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별동 선생의 침착성과 참을성

person 박장영
schedule 송고 : 2009-06-19 10:07

이 이야기가 전하는 곳은 경북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이며 이야기의 주인공 별동(別洞) 윤상(尹祥, 1373~1455)선생은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인데 그에 대한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미호리에는 조선 세종 때 대사성(大司成)까지 역임하고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으로 추앙(推仰)받은 윤별동(尹別洞)선생을 모신 사당(祠堂)은 미호리에 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乃城川)은 낙동강(洛東江)의 상류(上流)로 맑고 넓은 백사장(白沙場)이 명사십리(明沙十里) 펼쳐 있는 미호유원지(眉湖遊園地)로 인근의 등산코스와 자연휴양림(自然休養林)이 있는 학가산(鶴駕山)이 바라보이고 있습니다.

[장지문에 얹혀 있는 물그릇에 담긴 침착성]
별동선생이 아직 젊었을 때, 예천군 관아(官衙) 사또(員) 밑에서 일을 보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여름날 윤상이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또가 그의 침착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그가 모르게 장지문 위에 물을 한 그릇 떠서 올려놓고, "지금 소나기가 쏟아져 들어오니 급히 장지문을 내리라"고 그에게 명(命)하였습니다.

한참 지난 후에 "장지문을 전부 내려놓았습니다."라고 사또에게 보고하니, "장지문 위에 아무 것도 없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서슴없이 "장지문 위에 물이 한 그릇 얹혀 있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니 사또는 다시 "그러면 장지문 위에 물그릇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하고 되물었습니다.

"장지문을 내리기 전에 장지문 위를 막대기로 훑어보니 막대기 끝에 무엇이 닿기에 공상을 놓고 올라가 보니 물이 한 그릇 있어서 조심하여 물그릇을 내려놓고 장지문을 내려서 닫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윤상의 침착성에 탄복한 사또는 그 후 모든 일을 마음 놓고 그에게 맡겼으며 크게 출세(出世)할 인물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거위의 죽음을 면케 한 참을성]
윤상이 먼 길을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어느 주막에 들게 되었습니다. 주막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앉았노라니, 주인의 손자인 듯한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구슬 한 개를 가지고 대문 밖에 나가서 놀다가 그만 구슬을 손에서 떨어뜨리자 그 때 마침 아이의 옆에서 먹이를 찾던 거위가 구슬이 먹이인 줄 알고 널름 집어삼키고 말았는데, 한참 후 주인집에서는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아기가 가지고 있던 구슬은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家寶)로 여기던 것으로 구슬이 없어졌으므로 큰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 주막에 있는 손님은 윤상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 구슬을 훔쳐간 것으로 의심받아 막무가내로 내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내일 아침까지만 기다려주면 찾아 준다고 하였지만 계속 실랑이를 하자, 주인은 하인들에게 시켜 그를 밧줄로 꽁꽁 묶어서 관가에 끌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윤상은 태연한 자세로 저기 있는 거위도 다리를 새끼로 매어 멀리 못 가게 내 옆에 같이 있게 해주면 내일 아침 식전(食前)까지 틀림없이 구슬을 돌려주겠다고 주인에게 사정하였습니다.

주인은 그의 말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지만 이미 날도 저물고 하였으니 그렇게 하겠노라 하면서도 그가 밤새 달아날까 싶어 기둥에 꽁꽁 묶어 놓고는 그 옆에 새끼로 다리를 묶은 거위를 함께 묶어 놓고서는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윤상 옆에 다리가 묶인 거위는 똥을 누게 되었고, 따라서 어제 저녁에 주워 먹은 구슬도 함께 따라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윤상은 주인을 불러서 거위의 똥 속에서 구슬이 있으니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구슬을 찾은 주인은 묶은 줄을 풀어주면서 백배사죄(百拜謝罪)하면서 "거위가 구슬을 먹은 줄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하지 않고 밤새도록 묶여 고생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윤상은 허허 웃으면서 "거위가 구슬을 먹었다고 하면 급한 마음에 어제 당장 구슬을 찾기 위하여 주인장께서 그 거위를 죽였을 것이니 내가 하룻밤만 고생하면 구슬도 찾고 거위도 죽이지 않을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침착성과 참을성 가지고 모든 일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윤상은 마침내 높은 벼슬도 하였고 큰 학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단종(端宗) 임금께 큰 절을 받은 윤상]
 영조 때 어사(御使) 박문수(朴文秀, 1691~1756)가 경상도 북부지방인 안동, 순흥(順興), 예천의 원님들과 영주 부석사(浮石寺) 누마루에서 연회를 벌였을 때의 일입니다. 원님들을 수행하던 이속(吏屬)들은 누마루 아래에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안동사람이 뽐내면서 “안동이 최고”라고 뻐겼습니다.

이에 맞서 순흥 사람이 "우리 고을 옛 어른인 안 문성공이 안동부사로 갔을 때 너희 할아버지들이 발을 씻겨 드렸으니 순흥이 안동보다 더 낫다"고 자랑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예천사람이 "그 까짓게 대수냐? 우리고을 별동선생은 단종(端宗) 임금이 입학할 때 세종(世宗)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큰절을 받았으니 예천이 최고"라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런 말을 누마루 위에서 듣고 있던 박어사가 세 고을 원님들을 불러서 "연회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니 어서 돌아가서 저들의 다툼을 판결하십시오. 그러나 내가 생각건대 예천이 가장 최고인 것 같소."라고 했답니다. 이 이야기는 정조?순조 때에 걸쳐서 이루어진 "연조귀감" 이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 이 이야기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 박장영님은 현재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서 학예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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