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person 김종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9-08-20 10:23

8월 2일, 엉겁결에 히로시마의 평화공원(원폭투하지)을 방문하게 되었다. 직장의 CEO를 포함한 네 사람이 1박2일의 일본 출장을 가게 되었다. 금요일 출발해서 토요일 돌아오는 일정이었는데 휴가를 내지 않고도 1박을 더 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혼자 남아 1박을 더 하게 되었다. 교토, 오사카 일대는 네 번 정도 갔으니 다른 곳을 택해야 했다. 토요일 오후 일행과 떨어져 일요일 12시 50분에 오사카에서 부산으로 오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히로시마로 갔다. 원래의 계획은 평화공원과 미야지마란 섬을 보는 것이었지만 히로시마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고 나니 저녁 8시, 저녁을 먹고 나니 9시, 어딘가를 돌아다니기는 어려운 시간이었다. 할 수 없이 아침 6시에 일어나 평화공원만 둘러보고 다시 오사카로 돌아오는 짧은 일정이었다. 여행 중에 겪은 일, 생각을 몇 가지 소개한다.

1. 원폭
8월 6일은 64년 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이다. 인류 최초로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된 날이기도 하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히로시마의 원폭투하가 일본의 패전과 해방으로 이어졌다는 인식하에 원폭투하에 대한 반감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일본의 패전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히로시마에 있던 조선인 10만 명을 포함해 그렇게 많은 민간인을 죽이지 않고도 미국은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지점에 평화공원을 만들어 원자폭탄이 떨어진 사실을 쉬지 않고 되새기고 있다. 올해도 유엔총회 의장이 평화공원에 헌화를 했다고 한다. 평화공원은 내게 항상 양가감정으로 다가온다. 다시는 그런 재앙을 초래해서는 안 되겠다는 공식적 입장에는 공감하면서도,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숨기고 피해자로서의 일본을 부각시키려는 숨겨진 의도에 대한 반감은 어쩔 수없다.  

 >> 전시관 유리에서 본, 복구작업 중으로 짐작되는 사진


2. 마일리지

일행과 헤어진 직후 일요일 한국으로 돌아올 항공편을 알아보니 대한항공에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부산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있었다. 표를 예약하려고 하니 돈이 75만원 정도가 된다. 습도가 높아 원래 땀이 나고 있었는데 비행기 요금 소리를 듣고 갑자기 온 몸에서 땀이 쏟아진다. 75만원이면 일본이나 중국으로 가는, 왕복 항공료, 호텔, 관광비용이 포함된 패키지여행 경비에 해당한다. 그 일본인 직원이 일본에서 끊으면 원래 비싸다고 하길래 한국에서 예약하면 얼마냐고 물으니 왕복 55만원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편도라고 더 싼 것도 아니란다. 이 비행기를 타지 않으려면 인천이나 김포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그러면 일요일 저녁에 잡혀있는 식사 약속을 지킬 수가 없다. 방법은 후쿠오카로 가서 부산행 배를 타는 것인데 그런 일정이라면 기차를 타는 일 외에 일본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 하루 더 남은 것은 아니다. 눈 질끈 감고 그 표를 예약했다. 표를 예약하고 히로시마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려는데 갑자기 마일리지 생각이 났다. 전번 직장에서 외국 출장을 몇 차례 가고, 가족 여행도 몇 번 가면서 마일리지가 제법 쌓여있었다. 할인이라도 될지 모른다. 다시 공항으로 헐레벌떡 쫓아가서 창구에 물어보니 마일리지로 무료로 끊을 수 있고 세금만 내면 된단다. Olleh!

3. 신칸센

도쿄에서 히로시마까지는 신칸센이 연결되어 있다. 일단 신칸센을 타보기로 했다. 신오사카역까지 하루카를 타고 나가서 신칸센으로 갈아타야 한다. JR 패스를 끊어서 타면 더 싸게 먹힐지도 모르지만 비행기표 끊는데 시간을 많이 썼으므로 그럴 시간도 없고, 하루 여행에 뭐 더 싸겠냐하는 생각도 들어 바로 표를 끊었다. 으악! 요금이 12만원이 넘는다. 간사이 공항에서 탄 하루카 요금까지 합하면 편도에 15만원이다. 기어이 비싼 수업료를 치렀다. 패스를 끊었으면 얼마나 먹혔을지 모르겠지만 너무 비싸다. 그리고 가장 빠른 노조미로 1시간 40분을 가야한다니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구 거리는 되는 모양이다. 일본이 혼슈만 해도 엄청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신칸센 노선을 보면 거의 혼슈 남쪽에 치우쳐 있다. 일본도 지역 편차가 제법 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적인 농촌 마을을 가려면 다른 섬이나 혼슈 중에서는 서북쪽의 지방들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신칸센을 달리는 열차의 이름은 등급에 따라 노조미(望)와 히카리(光) 그리고 고다마란 차종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노조미와 히카리 두 종류의 열차 이름은 과거 부산에서 봉천까지 가던 열차의 이름들이란다. 쩝. 좋게 생각하면 대륙과 연결시키고 싶은 일본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현해탄을 넘어 대륙 철도와 연결시키고 싶기도 하겠지. 그런데 다르게 생각하면 일본이 아직 식민지를 경영하던 시절의 향수를 가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열차 이름이 우리에겐 찜찜한 것이 사실이다.

