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흠 삼천냥

person 박장영
schedule 송고 : 2009-06-04 10:50

조선조 영조 때 경상북도 안동 고을에서 무섭게 찌는 삼복더위도 한풀 꺾인 듯싶은 구월 초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소금사려, 소금이요!"

가냘픈 몸에 굵은 올로 짠 무명치마?저고리를 걸치고 목이 휘어질 정도의 소금 바구니를 머리에 인 복스러운 얼굴의 처녀 달래가 목이 터저라 소릴 지르며 지나갔습니다.

 "에구 저 불쌍한 것"

우물에서 빨래를 하던 동네 아낙네 하나가 처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리다가 하던 빨래를 그냥 내려놓고 일어나

"이봐, 처녀! 소금 한 되만 줘"

아무래도 그냥 보내기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늙은 부모 와 단 세 식구의 생활이지만 그럭저럭 오손 도손 살아온 달래네는 언제부터인가 아버지가 앓아누워 버리면서 고을 동헌에서 포흠(관물을 사사로 소비하는 것)을 얻어다 쓰게 되었습니다. 몇 마지기의 남의 논을 부쳐 먹고 살아오던 달래네의 집은 아버지가 갑자기 누워버리자 농사를 때맞춰 짓지 못하게 되자, 주인은 다른 사람에게 논을 빌려주고 말았습니다. 환자의 약값은 고사하고 먹고 살 길이 막혀버리니 이 딱한 사정을 호소한 것이 포흠을 빌어 쓰게 된 동기였습니다.

곧 나을 줄 알았던 아버지의 병환은 어찌된 셈인지 아무리 약을 써도 차도가 없고, 이럭저럭 달래가 열 두어 살 때부터 포흠을 빌어 쓰기 시작한 것이 열일곱에 접어들어서는 자그만치 삼천냥으로 불어나 있었습니다.

어린 달래가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면서 단 얼마라도 아버지의 약값에 보충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큰 보탬이 되지 못했고, 갑자기 달래의 고을에 나라에서 보낸 암행어사가 내려왔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암행어사라면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 고을에서 일어나는 대소 송사와 재정 문제 등을 다스렸는데 안동부사는 암행어사가 내려온다는 말에 즉시 달래네 집에 포졸을 보내어 삼천냥의 빚을 곧 갚도록 하라고 전달을 했습니다. 당시 포흠 천냥을 갚지 못하면 국법에 의해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달래네는 별수 없이 죽을 날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래서 시작된 것이 달래의 소금 장사였습니다.

 "소금사려! 소금이요!"

그러나 소금 장사를 한다고 해서 그 많은 포흠을 물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내막을 아는 동네 사람들은 달래의 처지를 동정하여 소금을 약간씩 사주었습니다. 하루 이틀에 모아질 리도 없는 포흠빚이고 보면 소금을 파는 달래나 팔아주는 동리 사람이나 답답한 마음은 별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럴 즈음 안동고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이 다 아는 부랑자였는데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성미에다가 성질이 게으로고, 싸움을 좋아해서 나이 서른이 돼 가건만 결혼도 못하고,  평초모양 사시사철 떠돌이 신세로 다니며 사는 그런 사나이였습니다. 아무 곳에나 드러누우면 자기 집 안방이란 식으로 아무 주막에서나 유하고 걸핏하면 주막집 안주인을 겁탈하기 일쑤요 그렇잖으면 동네 유부녀를 유혹하는 것이 일이어서 사람들이 송충이모양 싫어했지만 얼굴 하나는 미끈하고 허우대가 훤출한데다가 기운이 장사여서 아무도 함부로 다룰 수 없었습니다. 한참을 걷던 부랑자는 주막이 있는 거리에 당도하자 갑자기 시장기를 느꼈던지 주머니를 뒤져보더니

"젠장 열입 밖에 없구먼."

