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목(神木) 그 코스모스적 환유(換喩)
역저 '성과 속'의 저자 멀치아 엘레아데의 말을 빌려본다. 전통사회에서 나무의 이미지는 단지 코스모스(COSMOS)만이 아니라 생명, 청춘, 불명성, 지혜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선택되었다. 게르만의 신화의 이그드라실과 같은 우주의 나무에 덧붙여서, 생명의 나무, 불멸의 나무, 지혜의 나무, 청춘의 나무, 등이 메소포타미아, 구약성서, 인도, 이란 등 아시아 전반에 걸쳐 차용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나무는 종교적 인간이 탁월하게 실재적이고 거룩하다고 간주하는 모든것, 반신(半神)들만이 드믈게 접근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
식물의 종교적 가치가 최대의 힘과 명확성을 동반하여 표현되는 것은 이같은 우주의 나무, 혹은 불멸이나 지식의 나무라는 상징 가운데서다. 달리 말하면, 거룩한 나무 혹은 거룩은 식물은, 많은 구체적인 식물의 종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세계의 가장 깊은 구조를 보여주는 것은 신성성이다. 코스모스는 종교적 관점으로 볼 때에만 하나의 암호로서 나타난다. 식물의 리듬이 삶과 창조의 신비 및 갱생, 젊음, 불멸성의 신비를 도시적으로 계시하는 것은 종교적 인간에 대해서이다. 식물을 향한 제의의 대다수는 자연현상으로서의 봄이 오기 전에 행해진다.
우리의 신목(神木)을 바라볼 때 루마니아가 낳은 세게적인 석학 멀치아 엘리아데의 심오하고도 독창적인 이 이론은 동방의 나라 우리에게도 기막히게 적용된다. 인간들의 종교적 보편성을 꿰뚫어 본 그의 해박성에 우리는 놀라움을 금키 어렵다.
신목은 우리에게 중심이었다. 그것은 마을이라는 소우주에서 중심이며. 성과 속의 혼재성을 가지며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함께 잉태하고 있던 원시의 우주 그 자체였다. 우리는 거기에서 건강과 복, 우정과 힘을 받아 다시 일년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꿈과 희망을 그리고 안녕을 바랄 수 있었다. 초월적인 힘은 우리의 중심에서 늘 우리를 감싸주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한 해를 견디어 낼 수 있었다. 그토록 척박한 근대와 전통의 역사속에서도 우리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변함없이 중심을 잡아주었던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차를 몰아 마을에서 물어 물어 신을 찾아낸다. 아 지금 신성이 다한 신목은 단순한 고목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그들이 서 있던 중심은 변두리로 몰려나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힘을 믿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은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 근심어린 눈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교만함은 찰라의 트림이며 영원하지 않은 우리의 욕망은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버렸음에도 한 번도 섭섭게 생각않으며 저 멀리서 안타까워 하며 찬찬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망나니 아들이 어머니를 버릴 수 있어도 어머니는 한 번도 그런 아들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오늘도 아마 터질듯한 자식 사랑의 회한으로 가는눈을 뜨고 서 멀리 멀리 마을 고개너머르 한 없이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인간은 신의 자식이며, 그 신은 아직 그 곁을 뻔뻔하게 떠난 인간을 버리지 않고 기다린다'
* 김영호씨는 현재 (재)서울문화재단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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