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여행기2 "만리장성 무모하지 않았던 역사"

person 김영호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9-06-29 09:58


 " If we fail to reach the Great Wall we are not men(1935.10 Mao Zedong)"

"만리장성에 오르지 못한다면 우린 사나이가 아니다." 모주석이 대장정이 한 창이던 어느 날 만리장성을 회상하면서 뜬금없이 날린 말이다. 추측하건데 그가 1934년에서 장제스 정부에 밀리면서 겪었던 고난과 굴욕의 피난길 9,000Km와 묘한 인연을 간파하며 일괄했을 것으로 확신한다.

대장정은 한 마디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중국 국민당 장제스 총통이나 다른 관측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마침내 뿌리가 뽑힌 것처럼 보였다. 포위망이 가장 약한 서남쪽을 돌파한 홍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군과 각 지역의 적대적인 군벌 군대를 뿌리치면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뒤에는 가족 대부분과 병들거나 부상 입은 2만 명을 포함한 2만 8000명의 홍군이 남겨졌다. 당초 출발자 중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7천 명뿐이었다. 공군까지 동원한 국민당군의 탄압, 더위, 식량부족으로 도중에 죽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반(反)제국주의 등의 목표를 갖고 상하이에서 창립한 이후 15년 동안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 이룩했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과를 모두 잃어버리고 첩첩산중에 움츠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장정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 그것도 역사를 바꾼 대승리로 기록됐다. 홍군은 장정을 통해 혁명을 위한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근거한 공산주의 혁명의 이념을 농촌지역에 전파할 수 있었다. 또한 대부분이 농민 출신인 홍군은 민폐를 전혀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장정은 중국 공산당이 농민들의 지지를 받게 한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그가 대장정으로 보낸 기간은 1935년에서 1936년 10월까지이다. 그가 걸었던 대장정의 길은 사실 만리장성과는 멀어졌던 길이었다. 그런데 왜 그가 뜬금없이 만리장성을 언급했을까.  아마도 모주석은 그의 힘든 행군이 만리장성의 생애와 묘하게 닮아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유적은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세운 방어용 성벽이다. 그러나 그 성은 '1회성'으로 '한줄기'로 조성된 '벽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천년을 두고 끝없이 '중첩'되어 '흙과 돌과 벽돌'로 만들어진 중국인들의 몸부림이었다. 실제로 만리장성을 단순한 군사적 방어막으로 이해하고 덤비면 풀리는 숙제는 없고 혼란만 야기될 뿐이다. 그러나 문화사적 의미로 만리장성을 바라보면 달라진다. 그것은 중국민족이 외세와 선을 긋게다는 의지의 발로이며 오랑캐와는 다른 문화적 경계선이 절실했음을 역사속에서 읽을 수 있다.  그 노정은 길었지만 결코 무모하지 않은 담 쌓기를 수 천년 해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 그 만리장성은 그 무모함 덕분에 많은 지구인들은 반드시 보아야할 지구의 인공물로 자리매김 하였고 중국에게 세계의 모든 달러를 긁어모으는 태풍의 눈이 되었다.


*김영호씨는 현재 (재)서울문화재단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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