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짓는 일의 어려움

person 김종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9-07-09 10:01

직장에서 하는 일 중의 한 가지가 빈혈의 원인을 밝히는 일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에게는 당연히 철결핍성 빈혈이 가장 많다. 대개는 매달 생리를 해서 철분을 잃으면서 잃은 정도 이상의 철분을 섭취하지 않아 생기는 빈혈이다. 옛날엔 못 먹어서 그런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다이어트와 관련이 많은 것 같다. 철결핍성 빈혈 외에도 빈혈의 원인은 아주 많다. 간혹 원인이 분명하지 않은 빈혈을 만나게 되는데 혈액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이런 빈혈이 가장 신경이 쓰인다.

원인이 확실한 빈혈 중에 간혹 만나게 되는 것 중에 거대적아구성(巨大赤亞球性) 빈혈이란 것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빈혈이다. 비타민 B12나 엽산이 결핍되는 경우에 발생하는 빈혈이다. 그 중에서도 비타민 B12가 부족해서 생기는 빈혈을 특별히 악성 빈혈이라고도 한다. 거대적아구성 빈혈은 적혈구(속의 혈색소)가 모자라는 빈혈 뿐 아니라 전혈구감소증(全血球減少症)이라고 해서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모두의 수가 줄어드는 경향을 가진다. 환자가 전혈구감소증을 보이면 담당 의사는 대개 긴장하게 된다. 중증 질환인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그런데 전혈구감소증을 보이는 경우 중에서도 거대적아구성 빈혈은 다른 질환으로 인한 전혈구감소증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자동혈구계산기에서 적혈구의 평균 크기가 아주 크다고 판정되는 경우가 많고, 현미경으로 보면 적혈구 중에서 아주 크면서 불규칙한 모양을 가진 것이 많으면서 핵의 분절이 많아진 호중구가 발견된다. 또 생화학 검사에서 LDH가 많이 증가되는 특징도 보인다.

지난주 이 거대적아구성 빈혈 환자로 인해 고민을 많이 했다. 말초혈액도말 검사를 하다 보니 형태가 거대적아구성 빈혈이 의심되고 여러 가지 검사 결과들도 거대적아구성 빈혈과 일치하는 소견을 보였다. 그래서 거대적아구성 빈혈이 가장 의심되고 다른 혈액 질환 가능성도 검토해봐야 하니 비타민 B12와 엽산 검사를 하고 골수천자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적은 보고를 했다. 이런 경우 주치의들은 우선 비타민 B12와 엽산 검사를 하고 둘 중 한 가지가 결핍되어 있다는 결과를 확인하거나 학인하기 전이라도 다른 검사들이 일치하면 비타민 B12와 엽산 검사를 위한 채혈을 한 직후 결핍된 비타민을 투여하는 것으로 바로 치료를 시작한다. 검사 결과가 비타민 B12와 엽산 모두가 결핍되어 있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혈액 질환을 찾기 위해 골수천자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비타민 검사와 관계없이 골수천자를 하는 경우도 있다. 

금요일 혈액질환을 담당하는 내과 의사로부터 골수천자를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 환자의 혈액으로 비타민 B12와 엽산 검사를 전문 검사 센터에 의뢰했는데 엽산은 정상치를 보이고, 비타민 B12는 정상치의 10배 이상으로 아주 높다는 보고를 받아 거대적아구성 빈혈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혈구감소증을 보이면서 적혈구 모양이 아주 크고 불규칙한 사람이, 비장 비대도 없으면서 거대적아구성 빈혈이 아니라면 매우 찜찜한 결과가 예상된다.

골수천자를 해서 염색한 도말 표본을 보니 형태는 거대적아구성 빈혈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른 혈액 질환이 이런 형태를 보이는 경우는 없다. 다른 모든 검사들과 골수천자 도말표본의 형태까지 거대적아구성 빈혈과 일치하는데 비타민 B12는 결핍이 아니라 도리어 정상치의 10배 이상이라니 이런 경우 어떤 진단이 나가야 하나? 형태를 보고 진단을 하는 병리과 의사나 진단검사의학과 의사는 진단을 하는 일을 직업상의 은어로 ‘이름을 짓는다’고 한다. 이름은 지어야겠고 골수천자 도말표본의 형태는 분명히 거대적아구성 빈혈의 형태다. 다른 검사 결과들도 다 일치한다. 그런데 비타민 B12치가 아주 높고 엽산이 정상치인 사람에게 이 진단을 붙이는 것은 모순이다. 체내에 철분이 아주 많은 사람에게 철결핍성 빈혈이라고 진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금요일 밤 여러 가지로 고심을 했다. 일단 골수천자를 했으니 어떻게든 진단명이 붙어야 한다. 골수천자는 1차적으로 세포의 형태로 진단하는 것이므로 거대적아구성 빈혈이라고 진단을 붙이는 것이 옳다. 그런데 비타민 B12는 아주 높고 엽산은 정상치인 환자에게 거대적아구성 빈혈이라고 진단을 붙이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다. 원인이 없는데 결과만 있다는 꼴이다. 그렇다고 ‘진단불가’라고 보고서를 낼 수도 없다. 이런 생각까지 했다. ‘혹시 세포에 비타민 B12를 받아들이는 수용체에 문제가 생겨 혈중 농도는 높은데도 세포는 비타민 B12를 전혀 이용할 수 없어 생긴 현상은 아닐까? 들은 일은 없는 경우지만 혹시 증례가 있는지 찾아보자.’ 인터넷을 검색해 봤지만 그런 증례보고는 없다.