 >> 히로시마 역에서 대기중인 신칸센 열차 

4. 일본어 vs 영어
 
일본어를 일주일에 두 시간씩 공부했지만 별로 늘지는 않는다. 일주일 내내 거들떠보지도 않던 일본어를 매주 목요일 두 시간 공부한다고 실력이 쌓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콩나물에 물주듯 한 10년 하다보면 뭔가 좋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다닌다. 이번 여행에서 확인한 바로는 일본어가 일정 수준이 되지 않는다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들 영어 못 한다는 말은 옛말이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몇 마디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다가 결국 영어로 마무리를 짓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 짧은 일본어는 영어 안 되는 사람 만났을 때나 써먹을 일이다. 
 
5. 히로시마
 
항공편을 예약하느라 시간을 지체해 히로시마행이 더 늦어졌다. 히로시마 역에 내리니 저녁 일곱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일단 숙소를 예약해야 할 것 같아 여행안내소를 찾았다. 역에서 가깝고 싼 호텔을 알아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런 서비스는 오후 다섯 시로 마감이란다. 그리고는 시내 지도 한 장을 준다. 일본의 친절은 여기까지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도를 보면서 잠시 연구를 한 후 역에서 가까운 곳에서부터 호텔을 찾아다녔다. 준비없는 여행은 댓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빈 방이 있다는 호텔이 없다. 네 곳을 돌아다니다 역 주변에서 방을 구하기는 어렵겠다는 판단을 했다. 날은 벌써 어두워지고 평화공원과 미야지마을 보고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수정했다. 평화공원만 보고 가자. 그러면 차라리 평화공원 주변으로 가서 호텔을 알아보자.
 
택시를 잡았다. 지방 도시의 택시 기사에게 영어를 기대할 수는 없으므로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나 일본어 잘 못한다. 평화공원으로 가자. 평화공원 근처의 싼 호텔을 잡고 싶다. 싼 호텔이 없으면 조금 비싸도 할 수 없다. 등등. 택시기사는 내 말을 알아듣고 내가 주문한 바대로 해줬다. 평화공원 근처도 빈 방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도저히 구할 수 없으면 인터넷 카페라도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바로 갈 것이냐고 묻는다. 하루종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다닌 탓에 마음 편하게 씻고 쉬고 싶었으므로 인터넷 카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더 찾아보자고 하고 몇 군데 더 돌았다. 이 택시 기사는 내가 일본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친절했다. 호텔 앞에 차를 세우면 들어가서 알아보고 나오라고 하고는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Sun Route 호텔이라는 곳에서 물어보니 싱글은 없고 트윈 방이 딱 하나 있단다. 하겠다고 하고는 나와서 택시비를 지불했다. 1,250엔이 나왔지만 기사분이 고마워서 1,500엔을  주고 내렸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노동자 같은 복장에 예약도 없이 나타난, 땀에 절은 낯선 사람에게는 일본 호텔도 친절하지 않았다. 선불을 요구했다. 백인이 나타나도 선불을 요구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내 몰골을 보면 새벽에 도망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도 하겠지 하고 먼저 계산을 했다. 올라가 보니 침대가 세 개인 가족 룸이다. 남의 나라 와서 참 이상한 방식으로 돈을 쓴다. 준비되지 않은 여행은 역시 비싼 수업료를 치러야 한다.
 
짐을 풀고는 내려와 저녁도 먹고, 히로시마에 살고있는 펜팔 친구(소학교 교사를 하고 퇴직한 할머니)에게 연락이라도 해볼까하고 나왔다. 펜팔 할머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E-mail 주소 뿐이니 인터넷 카페를 찾아야 연락이라도 될 수 있다. 호텔 인터넷 서비스도 있겠지만 밖에서 저녁도 먹고야 하고, 이틀간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해 궁금하기도 해서 인터넷 카페를 찾기로 했다. 카운터에 물으니 10분 정도 걸어가면 있단다. 근처에서 라멘을 먹고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니 우리나라 PC방보다는 깨끗하고 시설이 다양했다. 우리나라 식으로 한 시간 정도 하려고 했더니 회원권을 만들어야 사용할 수 있는데 하는데 그날은 공짜란다. 회원권을 만들기 위해 각종 인적 사항을 적으려니 기분이 이상하다. 더군다나 여권까지 복사를 해야 한단다. 이해를 하자면 인터넷 카페에서 이루어지는 범죄를 예방하자는 것 같은데 남의 나라에 와서 인터넷 카페에서까지 여권을 복사해주기는 싫었다. 왜 내가 여권까지 복사해줘야 하느냐고 항의하고는 나와버렸다.
 
