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7-08-14 16:04
(인조원년, 계해, 1623 ~ 숙종21, 을해, 1695)

김방걸金邦杰의 본관은 의성으로 안동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사흥士興, 호는 지촌芝村이다. 부친 시온是?은 철澈의 아들이며, 수일守一(진璡의 제2자)의 아들 철은 극일克一(진의 장자)의 후사로 간 분이다. 모친 풍산김씨는 지평持平 봉조奉祖의 딸이다. 김방걸은 8형제중 4째로 어릴 때부터 타고난 성품이 한결 같았다. 11세 때 어머니상을 당함에 이를 슬퍼하는 마음이 어른 같았다고 한다.

지산서당 - 지촌 김방걸의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정조 28년에 후손 및 지방사림의 발의로 건립되었다.

일찍이 설사병에 걸려 위중한 적이 있었는데 어른들이 그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권한 일이 있지만 끝내 눈물을 흘리며 먹지 않았다고 한다. 13세때 취학, 타고난 기억력이 뛰어나 『논어』한 질을 단 열흘도 안되어 널리 통함에 사람들이 모두 경이롭게 여겼으며, 보고 들은 것은 놓치지 않았으며 재능은 남다르게 뛰어났었다.

1660년(현종1) 문과에 급제, 승문원 정자에 임명되었다. 재임시 승문원 조사로서 진주문서進奏文書를 갖고 대신들에게 나아가 품의할 제, 변론하여 응대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함으로 대신들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1662년(현종3) 제원도濟原道 찰방을 거쳐 전적ㆍ감찰을 지냈으며, 1666년(현종7)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옥구현감에 임명되었다. 부임하여 백성을 대하고 아전을 다스림에 성심을 다하였으며, 다스림을 법대로 펴 나감에 조그마한 것이라도 법을 어긴 일이 없었다.

이는 그가 옥구현감으로 재임하면서 겪은 다음의 예를 보면 명확하다. 이를테면 장령 윤형성尹亨星의 종의 송사를 맡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는 그 종이 송사에 임하여 주인의 관작 ? 성명을 들며 위협을 가하자 이르기를 ‘일이란 반드시 잘잘못이 있음이 분명한 터인데, 어찌 너에게 주인의 관작을 물었더냐’하고, 그 종을 가차없이 패소시켰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성품이 곧음이 잘 나타남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1669년(현종10)네 아버지상을 당하였고, 1672년(현종13)에 계모상을 당함에 따라 여러 해를 고향에서 지냈다. 1675년(숙종1)에는 평안도사로 부임했는데 대신들이 ‘문사를 외직에 오래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계啓하여, 그 해 가을 예조정랑 및 춘추병조정랑으로 전임되었다. 그 해 겨울 다시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1672년(숙종2) 사간원 정언에 취임했다.

 지촌제청-선생의 제사를 모시는 제청으로 숙종 38년(1712)에 세웠다.

동년 겨울 사헌부 장령으로 재임시에는 임금에게 시폐時弊를 상소(1677, 숙종3)하면서, 군병의 고단함ㆍ공도公道의 막힘 ㆍ사로仕路의 혼탁ㆍ형정刑政의 문란 등에 대해 극언한 뒤, 이러한 폐단을 바로 잡는 방법으로서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할 것과 퇴폐된 기강을 바로 세울 것을 주장하여, 이로써 정치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소疏가 올라감에 온갖 시기가 난무하여 그는 곧 사직 귀향해야만 했다. 동년 다시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그러다가 그 해 가을 영암군수로 좌천되자 미수眉? 허목許穆이 글을 보내어 탄식하기를 ‘이 즈음 조정 상황이 날로 그릇되어 감히 바른 말하는 사람이 외직으로 떠난다’하며 위로의 뜻을 붙여 주었다. 1679년(숙종5) 사간헌 헌납, 이듬해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 왔다. 

얼마 안되어 당쟁의 화가 일어났는데, 그는 강호로 물러나 산수와 벗하며 지낸 터라 정쟁의 소용돌이는 벗어날 수 있었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때는 홍문관 수찬으로 임명됨에 소를 올려 기해의예己亥議禮[효종10년(기해, 1659년)5월 임금의 죽음에 따른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계비)의 복제服制를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에 의거 복기년服朞年으로 정해지면서 이른 바 서ㆍ 남인간에 예송禮訟이 일기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현종, 원년 남인 허목의 제애삼년설齊哀三年說을 지지하는 남인의 예소禮疏가 상정되면서 서ㆍ남인간에 심각한 예송이 벌어지게 되었다.

 지촌종택 - 사진출처 지례예술촌 홈페이지

 

 

 

 

 

 

 

 

 

 

 




양송(송시열 송준길宋浚吉)을 중심한 서인의 기년설과 허목, 윤휴尹? 등 남인의 3년설이 논쟁을 거듭한 끝에 결국 복제가 서인의 기년설로 확정되자 당파상 남인이었던 영남의 유림사회에서는 그 기년설을 그릇된 예라 간주하고 이 설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를 그릇된 예라 하고, 송시열의 설을 비판하기를 ‘임금을 협박하고 종통을 무너트리는 것’이라 하였으며, 또한 숙종14년(1688) 임금의 총희寵姬인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송시열이 이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인현왕후가 아직 젊었음을 이유로 그 소생의 아들이 출생할 때까지 기다려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한 주장에 대해 비판하기를, 송시열의 죄가 광해조 때 인목대비를 폐출한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鄭仁弘보다 더 흉악한 것이라고 극언하였다. 이어 장령을 거쳐 사간에 임명되었다.

1689년(숙종15) 7월 인현왕후가 폐출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백관들이 이 문제를 간하려고 대궐에 나아갔으나 그는 마침 학질에 걸려 함께 참여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 그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낙향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내 대간으로서 임금의 허물을 보고도 이를 구하지 못하였으니 급히 물러난 것’이라 하였다.
이어 종부시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치 않았고, 가을에 다시 수찬이 되었다.

그는 근래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고 공의公議가 펴지지 않음을 간하였는데, 임금이 이를 받아들여 비답을 내리었다. 이 해 겨울 부응교에 올라 임금이 청한 구언求言에 따라 9가지 시폐를 통렬히 글로써 논하였다. 이어 사간이 되었다가 1690년(숙종16) 다시 응교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로 올랐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듬해 여름 병조참지를 거쳐 참의에 올랐다.

1692년(숙종18) 다시 참지,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으며 동년 여름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 이듬해 가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러나 동년 겨울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어졌고, 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694년(숙종20) 병조참의를 거쳐 다시 참지가 되었으나 동년 여름에 일어난 인현왕후의 복위와 함께 소론이 득세하고 남인이 화를 입은 사건으로 인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하지만 귀향한 지, 며칠만에 그는 전라도 동복으로 귀양의 명이 내려져 귀양길을 올라야만 했었다. 

귀양지에서 그는 문을 닫고 오는 손님마저 사절한 채, 독서로 나날을 보내다가 1695년(숙종21) 4월 배소에서 몰하니 향년 73세 였다. 부음을 받고 달려온 호남지역 인사들이 상사범절喪事凡節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으며, 관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백리 멀리까지 전송 나와 사모하는 마음을 붙였다고 한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럼"의 다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