하고 중얼거리면서 주막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막걸리 오푼어치를 시켜놓고 먹고 있는데 이때 풍신 좋은 백발노인 한 사람이 주점 안으로 선뜻 들어서며 "어 시장하다"하면서 두리번거리며 주막 안을 훑어보다가 부랑자를 한동안 바라보고서 그의 옆 빈자리로 와서 털썩 주저앉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랑자를 향해 숫기 좋게

"여보게 젊은이 나 술 한 잔 사주구료 ! 뱃속은 출출 한데 돈 가진 것이 없구먼."
"허허허 노인께선 어찌 그리 농담도 좋아하시오! 나도 가진 것이 없으니 안 되겠습니다."


부랑자가 기막힌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이렇게 말하자 노인은

"아니 거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당신은 방금 오푼어치 술을 사먹고 주머니엔 아직도 오푼이 남아있을 텐데, 너무 이 늙은이를 조롱하는구려!"

하며 어서 술을 사내라고 했습니다.
 
“어라! 이 영감 봐라.”

부랑자는 속이 뜨끔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뜻 내놓을 오푼은 아니었으므로

"예, 사실 오푼은 저녁 사먹기 위해 남겨둔 겁니다."
"나중일은 나중일이고 어서 술이나 사주구려! 젊은이가 보기보단 인색하구먼!"


영감이 넉살 좋게 이렇게 말하니 부랑자는 기가 막혔지만 대접을 안 할 도리가 없게 돼 버렸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부랑자로부터 오푼어치 술을 빼앗아 먹은 늙은이는 한참을 신나게 마시더니 어지간히 기별이 왔는지

"어 이제 그만하면 살겠다. 젊은이는 어디까지 가쇼?"

라고 했습니다.

"네 안동고을까지 갑니다."
"어 그래? 그럼 나하고 동행하게 됐구먼! 나도 안동까지 가는데... 자 이젠 떠나 보자 구. 어두워지기 전에"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습니다. 이 바람에 덩달아 자리를 뜬 부랑자는 길을 걸으면서도 공연히 늙은이에게 기가 죽은 듯 연상 쩔쩔 매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떻게 남의 주머니돈이 얼마나 있는 것까지 알고 있고, 또 공짜 술을 얻어먹으면서도 시종 비굴한 데가 없이 어엿한 태도를 하고 있으니 자연히 이 늙은이는 보통 양반이 아니구나 하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젊은이의 저녁 값으로 내가 술을 먹었으니 저녁은 내가 삼세!"

늙은이는 얼마쯤 가다가 이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든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하고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어느 마을로 들어섰을 때 저녁을 짓는 연기가 이집 저집에서 뭉게뭉게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늙은이는 느닷없이 그 동네에서 가장 잘사는 것같이 보이는 집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이리 오너라."

솟을 대문을 향해 노인이 두어 번 소리치자 대문이 열리면서 하인인 듯싶은 사람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지나가던 과객인데 하룻밤 유하고 갈까하니 안에 가서 여쭈어 주시오."

늙은이는 부랑자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인은 난처한 듯

"글쎄, 평상시 같으면 되겠지만 오늘은 좀 곤란합니다. 어쨌든 좀 기다려 보십시오."

하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주인장이 나타나서

"모처럼 오신 손님에게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별 수 없게 되었으니 양해해 주시오!"

주인은 돈 한 냥을 내놓으며 다른 곳으로 가보라고 했습니다. 노인은 주인이 주는 돈을 넌지시 받아 부랑자에게 넘겨주면서 주인을 향해

"그거 안 됐습니다. 내가 약간 맥을 짚을 줄 아는데 한 번 봐 드리면 어떨까요?"

하고 말하니 주인은 갑자기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글쎄 그랬으면 좋겠는데 죽은 사람의 맥을 보아서 무엇 합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죽다니 그럼 초상이 났다는 이야깁니까?"
"글쎄 그렇게 되었습니다. 잘 놀던 아이가 별안간 아프다고 들어오더니 의원을 부르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원 그럴 수가.... 그럼 죽은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한 시간도 채 못 됐습니다."
"어디 내가 한 번 볼 수 없소? 한 시간이라면 아직 살릴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니..."


