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대통령을 보내드리며

person 김종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9-08-27 10:23

지난 일요일 오전, 뒤늦게 김대중 전대통령의 분향소를 찾았다. 짧지 않은 조문 기간이었지만 매일 일정에 쫓기다 국장이 있는 날에야 분향소를 찾게 된 것이다. 두어 명의 낯선 얼굴들과 경찰 1명이 분향소를 지키고 있었다. 국화 한 송이를 헌화하고 돌아 나오며 이날이 대통령의 분향소에 조문을 하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 3,4학년쯤으로 기억된다. 집 근처의 번데기 공장 벽에 붙어있던 대통령선거 벽보에서 봤다. 선거 벽보를 유심히 본 것은 이 때가 처음으로 기억된다. 당명은 신민당이었고, 벽보의 구호 내용은 “10년 정권에 해놓은 것이 무엇이냐?”란 뜻의 문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때쯤 김대중 후보의 유세가 신천변에서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나는 야당이다. 유세에 가봐야지.” 그리고 다녀오신 다음에는 “정말 연설을 잘 한다.” 정도의 평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되고 아마도 김대중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지녔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지역감정이 지금처럼 고착되지 않아서 “전라도 후보니까 찍을 수 없다.”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유신 체제가 시작되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고난이 이어졌지만 내게 그리 심각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접할 수 있던 유일한 언론 매체였던 대구의 매일신문을 통해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일어난 일들을 조금씩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1979년 10월 이후 온 ‘서울의 봄’ 때에도 김대중 전대통령은 내게 3김의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1980년 5월 이후 이어진 새로운 고난은 김대중 전대통령을 민주화의 상징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1985년 망명 생활을 접고 귀국한 후 이어진 ‘민추협’ 활동으로 김대중 전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85년 선거 때 학생운동 진영에서는 선거에 참가하느냐 보이콧을 하느냐로 논쟁이 있었다고 들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귀국 후 치른 총선에서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이 이끄는 신민당을 이전의 2중대였던 민한당과는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시각이 반영된 결과로 생각된다. 민주화 운동의 한 축으로 1987년 6.10 항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나와 같은 겁쟁이도 시위에 나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공헌하였다.

6.10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후 김대중 전대통령은 나를 포함한 국민 대다수를 실망시켰다. 실망한 정도가 아니라 미워했다. 단일 후보를 내지 못함으로써 6.10 항쟁의 과실을 군사정권에 다시 헌납하게 만들었는데 미워하지 않고 어쩌랴.

92년 선거에서 3당 합당을 통해 집권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얼마 뒤 국제화란 단어 대신 세계화, global이란 말이 유행했다. 이 단어가 영 찜찜했지만 금융시장 개방과 함께 이 땅이 세계 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인지할 수준은 아니었다. 1997년이 중반부터 경제가 불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급기야 나라가 부도 위기까지 몰렸다. 그 결과 나 같은 빚쟁이는 파산 직전까지 몰린 반면 자산가들은  “이대로”를 외치며 부를 축적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 금융위기를 만든 장본인들이 ‘잃어버린 10년’을 외칠 때 나는 그들이 돌아가고 싶은 10년 전이 혹시 “이대로”를 외치던 시절이 아닐까 하는 염려에 불안했다. -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의 한 표가 대통령 당선에 보탬이 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김대중 전대통령의 행보는 금융위기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 대가로 김대중 전대통령은 ‘아시아적 가치’의 폐기를 선언하며IMF(국제통화기금)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야 했다. - 이 땅의 사람들이 당시의 외환위기를 부자 나라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첨병 노릇을 하는 IMF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는 생각이다. - 내가 가장 뼈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이 때 받아들인 고용의 유연화 정책이다. 최소 생계를 위한 사회보장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고용의 유연화란 빈곤계층의 확대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고용의 유연화를 어쩔 수없이 하더라도 사회보장과 연계해 법제화를 조심스럽게 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다. 젊은이들 대다수가 소수의 정규직을 얻기 위한 경쟁에 청춘을 포기해야 하고, 탈락하는 다수는 비정규직이 되는 ‘88만원 세대’를 가진 사회의 미래를 밝게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어렵게 IMF를 극복한 후(물론 많은 상흔을 가진 채로지만) 이어진 대북 화해정책은 김대중 전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퍼주기’로 비난하지만 나는 평화비용으로 그 정도는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통일을 이루어야 할 같은 민족이 아닌가?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생각이라면 나는 다른 대안을 생각하기 힘들다. 통일을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나 전쟁도 불사할 생각을 가진 사람과는 대북정책에 대해선 말을 섞고 싶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 중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내가 알기로는 노르웨이(다른 노벨상과 달리 노르웨이에서 결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에 있는 노벨 평화상을 결정하는 위원회는 노벨상 수상자 결정을 통해 세계 흐름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표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민주화에 대한 공로와 남북화해의 공로를 인정한 것이리라. 최근 욕을 먹으면서도 한국 사회에 충고를 계속하던 김대중 전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을 이야기하고 세상을 떠났다. 뼈아프다.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남은 자들도 조금씩 제몫을 하겠지요.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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