈방이 많음에도 앞으로도 그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계획을 하고 있지 않다.

그거를 어떻게 저거 해 가지고 참 돈 받고 사람 재우느냐. 아버님이나 저나 오면 그냥 재워주든지. 그이 차라리 와서 “하룻밤 재워주시오.” 하면은 손님으로 하는데, 장사처럼 하는 거는 종가로서는 못하겠드라고요. [차종손 김동악(54)]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는 일을 중요한 의무로 생각하는 종가답게 차라리 손님으로 온다면 접빈객(接賓客)의 마음으로 대접하겠지만, 돈을 받고 재우는 것은 차마 장사꾼 같아 하지 못하겠다는 부자(父子)의 생각을 보면서 종손으로서의 마음가짐이 느껴진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의 생활 방식 속에서 옛것을 지키고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창고를 터서 만든 종택의 3칸짜리 방은 예전에는 마을에서 가장 큰 방인 까닭에 겨울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윷놀이를 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던 곳이다.

그러나 마을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지금, 그 방은 마을에서 가장 작은 방이 되어 버렸다. 이것처럼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것이고, 또 어쩌면 과거의 영광이 조금씩 작아져 가는 것을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쌍벽당이 좋은 재목을 사용하여 튼튼한 집을 지은 것처럼, 듬직한 후손들이 있어 이 종가의 미래도 참으로 든든해 보인다.

5. 종가와 연관된 관광지 소개

인근에는 원주변씨들의 집성촌인 거촌 2리가 있다. 이곳에는 그들의 시조인 고려말 무신 변안열(邊安烈)을 배향한 구양서원과 한옥이 아름다운 원주변씨 종가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외에도 20여 분 거리에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충재 권벌의 종가가 위치한 닭실마을이 있고, 춘향전 이몽룡의 실재 인물로 알려진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의 종가인 계서당이 있다.

봉화는 예부터 산세가 험준하여 교통이 발달하기 어려웠다. 그 덕분에 사람의 손이 많이 타지 않아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전한 곳이 많다. 아름다운 봉화의 자연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정자를 품고 있기도 하고, 신라시대와 관련된 수많은 사찰에 산자락을 내어 주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 고장에는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마음먹고 찾기 시작하면 다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광 명소들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저술한 유홍준 교수는 봉화를 두고 “외지인의 상처를 받지 않고 옛 이끼까지 곱게 간직한 살아있는 민속촌.”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이다.

봉화의 정자는 현재 확인된 것만 98여 개이고, 사라진 곳까지 합하면 17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풍광이 아름다운 도암정과 영화 및 드라마 촬영지로도 많이 소개된 닭실마을의 청암정, 석천계곡을 낀 석천정 등이다. 이들은 모두 거촌과 30분 거리 안팎에 있다.

다소 거리는 멀지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으며 공민왕이 직접 쓴 유리보전 현판이 남아있는 청량산의 청량사(淸凉寺), 원효대사가 창건하였으며 태백산 사고지가 있는 춘양면의 각화사(覺華寺), 의상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보물 제995호인 봉화축서사석불좌상부광배(奉化鷲棲寺石佛坐像附光背)가 유명한 물야면의 축서사(鷲棲寺) 등 봉화에서 꽃 피운 신라시대의 불교문화도 만날 수 있다.

물론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으로 이름난 봉화 하면 산과 계곡, 약수탕 등을 빼놓을 수 없다. 산으로는 청량산과 청옥산 등이 있고, 약수탕으로는 탄산약수가 나는 오전약수탕, 다덕약수탕, 두내약수탕 등이 있다. 계곡으로는 폭이 넓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그늘이 많고 물이 얕아 피서지로 안성맞춤인 석천계곡이 거촌과 20분 거리에 있다.

글, 사진 박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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