일단 ‘형태적으로 거대적아구성 빈혈로 판단됨. 혈중 비타민 B12와 상이한 결과 보임.’이라는 두루뭉술한 진단을 붙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할 때쯤 한 가지 가능성이 생각났다. ‘혹시 검사용 혈액을 채취하기 전에 비타민 B12 주사를 맞았다면?’ 골수천자를 할 때 주치의와 잠시 토론을 하면서도 언급했는데 주치의는 검사용 혈액을 채취한 후에 비타민 B12 주사를 주라고 분명히 지시를 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도저히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이 경우는 비타민 B12 주사를 먼저 주었다면 논리적으로 풀린다.

토요일 출근하자마자 기록을 검토했다. 위암 수술 병력이 있다. 그럼 더더욱 비타민 B12가 결핍될 확률이 높다. 비타민 B12가 흡수되기 위해서는 위장에서 나오는 ‘내인자’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위암으로 위 전절제술을 받으면 ‘내인자’의 절대 부족으로 비타민 B12의 결핍이 잘 온다. 다음으로 이 환자는 어느 의원에서 의뢰된 환자였다. 그 의원에서 비타민 B12 주사를 맞고 왔을 수도 있겠다.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비타민 B12 주사까지 비치하고 있을 확률은 낮아 보이지만 일단 주치의에게 전화해서 확인해달라고 했다. 다음으로 검사용 혈액을 채취한 시간과 비타민 B12 주사를 준 시간대를 확인해보니 검사용 혈액 채취 전에 주사를 주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시간대다. 병동 팀장 간호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확인해 달라고 전화를 했다.

먼저 병동 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날 기록은 ooo 간호사가 담당했고, 주사는 ㅁㅁㅁ 간호사가 담당했는데 ooo 간호사는 ㅁㅁㅁ 간호사에게 채혈 후 주사를 주라고 분명히 알려줬고, ㅁㅁㅁ 간호사는 환자(보호자)에게 두 번이나 먼저 채혈한 것을 확인하고 주사를 주었다고 하네요.”

“혹 두 번 이상 검사용 채혈이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요?”

하면서 전산을 검색해보니 그날 채혈은 그 시간대에 한 번 뿐이었다. 쩝, 간호사들은 철저해서 토를 달 틈을 주지 않는다. 철저한 정도가 카드 청구서를 들고 추궁하는 마누라를 능가한다. 카드를 많이 써서 무려 얼마가 나왔다고 잔소리를 할 때 청구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마누라와 같이 마신 맥주값이라든지, 가족 외식비를 내가 쓴 비용에 포함시켜 계산한 경우가 있어 반격의 여지라도 있지만, 간호사들이 간호 기록을 들고 따질 때는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다.  이제 한 가지 가능성은 사라졌고 환자를 의뢰한 의원에서 주사를 주고 난 후에 환자를 의뢰했을 낮은 가능성 한 가지 뿐이다. 한참 후에 주치의의 전화가 왔다.

“그 의원에서 비타민 B12 주사를 먼저 주고 환자를 보냈다고 하네요. 의원급에 그 주사 비치한 경우가 잘 없는데……”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게 되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다른 일이 손에 잡힌다. 이제 마음 편하게 ‘거대적아구성 빈혈’이란 진단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이름을 짓는’ 일은 때때로 이렇게 어렵다. 나야 최종 진단을 붙이는 일이 자주 없으니 좀 낫지만 매일 조직을 보고 하루에도 수십 건씩 ‘이름을 짓는’ 병리과 의사들은 자주 ‘이름을 짓는’ 일로 고민을 하게 된다.

암세포도 어차피 정상세포에서 변형되어 생기는 것이므로 정상세포로 있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암세포로 얼굴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정상세포와 암세포의 중간 단계라고 할 수도 있는 ‘이형성’에 머물 고 있을 때 그 '이형성' 중에서도 암에 접근한 경우가 있다.

세포 자체의 특성과 주변 환경이 암의 요소와 암이 아닌 요소를 다 가지는 경우다. 이런 경우 세포 자체의 특성을 중요시하는 병리과 의사, 주변 환경을 중요시하는 병리과 의사가 있을 수 있고, 또 세포 자체의 특성 중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대개 설명을 길게 해서 최종 진단은 ‘이것’으로 나가지만 ‘저것’의 특성도 있다고 보고를 한다.

그럼 제일 먼저 외과계 의사들이 불만을 표시한다. “그러니까 결론이 뭐냐? 암이면 많이 절제해야 하고 ‘이형성’이면 조금 절제해야 하는데 어느 정도 절제하라는 소리냐?” 이런 불만보다 더 불안한 것이 있다. 환자들은 설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최종 진단만 본다. ‘이형성’이 심한 경우 ‘이형성’ 혹은 암 진단을 받고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에 가면 설명은 비슷하지만 최종 진단이 다를 수 있다. 그런 경우 “‘그 병원에서 '이형성’이라고 했는데 OO대학병원 가니 암이라고 하더라.” 아니면 “그 병원에서 암이라고 했는데 ㅁㅁ대학병원에 가니 암이 아니라고 하더라.” 하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그렇다고 암과 ‘이형성’ 두 이름을 같이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느 대학병원에 갈지 알아보고 그 대학병원의 교수 특성을 고려해 ‘이름을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고민이 잦은 병리과를 전공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 같다. 대학 다닐 때 어느 병리학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환자들이 교과서대로 아파줘야 말이지요.”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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