이 말에 주인은 새삼 노인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병풍을 치우니 열 살 미만의 예쁘장한 사내아이가 누워있었습니다. 노인은 의원이 하듯 눈을 뒤집어보더니 부랑자에게

"여보게 자네는 마당에 나가서 장닭 한 마리 잡아오게. 이 아이는 소생시킬 수 있네"

하고 말하자 주인은 깜짝 놀라면서 이내 커다란 장닭을 잡아가지고 왔습니다. 노인은 어린애의 입으로 닭의 생피를 먹였습니다. 몇 분이 지나자 어린애는 몸을 비틀면서

"컥!"

하고 깨며, 핏덩이를 뱉어내더니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이 닭을 삶아서 미음 죽을 끓여 먹인 다음 생밤즙을 내 먹이고, 한숨 푹 쉬게 하면 아무 탈 없을 것이오."

라고 노인이 말하자 별안간 집안이 떠들썩해졌습니다.

"노인장 고맙습니다. 우리 잡안에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해 주셨으니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

부랑자와 함께 융숭한 대접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얼마 후 그 사내애가 들어와서 노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 노인은

"네가 아까 피리를 불었지?"

하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그렇다고 대답을 하니 노인은 그랬을 것이라면서 그 피리를 가져오라 했습니다.

"원래 이 피리는 오래 쓰지 않고 아무 곳에나 두었던 것인데 자연히 습기가 차서 지네란 놈이 피리속으로 들어갔던 것이오! 그것을 이 애가 모르고 입에 대고는 분다고 숨을 내뱉지도 않고 들어 마신 까닭에 지네가 입안으로 들어가 목구멍 천장에 착 달라붙었기 때문에 기절했던 것이오. 지네는 닭하고는 상극인 까닭에 그 피를 넣었던 것이며, 까만 피를 쏟은 것은 지네가 닭피에 녹아서 나온 때문입니다."

이 말에 주인과 소년이 아연 실색한 것은 물론 부랑자까지도 노인의 말에 놀라고 있는데 노인은 다시
"첫눈에 주인장의 얼굴에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고로 하늘이 감동하여 늦게나마 득남하는 복을 주었으며 또한 아이의 수가 길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오."

하고 말하니 주인은 더욱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노인이 떠나려고 하자 주인은 막무가내로 노인을 며칠 동안 쉬어가게 하려고 했으나 노인이 굳이 가려들자 주인은 재산문서 한 다발을 꺼내오며

"우리 집안의 멸문지화를 모면토록 해주셨으니 재산을 반분하여 고마움에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선뜻 문서를 내놓았습니다. 노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며 옥신각신 하다가 주인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오천냥의 어음을 내놓으며 받기를 원하자

"꼭 그렇다면 천냥짜리 어음을 한 장만 주시오"

하고 천냥 어음을 받아 주인하고 헤어진 다음, 그 어음을 다시 부랑자에게 맡기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니 부랑자는 공연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알지도 못 하는 주제에 오푼어치 술을 받아준 일밖에는 없는데 노인과 함께 있는 동안 노인의 귀신이 곡할 재주를 보았고, 거기다 거액의 돈까지 맡기니 어쩌자는 속셈인지 알 수가 없어 헤어지자는 말조차 못하고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아하니 젊은이는 안동길이 급하지 않은 것 같으니 나하고 두어군데 더 들렀다 가도록 하세. 그래도 괜찮겠지?"

길을 걷다말고 노인이 이렇게 남의 속을 들여다보듯 말하니 꼼짝을 할 수 없게 된 부랑자는

"예, 뭐 그리 급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말해버렸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그렇다면 좀 길을 돌아서 가세"

하며 세 갈래의 길에서 한길로 접어들어 한낮쯤 해서 어느 주막 앞에 당도하게 되었는데 그러자 노인은

"자네 술 한 사발 마실 생각 없나?"

했습니다. 마침 목도 말라오던 참이라 좋다고 대답하고, 주막에 들어서니 주막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주모만이 술을 거르고 있었는데 어지간한 미인이었습니다. 노인은 대뜸 주모 앞에 다가서며

"술 두 잔만 내시요."

하고는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술장사 십여 년 만에 주인댁은 돈푼께나 모았군 그려!"

