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가 남긴 광주시민군 차명숙
옥동 대구은행 근처 홍어집이 한 곳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일단 코를 찌르는 특유의 홍어 삭힌 냄새와 함께 저기 주방 쪽에서 “워쩐 일이여?”하는 높은 톤의 전라도 사투리가 귀에 와 닿는다. 곧이어 흔히 볼 수 있는 이웃 아줌마 같은 주인이 얼굴을 드러낸다.
이 사람이 바로 얼마 전 본지의 “번개 치면 팥죽 먹으러 오라” 기사에 실렸던 주인공이자,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영화 “화려한 휴가”의 실제 현장에서 가두방송을 했던 차명숙씨이다.
휴가철이라 손님이 좀 뜸할 것 같다. 어떤가?
당연하다. 이번 주에 유난히 손님이 없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단골들이 몽땅 휴가를 간 모양이다. (웃음)
요즘 영화 ‘화려한 휴가’가 흥행 성공과 함께 각계 각층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데, 영화를 봤는가?
지난 7월 25일 광주에서 몇몇 대선주자들과 당시 시민군 총괄 역할의 ‘윤상원’씨가 활동했던 ‘들불야학’ 출신 인사들 등이 모인 가운데 함께 봤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어떠한가?
어떤 이들은 좀 미흡하지 않느냐고 아쉬워하는데, 물론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좀 다르다. 우선 30년도 지나지 않은 역사의 한 장면을 그대로 필름에 담아
내면서도 연령층에 상관없이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과 이제까지는 한 번도 다루지 않았던 그 현장에 투입됐던 군인들의 입장을 이 영화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충격적이면서도 참 고마웠다.
그리고 마지막 결혼식 장면에서 죽은 자와 산자의 심정처리의 극적 표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스무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가두방송을 했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어떤 계기로 시민군에 가담하게 되었는가?
아버지께서 보수적이시라 여자가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돈을 벌어 대학을 갈 작정으로 양재학원에 들어가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면서 성당에서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나이가 어리다보니 ‘들불야학’이란 것이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 정도였고, 그냥 철없는 마음에 선배들을 쫓아다니는 정도였다.
사진출처 5.18 기념재단 www.518.org
5.18 계엄령 선포 전후해서 그 성당 모임에서 자연스레 시민군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가두방송은 모든 방송매체가 두절된 상태인 19일부터 시작했는데, 그 중 19~ 22일 동안은 나와 ‘전옥주’씨란 분과 둘이서 했고, 그 이후로는 많은 여성들이 참여했었다. 단지 우리 둘이 기록물에 드러나 있을 뿐이다.
그 이후 25일 쯤 체포되어 감금되고 몇 번의 재판을 거쳐 형집행정지로 나오기까지 수감생활을 16개월 하는 동안의 시간은 무어라 말 할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었다.(잠시 침묵)
사진출처 5.18 기념재단 www.518.org
언뜻 생각하면 안동과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데, 어떤 인연으로 안동에서 살게 되었는가?
석방되고 부터는 주로 서울에서 지내면서 여전히 성당 활동을 했는데, 거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첫눈에 반했다기 보다는 심성이 착했고, 또 전혀 다른 지방 사람이다보니 내 과거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맘에 들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면 지난 그 아픈 기억을 가슴에만 묻은 채 살아도 될 것 같아 결혼을 했고, 92~3년 무렵 남편을 따라 안동으로 오게 된 것이다.
지역색이 전혀 다른 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기엔 불편함도 많을 듯한데, 어떤가?
일단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이 좁고 차단되어 있다는 점인데, 이건 아마 이방인이라는 이유 말고도 여성으로서의 핸디캡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혈연이나 지연, 학연에 대한 결속력과 그에 속하지 않은 이들에 대해 경계심이 크다보니, 상대적으로 타 지역 출신 사람들이라면 남녀를 막론하고 소외감을 많이 느낄 것이다.
또 하나, 아이를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보면 교육환경이나 문화적 환경이 열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엔 애들이 방학하면 일부러 서울 같은 큰 도시로 데려나가서 연극이나 여러 공연들을 많이 접하게 해주곤 했었다.
언제부터 홍어집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2003년인가? 그 무렵 어찌하다보니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꽤 되던 재산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리고,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선택 중에 하나였고, 마침 같은 성당 신도였던 이 건물주의 많은 도움으로 이 식당 문을 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처음 1~2년간은 적응을 잘 못하고,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가 식당을 하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얻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어쩌다가 하루라도 문을 열지 않은 다음날은 일부러라도 들러서 안부를 물어주는 이도 있는 등 - 그러면서 점점 스스로가 안동사람이라고 인정할 만큼 애정도 생기기 시작했다. (웃음)
아직까지 안동에선 홍어가 낯선 음식이다. 홍어를 찾아오는 손님이 많은 편인가?
강하게 쏙 쏘는 맛의 홍어는 안동지역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 낯선 음식이다. 안동에도 홍어와 비슷한 맛의 상어 돔배기가 있긴 하지만 홍어보다는 유한 맛이다 보니, 이 지역에선 확실히 대중적인 음식은 못 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에 그 맛에 거부감을 느끼던 사람도 몇 번 먹다보면 은근히 중독이 되는지 단골이 되는 이도 많다.
아무래도 술을 취급하다보니 짓궂은 손님이나 취객들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대처하는가?
다행히 점잖은 손님들이나 단골들이 많다보니, 아직까지 감당이 어려울 만큼의 손님은 없었다. 더구나 성격이 직선적인 편이라 예전엔 혹여라도 분위기를 흐릴 만한 조짐이 보이는 손님들에게는 대놓고 한소리해서 쫓아버리곤 했었는데, 이젠 그 표현 방법이 많이 유해진 편이다.(머쓱한 웃음)
홍어가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홍어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준다면...
사실 전라도 지방에서 으뜸으로 치는 건 숙성을 극대화시킨 홍어찜이지만, 그 맛이 너무 강해 안동사람들 입엔 잘 맞지 않다. 그래서 자주 내놓은 것이 홍어회를 삶은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를 내놓은데, 여기에 막걸리까지 합해지면- 이른바 ‘홍탁삼합’- 한결 톡 쏘는 맛이 부드러워진다. 이것조차도 먹기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숙성을 덜 시킨 홍어에 미나리, 속배추, 굵게 채 썬 무 등의 야채에다가 고추장과 고춧가루, 마늘, 설탕 등의 양념으로 버무린 후 마지막에 식초를 넣어서 먹으면 홍어의 감칠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계획이 있는가?
이즈음에 와서 앞으로 딱히 특별한 계획이란 것이 있겠는가.
다만 혹시라도 내가 죽은 후에 우리 아들에게 내 삶의 기록을 물어오는 이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럴 때 지금 안동에서의 살아가는 자취들도 중요한 부분으로 차지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주어진 일, 홍어집 주인으로서의 생활에 열심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웃음)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