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만난 조선 선비 무민재 이시양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에 실린 글입니다.
2월 마지막 월요일, 평소 점심식사 대신 잠을 청할 시간이지만 전날 밤늦도록 동네 ‘하이트 광장’에서 부부애를 다진 덕에 아침을 먹지 못했으니 점심이라도 먹어야 했다. 삭사 후에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잠 대신 인터넷 검색을 했다. 검색을 하다보니 1년 반 정도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던 고서 경매 사이트에 손이 갔다. 고서에 관심을 가지고 살다가 2년 전부터 관심을 끊었는데, 책이 마음에 들면 가격이 너무 비싸고, 가격이 싸면 별 관심이 가지 않는 책뿐이어서 내가 하기엔 좀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어떤 책이 얼마의 가격에 나오나 정도의 관심으로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어떤 호구단자를 만났다. 호구단자란 ‘다음(Daum)’의 문화원형사전에 의하면 ‘호주(戶主)가 각 개인의 호구상황을 작성하여 관청에 제출하는 문서로 오늘의 호적신고서이다. 조선시대에는 매 3년마다 호적을 작성했는데, 호주는 자신의 가족상황과 변동을 단자(單子)로 만들어 2부씩 해당 관청에 제출한다.’라고 되어있다. 말하자면 요즘의 가족관계 증명이나 주민등록등본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호구단자의 제목이 관심을 끈다. ‘조선시대 경북 안동의 학자 李時養 호구단자 2장’. 이시양 본인의 호구단자와 그의 사후에 만들어진 손자 이경연(李景淵)의 호구단자였다. 이시양이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안동에 살던 선비라니 관심이 간다. 페이지를 열고 내용을 검색해보니 영천이씨란다. 영천이씨라면 안동의 유명한 농암종택이 영천이씨 종가다.
판매자가 올려놓은 사진을 보니 호구단자의 주인공이 사는 곳이 ‘분천리(分川里)’라고 되어있다. 분천리라면 지금은 수몰되었지만 영천이씨 세거지로 도산서원 바로 앞에 있던 아름다운 동네다. 현재의 농암종택은 이 분천리에서 현재의 가송리로 옮긴 것이다. 지난해 읽은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 http://blog.daum.net/cordblood/13002258참조)’라는 책을 쓴 이성원 선생님이 바로 영천이씨의 종손으로 농암종택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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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매자가 올린 이시양의 호구단자 사진 |
분천리에 살던 영천이씨라면 농암종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 농암종택의 종손 이성원 선생님과도 분명히 관계가 깊은 사람일 것이다. 나는 농암종택의 종손 이성원 선생님께 잘 보여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평소에 부려보고 싶은 멋 중에 하나가 어느 여름날, 마음이 통하는 친구 몇과 농암종택의 애일당에서 안동소주에 문어를 곁들여 낮술을 한잔 하고, 늘어지게 낮잠을 잔 다음, 밤에는 긍구당에서 밤새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치는 것인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나 같은 인간에게 그러라고 종택의 두 사랑채를 내어줄 일도 없다. 지난 가을에는 국회의장이 와서 묵고 갔단다. 국회의장은 고사하고 동네 통장도 되지 못하는 내가 농암종택에 하룻밤 재워달라고 할 처지는 아닌 것이다. 나름대로 종손 이성원 선생님께 내 존재를 알리려고 노력했지만 내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번개같이 잔머리를 굴린다. ‘혹 이 호구단자의 주인공이 종손의 윗대 어른 중 한 사람이라면 이것을 사서 가져다드리면 제법 점수를 딸 수 있겠다. 혹시 알아? 기념으로 한번 긍구당에서 재워줄지.’ 경매 시작 가격을 보니 제법 비싸게 매겨져 있다. 시작가 5만원. 보통 호구단자는 1, 2만원에 시작가가 매겨진다. 자신과 무관한 사람의 호구단자라면 족보에 다 있는 내용의 문서를 사기 위해 큰 돈을 쓸 사람은 없다. 다른 호구단자에 비해 거의 두 배의 가격이 매겨진 셈이다. 그럼 입찰하기 전에 일단 조사를 해봐야지.