하고 엉뚱한 수작을 붙였습니다.

"영감님이 뭘 좀 아시는 모양이군요." 

주모도 싫지는 않은 말대꾸를 했습니다. 

"아무렴 내가 알기는 알지! 주인댁이 올해 서른여섯이지?"
"아이 잘못 보셨어요. 서른이에요."
"허허 거짓말하면 못써! 남은 다 속여도 난 못 속이지. 남들에겐 서른이지만 사실은 서른여섯에 생일은 동짓달 초엿새에 난 시간은 술시, 어때 그래도 아니라고 우길 텐가? 늙은이를 속이면 못써!"


그러자 주모는 깜짝 놀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아니 어떻게 맞추세요?"

하고 신통하다는 표정을 짓자

"뭐 그것만 아는 줄 아나 사람의 길흉화복도 맞춰내는데... 어떻든 주인댁이 오늘밤 큰일도 당하지."

그러자 주인여자는 큰일이라는 말에 더욱 놀라면서

"무슨 큰일이 있어요? 그럼 좀 가르쳐 주세요!"
“무슨 말버릇이 그렇담. 알고 싶으면 좀 더 정중하게 물어야지"
"예 잘 못했습니다. 좀 알려주세요! 호호홋"
"아닌걸 아직 주인댁이 날 덜 믿는 것 같아. 그럼 더 믿도록 해주지"
"어떻게요?"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리다고 하라구. 주인댁은 남편 몰래 부엌 밑바닥에다가 항아리를 묻고 돈을 감춰둔 게 있지?"
"네?"


주모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남편조차 몰래 숨겨둔 돈을 알아내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막상 실토할 수도 없는 노릇 이이서

"그렇다고 치고 또요"

하고 얼버무리자

"그래도 솔직하지 못하군. 그럼 그 돈이 전부 얼마나 되나 알겠는가? 아마 주인댁도 나만큼은 모를 거요."

주모는 얼떨결에

"글쎄 저도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노인은

"그렇게 나와야지, 에 오늘 아침에 갖다 넣은 서른두냥까지 합치면 오천 삼백 예순 다섯냥 여섯푼이지."
"네"


목소리조차 높아진 주모를 바라보며

"틀림 없을 테니 들어가 세어보고 나오라구."

하고 노인이 말했습니다. 주모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부랑자는 노인의 행동에 한마디 거들지도 못하고 입만 딱 벌리고 있는데

"어서 술이나 마시게"

하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윽고 여인은 아주 탄복한 듯 나오면서

"어쩌면 그렇게 귀신같이 맞추세요?"
"어쨌든 거짓말이 아니지?"
"예 한 푼도 틀림이 없어요."
"그럴 테지. 이제부터 내말 을 믿을 테지."
"예, 여부가 있습니까. 말씀만 하세요."


주모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주인댁은 오늘밤 죽을 운이네"
"네?"


주모만 놀란 게 아니고 부랑자마저 놀랐습니다.

"영감님 살려주십시오. 제가 땅속에 돈을 감추어 둔 것도 다 잘살아 보겠다고 한 일인데 한 번 재미있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다면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합니다. 영감님 땅 속의 돈 다 드릴 테니 목숨만 좀 살려 주십시오"

여인은 죽는 것이 싫어서 노인을 붙잡고 애원을 했습니다.

"땅속에 돈을 다 내게 줘버리면 너무 억울하지 않소. 그러니 내가 그 비방을 가르쳐주고 주인댁이 살아나면 내게 천냥짜리 어음을 하나만 주시오!"

노인은 현금도 필요 없이 어음으로 천냥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비방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술장사 여인은 노인의 말을 듣자 일찌감치 덧문을 걷어치우고서 노인과 부랑자를 안방과는 동 떨어진 구석방에 유하도록 하였습니다. 저녁을 일찍 치우고 대문과 방문을 단단히 걸어 채운 후 노인의 말대로 여인은 액땜을 하고 있는 판인데 밤이 이슥 하자 누가 대문을 덜컹 흔들어대며 남자의 목소리가 났습니다.