아홉 시도 되기 전에 숙소로 들어가서 자기는 억울하다. 어디 가서 한 잔 하려고 돌아다녀봤는데 이 집이다 싶은 가게가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돌다가 결국 포기를 하고 호텔 안에 있는 라운지 바에 가서 맥주, 양주, 일본식 양주 각 한 잔씩을 마시고는 올라와 잠을 청했다. 집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TV를 켰다.  그나마 내용이 이해되는 프로그램은 브리티시 여자 오픈 골프 대회였다. 일본 선수들의 성적이 좋아서 중계를 하는 것 같았다. 스코틀랜드 선수가 우승하고 우리나라 선수가 2위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골프 채도 잡아보지 못한 인간이 남의 나라 와서 정말 여러 가지 한다. 
 
5. 평화공원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평화공원을 둘러보고 다시 간사이 공항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비행기 시간으로 봐서 오전 8시 전에는 신오사카로 가는 신칸센을 타야 했다. 6시 경에 호텔을 나와 평화공원을 걸었다. 이른 아침이라 전시관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당연히 당시의 참상을 찍은 사진은 볼 수 없었다. 안내 표지판을 보았다. 한국인 위령탑이 있다고 어디서 읽은 것 같은데 한국인 위령탑 안내판은 없다. 그래 애써 알리고 싶지는 않겠지. 자신들도 가해자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을 뭐 그리 열심히 만들고 싶겠나. 피해자 위령탑을 지났다. 당시의 일본 사람들도 위정자를 잘못 만나 엄청난 피해을 입었구나. 그래, 같은 실수는 되풀이하지 마세요. 원폭의 피해로 백혈병이 걸려 죽은 어린이를 기념한 탑도 보인다. 애들이 무슨 죄가 있나. 아시아 태평양을 침략해서 전쟁의 참화로 몰아간 일본과, 다 이긴 전쟁임에도 민간인 지역에 대량학살무기를 떨어뜨린 미국이 피해 당사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정중히 사과하기 전에는 진정한 평화를 논하기는 힘들겠다.    

 >> 평화공원의 위령탑

나가다보니 한쪽 구석에 큰 비석 하나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효상 각하 휘호'라는 큰 글씨가 보인다.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다. 이 위령비를 만들 때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효상씨가 글씨를 쓴 모양이다. 속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피해자들이 이곳에 끌려와 죽음에 이르게 된 사연이나 그들의 이름을 써도 비석 하나로는 모자랄 텐데 한 면을 통째로 휘호를 쓴 사람을 알리는 데 할애를 했다. 다른 나라 사람이 보면 한국을 비웃을 일이다. 고등학교 시절 휘호의 주인공은 모교 동창회장이었다. 어느 행사에 축사를 하러 왔는데 축사 내용 몇 가지가 기억난다. 자신이 당시 공화당 당의장 서리였던 박준규씨에게 전화를 해서 모교 체육관 예산을 배정하도록 했다는 이야기, 모교 출신 국회의원 수가 상당히 많아서 같은 고등학교 출신 국회의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다고, 영국의 이튼보다 더 많다고, 그래서 모교가 세계 최고의 명문이라고 했던 이야기 들이다. 물론 당시 국회의원 1/3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뽑는 유정회 국회의원이란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외국에서 본 동문 선배의 이름이 씁쓸하다.

 >> 한국인 위령탑, 무슨 의미의 천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북이 위의 천은 없는 것만 못 하다.
왼쪽 옆면 전체는 위령비에 휘호를 한 사람의 직함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왼쪽돔


 >> 피혹 전후의 건물 모습

7. 병풍
 
1일 출장지인 오토와병원 현관에서 병풍 하나를 발견했다. 붓글씨로 한시를 쓴 병풍이었다. 그 전에도 그 병풍을 봤겠지만 요즘 안동 문화에 관심이 많아져서 그런지 눈에 들어온 것 같다. 병풍 아래에는 자매병원인 안동병원에서 기증한 병풍이란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글을 쓴 분이 김태균 선생님이라고 되어있다. 안동 서예계의 최고 원로다. 안동 육사로에 도로명을 적은 장종규 선생님도 그분께 배웠다고 한다. 글씨는 해독 자체가 어려웠고 아래에 일본어로 해석해둔 것을 보니 풍류를 논한 내용으로 당시(唐時) 분위기였다.  

 >> 오토와 병원 현관에 있는 김태균 선생의 글씨로 만든 병풍(해독 사능한 분 해석 부탁합니다.)



도착하는 날 접대 받은 음식 중 한 가지. 묶여있는 연잎을 풀어보니 이런 모양이 나왔다. 
내 주머니 돈으로는 절대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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