인터넷에서 이시양이란 이름으로 검색하니 바로 정보가 나왔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字)는 자회(子晦), 호는 무민재(无憫齋). 1770년(영조 46년) 태어났고, 아버지는 경모당(敬謨堂) 이상흡(李祥?), 어머니는 김방한(金邦翰)의 딸이다. 과거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학문적으로는 특히 주자(朱子)와 이황(李滉)을 신봉하였으며, 시경과 서경을 탐독하였다. 집이 청빈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살았으며, 학행으로 감사의 추천과 어사의 장계가 여러 번 있었으나 벼슬을 받지 못하다가 1859년(철종 10년) 수직(壽職, 장수하여 벼슬을 받는 것)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860년(철종 11년)에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예조의 장으로 치러졌는데 판서인 이효순(李孝淳)이 집례하였다. 사시(私諡, 유림에서 시호를 정하는 것)를 정간공(正簡公)이라 하였으며 그의 글을 모은 무민재문집(无悶齋文集) 4권2책이 1955년 증손 희원(羲遠)과 희술(羲述) 등에 의해 편집, 간행되었다. 종합하면 조선후기에 영남지역에선 상당히 유명한 학자였던 모양이다. 이 정도면 5만원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문서이다. 결정적으로 결심을 굳히게 만든 다른 내용이 검색되었다. 국학진흥원에 기탁된 영천이씨 농암종택 기탁유물에 1832년 임진년 정월 4일에 작성된 망기(望記)란 것이 있는데 망기란 어느 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때 사용하는 문서라고 한다. 이 망기는 이정규(李楨奎)란 선비가 분강서원의 유생(儒生) 이시양을 추천한 것이라고 되어있었다. 그러니까 이 두 장의 호구단자는 이 망기와 한 세트가 되면 더 좋을 문서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의 망기로는 벼슬을 받지 못했고 손자대의 호구단자에서 그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가 된 것을 알 수가 있으니까.
입찰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5만원에 입찰을 했다. 일반적으로 호구단자의 시작가가 5만원이라면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는 비싸게 느껴진다. 다른 경쟁자는 없으리라는 확신이 섰지만 알 수 없는 일이라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전에도 꼭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 일찌감치 입찰을 했는데 10초 전후를 남기고 다른 사람이 높은 가격으로 입찰을 하는 바람에 눈 뻔히 뜨고 놓친 경험이 있다. 마감 시간이 다가올 때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리며 경쟁자가 나타나는지 감시했다. 경쟁자가 나타나면 몇 초 안에 더 높은 가격을 쓸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다행히 경쟁자는 나타나지 않고 최저가 5만원에 낙찰을 받았다.
이제 내용을 즐길 차례다. 무민재의 호구단자부터 천천히 뜯어본다. 자신을 소개하는 첫 단어가 유학(幼學)이다. 당대의 학자가 자신의 학문을 유치하다고 겸손하게 표현한다. 다음으로 연 86(八十六) 경인(庚寅)이라고 되어있으니 무민재는 이 호구단자를 쓸 당시 86세로 경인년(1770년)에 태어났다는 뜻이다. 출생 연도와 당시 나이를 종합하면 이 호구단자는 1855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아래 주소에는 붉은 줄을 그었는데 잘못 적은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고 분천리는 확실하다. 옆에 적은 영천인(永川人)이라는 것은 본관을 적지 않아 뒤에 삽입한 것으로 생각된다. 옆줄부터는 가족관계를 적는데 조상은 자신보다 한 칸 위에 적고, 후손은 한 칸 아래, 노비는 더 아래 적어 상하관계를 나타내었다. 아버지 이름 앞에는 학생(學生)이라고 적어 특별한 벼슬을 하지 않았음을 나타내었다. 아버지 경모당(敬謨堂) 이상흡도 문집을 남길 정도의 학자였다. 할아버지는 건너뛰고 (한자를 읽을 수가 없어서), 외조부는 성균관 진사 김방한(金邦翰)이라고 적혀있고, 부인은 풍산김씨로 소개되어 있는데 아마도 오미리의 풍산김씨 집성촌에서 시집을 온 모양이다. 데리고 있는 가족으로 먼저 아들 규현(奎鉉)의 이름이 나온다. 모암(慕庵) 이규현 역시 모암집이라는 문집을 남긴 학자다. 