"아니 오늘은 벌써 대문을 걸었네. 문 좀 열어줘! 나요!"
"내가 누구란 말이야. 아니 밤중에 어떤 놈이 남의 집 대문을 흔드는 거야! 어서 썩 꺼지지 못해!"


술집 여자는 안방에 앉아서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습니다. 그러자 그 사내는 혼자 중얼거리며 그냥 돌아가는 눈치였습니다. 그리고 아마 한 시간쯤 지나서 별안간 안방 문 앞에 어떤 사내 그림자가 시커멓게 비치더니 안방 문을 잡아 흔들어댔습니다. 그리고는 안 되겠던지 힘대로 방문을 잡아 밀쳐 버렸습니다. 그러자 문고리가 쑥 빠지면서 덜컥 문이 열리며 짐승 같은 사내가 시퍼런 칼을 들고 방안에 들어섰습니다. 주인 여자는 이제는 죽었구나 싶어

"에구머니나"

하고 방 한쪽 구석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이때

"이년 불을 켜라. 어째 너 혼자냐?"

하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틀림없이 시골에 간다던 남편의 목소리였습니다.

"아니 여보! 당신이 웬 일이오?"

주인여자는 무서움이 가셨는지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말을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노인의 말이 귀신같이 맞은 것에 새삼 탄복을 했습니다. 먼저 번에 대문을 흔들던 사내의 음성은 남편 몰래 만나는 샛서방의 목소리이고, 그는 남편이 오늘 시골을 다니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던 것이며 이런 기미를 알고 그전부터 꼬투리를 잡으려고 벼르고 있던 남편은 일부러 시골 다녀온다고 이르고는 밤중에 급습을 한 것입니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목숨을 건지게 된 주모는 다음날 천냥짜리 어음을 노인에게 주며 수없이 치하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집을 나선 두 사람은 황혼녁에 어느 산기슭에 도착했는데 마침 산중턱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 저기 가서 구경을 하고 가세."

노인은 부랑자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지금 막 하관하려는 중이었는데

"어! 잠깐 입관을 중지하시오!"

노인은 별안간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은 웬 미친 늙은이가 와서 그러나 싶어 노인에게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아니, 남의 장지에 와서 웬 소란이오?"
"저놈의 늙은이가 미쳤나"


여기저기서 욕설 이 연달아 나왔습니다.

"하관을 중지하고 내말 좀 들어보시오"

노인은 욕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상제가 무엇을 느꼈음인지 하관을 중지하라고 하는 노인 앞으로 다가섰습니다.

"노인께서 하관을 중지하라시는데 필시 까닭이 있으신 모양이니 서슴치 마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내 우선 한마디 묻겠는데 이 장지를 누가 선택하였소?"
"예 저기 계시는 지관께서 특별히 골라주신 터입니다."
"허허 특별히 고른 장지라? 아무튼 큰 일 날 뻔 하였소."
"예? 큰 일 이라뇨?"


상제는 깜짝 놀라면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관이라 자처하는 늙은이가 다가서면서

"아니 당신은 누군데 남이 잡아 놓은 명당자리를 가지고 시비요? 아니 이 장지가 어때서 글렀소?"

하고 잡아먹을 기세로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상제를 바라보며

"여하간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겠소? 자! 증명해 주리다."

그리고는 옆에 놓여있는 커다란 바위를 파놓은 묘 속으로 힘껏 집어 던져보라고 했습니다. 지관이나 사람들은 연상 미친 늙은이가 망형을 하느라고 그런다했지만 상제만은 이유 없이 노인이 그러지 않으리라 싶어 장정 몇 사람을 시켜 바위를 묘 속에 던져 보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덩! 소리도 요란하게 묘 속에 갑자기 구멍이 뚫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구멍 속에서 물이 콸콸 솟아나와 묘에 가득히 채워졌습니다. 그 둘레의 사람들이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바람에 지관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노인 말씀을 듣지 않았다가는 큰 일 날뻔 했습니다. 보통 어른이 아닌 줄 모르고 큰 실수를 저질렀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기왕이면 노인께서 장지를 선택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상제는 노인에게 백배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장지를 선택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도 노인은 명당 한자리를 잡아주고 역시 천냥을 받았다. 노인이 지적해 준 자리를 파니 오색이 영롱하게 비쳐 나왔습니다. 이리하여 삼천냥의 어음을 사흘 동안에 벌은 노인은 이번 어음 역시 부랑자에게 맡기면서 걸음을 옮겼습니다.

