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하늘과 새 땅
예전에 로봇에 관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지만 영화 속에 등장했던 잔인한 로봇의 이미지만 기억난다. 어쩌면 감독의 의도 또한 내가 느낀 것과 같은 것 이였는지도 모른다.
기계는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데로 동작한다. 고로 감정이 없다. 그의 두뇌에는 정확한 계산과 논리만 사유되며 상대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불쌍해 보여도 봐주는 법이 없다. 어제의 동료가 1초도 되지 않아 적(敵)으로 인식된다. 그는 조건과 환경도 가리지 않는다. 목표를 향해 작동 되면 상하좌우의 사계(四堺)는 사라지고 눈금과 수치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결정한다. 안구에 장착된 렌즈필터로만 보는 그의 눈에는 모든 사물의 색이 모노(mono)이다. 그리고 시스템이 지시하는 것만 보게 되어 쌍방향 소통과 정상적인 대화는 언감생심, 무조건 에러코드이다.
역사의 발전은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인가? 교회史에서도 이분설, 삼분설이니 하여 정신과 물질에 관한 오래 된 토론 주제가 있다. 인간의 구성요소를 영혼과 육체로 나누는 이분설(二分說)과 영과 혼과 육체로 볼 것인가의 삼분설이 그것인데, 지금도 거론 되는 신학적 쟁점이다. 중국의 기독교 지도자이자 뛰어난 이론가인 윗치만니의 저서 《영에 속한 사람》에서는 삼분설(三分說)을 뼈대로 하여 그의 정밀한 이론이 전개된다. 이 책의 함의도 크게 볼 때 정신(精神)이라 할 수 있겠다. 신앙 안에서의 영적인 인간, 즉 마인드(mind;정신)를 이야기 한다.
모든 것의 중심에는 정신이 있다. 그럼에도 ‘기계의 정신’이라는 수식은 없다. 감정과 의지와 지성의 합체인 정신적 프로그래밍이 아닌, 산술적인 육체적 프로그래밍(programing)으로서만 사회가 발전될 때 우리는 기계처럼 생각하고 로봇처럼 행동할 것이다. 이미 4세기 앞서 기계적 세계관을 예언했던 17세기 철학자들의 충고가 있었고, 지금도 정신의 역사는 진화의 반대방향으로 진행 중이다. 엔트로피의 역주행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패러다임(Paradigm)이란 그 시대의 공동체적 합의로 생성된 지식의 구조 또는 체계로서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에 영향을 주며 집단이 갖고 있는 생각의 틀(方式)을 뜻하며, 개개인이 주어진 조건에서 생각하는 방식 또한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시대의 세계관을 뉴 패러다임이라 부른다. 그래서 일방적인 세계관에서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패러다임의 전환이 어렵다. 성장일로(成長一路)의 철학이
뉴 패러다임이라 불리워지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사회의 성장을 숫자로만 볼 것이 아닌 내용에 가치를 둘 때 비로소 기계적 종말에서 벗어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진정한 정신적(精神的), 영적(靈的) 가나안으로 들어가 이전에 누릴 수 없었던 놀라운 역사적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여론의 주체가 되어야하는 이유로서 왜곡된 세계관을 바꿔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共同)의 운명이다. 이 역사적 운명에 지금도 늦지 않았음을 깨닫고 모두 일어나 응원하자.
진실된 명제를 위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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