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 본질, 비(非) 본질
기독교의 역사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 율법시대이고, 둘째 은혜의 시기로 구분 할 수 있다.
율법시대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의 역사를 말하며, 은혜의 시대는 예수님 나신 이후의 시대를
일컫는다. 율법의 시대에는 말 그대로 율법이 모든 것을 주관했었다. 율법의 조항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율법대로 판단했다. 율법의 법집행이 동물들에게 가해 졌다. 이것이 율법시대의 제사이다.
동물들이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다. 소위 대속(代贖)이라는 댓가 지불이 동물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동물들이 율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 탄생 이후 은혜의 시대에는 더 이상의 제사를 통한 심판은 없다. '율법의 완성' 이른바 완전한 율법이 이루어진다.
예수님 자신이 완전한 율법으로서 예수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율법을 단 한번에 완성하였다.율법의 완성 즉, 예수가 죄에 대해 완전한 해결을 한 뒤에, 바야흐로 백성들에게 은혜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제는 예수의 이름만으로도 그의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믿는 자들은 모두가 구원을 얻었다.
율법으로 구속 되었던 사람들이 해방되는 멋진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전에는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율법은 그야말로 거룩했었다. 그러나 세월을 거듭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은 형식으로 굳어져 백성들은 더 이상 율법 이면에 있는 하나님 말씀의 교훈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저 타성에 젖은 하나님 백성들의 형식적 제사만이 자행될 뿐이었다.
본질이 비 본질에 가려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본질은 내용이다. 율법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결코 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형식에 절어 오로지 형식으로만 가치를 결정했다. 본래 있었던 율법의 규약을 좀 더 철저히 지키려고 하여 기존에 없던 형식까지 만들어 붙혀 불과 몇 세기 지나지 않아 율법의 조항이 곱절의 배로 불어나기까지 한다.
본래 규칙이란 내용에 후행(後行)하는 것이다. 규칙을 지키려는 선행(先行)의 정신적 의미를 이야기 하는 것이리라. 법이란 정신을 선행(先行)으로 한다. 내용 없는 절차와 형식은 무가치하다. 혹자는 닭이냐 달걀이냐를 가지고 선행과 후행을 되 물을 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명확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생각없는 몸을 상상 해 볼 것도 없다.
2천년 전 이스라엘 역사에 현현했던 신(神)의 강렬한 메세지를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듣는가?
기독교인의 한사람으로서 질문 한다. 나는 형식적 인간인가? 아니면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성경의 제목을 하나로 압축하면 '사랑'이다. 요한일서에는 '하나님은 사랑이라' 기록 되어 있다.
사랑은 형식인가? 아니면 내용인가? 또는 나는 사람에게 사랑을 보이려고 하는가? 아니면 사랑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어떤 사람인가?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가에 치중하는 사람에 속한다. 본질인가? 비 본질인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3월, 불꽃같은 나라사랑의 본질을 생각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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