 "영감님 어째 길을 놔두고 이렇게 산속으로 들어가십니까?"
 "왜 겁이 나나? 젊은이는 어떻게 나 같은 늙은이보다 겁쟁이란 말이여?"
 "내가 왜 겁쟁이란 말입니까? 저야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만 영감님이 험한 산속으로 자꾸 들어가시니 다치실까 염려가 되서 그렇습니다."

하고 허세를 부렸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그렇지도 않을 걸세. 내가 방금 겁쟁이란 소리를 하니 갑자기 겁쟁이란 소리가 듣기 싫어진 게  아닌가? 아무튼지 조금만 더 가세. 다 왔으니까."

노인이 알고 말하는데 할 말이 있을 리 없는 부랑자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랑자는 노인을 따라 산을 두 개나 넘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산을 타고 내려오는 길이었는데 산 중턱쯤 내려왔을 때 노인은 갑자기 부랑자를 돌아보고

"잠시 여기 좀 앉아 있게나. 내 요뒤에 가서 소피를 좀 봐야겠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랑자는 노인을 한참 기다렸으나 어찌된 셈인지 노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래로 내려가고 싶었으나 어음 삼천냥을 맡아가지고 있는 몸이라 그럴 수도 없어 마침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얼마 후 노인이 사라 진 쪽에서 갑자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삼마도지 팔마도지 아흡고지 대지생이 이 음산에 산신령님 못오시고 뻣뻣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포흠빚 삼천냥을 하루속히 갚고지고"

캄캄한 밤중에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여자의 중얼거리는 음성을 들으니 부랑자는 전신이 오싹해졌습니다. 그러나 원래가 호탕한 부랑자는 은근히 호기심이 나서 그쪽으로 고개를 길게 뽑아 넘겨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처녀가 돌제단에 하얀 쌀밥과 산나물을 올려놓고 무엇인가 열심히 빌고 있지 않은가! 순간 부랑자는 흠찔했습니다.

"웬 처녀여, 혹시 여우일까? 그런데 듣자하니 포흠삼천냥 어쩌구 하는 대목이 어쩌면 주머니 속의 금액과 같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부랑자는 촛불을 켜두고 빌고 있는 처녀 옆얼굴을 보면서 어쩌면 저리도 고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처녀가 빌고 있는 제단 건너편을 보게 된 부랑자는 선불이나 맞은 듯 별안간 움찔하고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석상이 하나 서 있는데 그 석상의 얼굴이 아무래도 어디서 많이 본 것같이 낯익은 데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넋을 잃은 듯 석상을 한동안 바라보던 부랑자는 처녀가 다시 삼천냥의 빚 운운하자 그제야 무릎을 탁 쳤습니다.

그 석상의 얼굴이 지금까지 자기가 기다리고 있는 그 노인의 얼굴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노인은 석상의 화신이었던 것입니다. 처녀가 매일같이 찾아와서 삼천냥의 빚 때문에 밤새 비는 것을 보자 그 정성에 감동되어 손수 빚을 마련해 부랑자로 하여금 전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묵묵히 앉아 기억을 더듬던 부랑자는 노인의 마음, 아니 석상의 뜻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놀라는 처녀를 달래가지고 자초지종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산신께서 나를 지적하여 그대를 만나게 하였으니 여기에는 필시 깊은 뜻이 있으리라 생각하오, 나도 뜻한바 있어 앞으로 참사람이 되겠으니 어서 이 고마움을 빌고 그대의 부모님을 만나러 갑시다."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두 사람은 포흠 삼천냥을 갚은 것은 물론이요 산신의 중매로 혼인까지 해서 오래오래 아들딸 낳고 다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 이 이야기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 박장영님은 현재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서 학예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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