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넷이 만난 사람 - 꿈을 향한 U턴?, 강윤정 학예연구실장

person 권지훈 기자
schedule 송고 : 2010-02-01 14:37

강윤정 학예실장은 역사를 배우는 것에 있어 굉장한 열의를 가진 인물이다.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그만 두고 '역사'공부를 선택한 이유는 그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 학예실장을 만나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한 삶의 여정과 잊지 못할 에피소드를 들어보았다.


 
1.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나?
- 학예연구실의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학예연구실의 주요 업무는 크게 학술연구와 전시자료 그리고 교육연수분야의 업무로 나눌 수 있어요. 이 가운데 저는 학술대회, 학술지 발간, 학술용역 등 학술연구 분야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전체업무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2007년 8월에 개관하여 참 분주한 날을 보냈던 것 같아요. '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과 '국역 석주유고'를 발간하고, 지금까지 안동에 머물러 있었던 연구를 경북지역으로 확대하여 경북지역 독립운동사 연구 10개년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학술용역사업을 통해 '문경의 독립운동사', '청도의 독립운동사', '대구ㆍ경북지역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조사사업'을 펼치고 있어요. 그리고 이를 대중들에게 알리기위한 기획전시와 교육연수사업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2. 다른 활동들은
- 야간에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육대학원에서 강좌 하나를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교사 공부모임, 답사모임 등의 소모임을 꾸리고 있어요. 이밖에 각 기관이나 단체에서 요청하는 강의는 안동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대부분 출강하고 있습니다.      
 
3. 학회ㆍ모임ㆍ강의 등의 빠듯한 생활로 인해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글쎄...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충실하지 못한 며느리, 아내, 엄마가 맞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은 우리가족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족에게 물었더니 남편은 90점,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딸 다솔이는 80점을 주더군요. 그런데 이제 중학생이 되는 아들은 0점이랍니다. 세 번을 물었는데 끝까지 0점이라네요. 초등학교 6학년 우리아들 눈에 저는 분명 충실하지 못한 엄마네요. 사실 부모님께 제일 죄송스럽습니다. 시댁이든 친정이든 자주 찾아뵙지 못하니 죄송하죠.  

4. 엄마로서 주부로써 미안한 마음이 많을 것 같다. 남편이 많이 이해해주는 편인가?
- 미안하지만 그런 마음은 떨치기로 했어요. 한쪽이 과하면 한쪽이 부족하기 마련이죠. 그리고 그 부족한 부분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채워가는 것이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남편에게 “외조의 帝王”자리를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요즘 남편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家長을 포기하고, 주부할 테니 자네가 家長하소.” 저는 이 말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그 만큼 남편이 집안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뜻이고, 또 한편으로는 제가 家長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만큼의 신뢰를 얻고 있다는 의미이겠죠. 지나친 억측인가요..하하..

5. 공무원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한 계기가 있나
- 농업기술센터에서 11년 9개월을 근무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의 권유로 농촌진흥청에서 주관하는 생활지도사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시험을 보자고 했던 친구는 떨어지고, 저는 붙어서 봉화군에서 공무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죠. 그러나 대학시절에 가지고 있던 공부에 대한 꿈을 버릴 수가 없어서 퇴근을 하고, 공부모임이나 독서실을 배회했어요.

그러다가 3년 후인 1993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쪽 집안의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모든 신접살림은 둘이서 해결해야 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아이 둘 낳고 정신없는 날들이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 공부에 대한 꿈은 잠시 접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1997년 유럽연수는 나의 꿈을 다시 피우는 계기가 되었어요.

경북지역 농업인들과 함께 영국ㆍ독일ㆍ덴마아크의 선진농업을 견학하는 9박 10간의 연수는 역설적이지만 안동의 가치를 발견한 중요한 기회가 되었어요. 사실 우리 연수는 주로 축산농가를 견학하는 일이어서 이들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이들 나라가 간직하고 있는 외형의 역사를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고, 특히 놀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스토리를 문화상품으로 잘 활용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安東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거기서 발견하게 된 셈이죠. 그리고 깊숙이 묻어두었던 저의 꿈이 “地方史”라는 좀 더 명확한 과제를 만났던 것입니다.

6. 요즘은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사표를 내었나.
- 저도 석사과정은 일을 하면서 마쳤어요. 그러나 그 2년 내내 갈등이 심했어요. 일과 제 전공이 맞지 않았고, 또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없는 저의 아둔함도 큰 고민거리였어요. 그런데 무엇보다 저를 괴롭혔던 것은 어떤 일이든 온전히 그 일에 제 몸과 마음을 다하지 못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그 자리는 포기해야 한다는  제 나름의 직업의식이었어요. 일을 대할 때 “專一”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이미 성실함을 잃어버린 것이고, 그렇다면 그 자리는 온전히 제 것이 될 수 없어요. 그 소신에 따라 저는 한쪽 짐을 내려놓고 꿈꾸던 길을 택한 것이죠. 

7. 근현대사 중에서 독립운동사를 선택하게 된 계기는 어떤 매력이 있나?
- 사실 대학시절에는 동양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특히 일본역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유럽연수에서 지방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전공은 한국사 쪽으로 선택을 했고, 이제 남은 문제는 시대를 정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10년 동안 전문적인 역사공부와는 담을 쌓은 터라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고, “김희곤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독립운동사를 하게 되었어요.

8. 늦게 공부하면서, 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지으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 2001년 9월에 사표를 쓰고, 한 달 동안 꼼짝도 않고 들어앉아 석사논문을 썼습니다. 그런데 써서 갈 때마다 여지없이 선생님께 혼이 났어요. 그것도 나이어린 후배들 앞에서.... 저는 나름대로 글은 잘 쓴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오판이었어요. 그 때 사표 쓴 것을 정말로 후회했다. 내가 겁도 없이 이 길로 가겠다고 사표를 썼구나.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아쉬운 대로 拙稿를 써서 겨우 졸업을 했습니다. 졸업 후 일주일에 두 번씩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 오르내리며 일본어 초서과정을 마치고, 이듬해 단국대 박사과정에 들어가 3년 동안 서울을 다녔습니다. 운전하면서 끼니를 해결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이런 생활이 오래가다보니 몸무게가 15Kg이나 늘었어요. 거기에다 자료정리만 좀 해주면 된다고 해서 시작했던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일은 해가 갈수록 일이 많아지면서 심적 갈등이 많았어요.

사표를 쓰면서 까지 시작한 공부인데 날이 갈수록 일하는 시간이 많다보니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었어요. 그런데 2006년 2월 만주를 다녀오고 나서,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2005년 9월부터 학술진흥재단의 지원하는 '석주유고' 역주 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석주유고'에 나오는 지명을 조사하러 만주에 갈 기회가 생겼어요. 저는 모든 실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7박 8일간의 조사일정을 준비하는 일은 모두 몫이었어요. 처음해보는 일이라 힘은 들었지만 석주 이상룡이 걸었던 만주지역 항일투쟁유적지 조사를 마친 후 저는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래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의 건립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 이후에 소신대로 그 일에 매진했어요.    

 

9. 너무 딱딱한 느낌이 든다. 요즘 인기 있는 얼짱 연예인 중 좋아하는 사람과 남편을 비교해 달라. 남편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 글쎄, 요즘은 조니 뎁이 좋던데... 정확히 어떤 부분이 좋은지는 모르겠고.. 사실 그냥 좋은 거 아닌가요. 그렇다고 남편이 조니 뎁을 닮았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남편이 누굴 닮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제 눈에 안경이에요. 남편을 만난 것은 대학 1년 때입니다. 이런 경우를 “캠퍼스 커플”이라고 하죠. 어린나이에도 저 남자와 결혼을 하면 적어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어차피 내 외모(작은 키, 그리 예쁘지 않은 얼굴)로 세상 사람들이 잘났다고 하는 판사ㆍ검사ㆍ의사-- 뭐 그런 사람들과 결혼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테니, 그렇다면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그 믿음이 지금까지는 제 발등을 찍지 않았어요. 앞으로 어떨지는... 인생은 예견할 수 없으니까요. 순간순간 最善의 길을 가기위해 노력 할 뿐이죠.. 그 길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일만 없기를 바라며, 노력하고 또 노력할 뿐이죠.

10. 사학과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 이건 사학과 후배들뿐만 아니라 모든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 젊은 시절에는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죠. 저도 대학시절 참으로 이상이 거창했어요. 그러나 현실은 늘 그렇지 못했어요. 가난한 살림에 5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저에겐 항상 무거운 책임이 따라다녔죠. 그 사이에서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방황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문제는 20대까지의 현실이란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한 결과물입니다. 즉 내가 선택한 환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걸 붙잡고 시름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현실과 이상을 좁힐 수 있는 次善의 길을 선택해서 꾸준히 시간을 투자하는 작업이 필요해요. 오늘의 3시간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어요.

11. 앞으로의 계획은?
- 올해로 공부를 시작한지 만 10년이 되었어요. 이제 가야할 길이 조금 보이는 것 같아요. 다행히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하고 있는 일이 전공과 관련된 일이라 아둔한 저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는 것 같아요. 공적으로는 안동의 독립운동사를 알리는 일에 충실하고, 개인적으로는 좀 더 내실 있는 연구성과물을 하나씩 내야겠죠. 그리고 아들한테 점수도 따야하고.... 생각하면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나이쯤 되면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해요. 지역사회를 위해 그게 안동의 독립운동가들을 공부하면서 내린 결론이에요. 그런 측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찾아야겠죠.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안동넷이 만난 사람"의 다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