아들의 나이 48세로 무진년생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봐서 1808년생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38세의 차이가 나는데 맏아들이라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위로 딸들만 있었거나, 아들이 있었지만 먼저 사망했거나, 이 호구단자가 만들어질 당시 위로 아들이 있었지만 다른 곳에 살고 있거나 한 모양인데 족보를 볼 수 없으니 확인할 길은 없다. 손자는 조연(祖淵)이라고 읽히는데 33세로 아들 모암 이규현과는 15세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조연의 아버지가 모암이라면 열 여섯에 이조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혹 이조연은 모암 이규현의 형님의 아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역시 확인은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여종인 비(婢) 순향(順香)의 이름이 나온다. 순향은 신축생으로 1841년이나 1781년생이어야 한다. 열다섯의 꽃다운 나이였거나 75세의 할머니였을 것이다. 노비가 한 명 뿐이었던 것으로 봐서 이 집안이 부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손자인 이경연(李景淵)의 호구단자다. 역시 자신을 유학(幼學)이라고 낮추고 있다. 이 호구단자를 만들 당시 28세로 정유년에 태어났다고 되어있으니 1837년생이다. 그럼 이 호구단자는 186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위의 호구단자에 비해 9년 정도가 늦게 만들어진 것이다. 아버지 이규현의 이름 앞에는 통덕랑(通德郞)이라는 품계가 적혀있는데 모암 이규현은 위의 무민재의 호구단자가 만들어진 이후 정5품 벼슬인 통덕랑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인 모암 이규현이 임술년에 사망했다고 되어있으므로 1862년 이 호구단자가 만들어지기 2년 전에 사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할아버지 이시양의 이름 앞에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라는 정3품 당상관인 무관직 품계가 붙어있다. 무민재 이시양이 1859년에 이 직책을 받았으므로 90세의 나이에 이 벼슬을 받은 것이다. 장수하여 받는 벼슬을 수직(壽職)이라 하는데 수직은 대개 무관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할아버지 이시양이 경신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1860년에 91세로 사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외조부는 선비인 야성송씨 송학정(宋學程)이라고 되어있으므로 어머니 성이 송씨였을 것이다. 데리고 있는 식구는 동생, 사촌동생, 노비다. 동생은 병연(昺淵)으로 당시 25세니까 세 살 아래다. 사촌동생은 승연(升淵)으로 27세였다. 할아버지 때의 여종인 순향은 이 때도 이 집에 있었는데 당시 25세거나 85세여야 한다. 25세였을 가능성이 많아보인다. 결혼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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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매자가 올린 이경연의 호구단자 사진 |
이제 이 호구단자를 활용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앞에서 밝혔지만 내가 소장하기 위해 산 것이 아니라 농암종택에 전달하고 종손 이성원 선생님께 점수를 따기 위해서 샀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호구단자가 있어야 할 위치는 국학진흥원의 영천이씨 농암종택 기탁유물 속에 들어가야 한다. 국학진흥원에서 이런 사소한 문서를 받을지도 의문이지만 내가 국학진흥원에 바로 기증을 하면 영천이씨 농암종택 기탁유물과는 별개의 것이 되어버린다. 국학진흥원에 가져다주더라도 문중 관계자가 가져다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원래의 얄팍한 의도대로, 또 그것이 정도이기도 해서, 농암종택의 종손 이성원 선생님께 전달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마침 대구에서 같은 전공을 하는 선후배들이 안동에 올 일이 생겼는데 하회마을이나 도산서원이 아닌 새로운 곳을 안내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럼 당연히 농암종택으로 가는 거지. 3월 첫 금요일, 호구단자 두 장을 들고 농암종택을 찾았다. 종손 이성원 선생님은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고 안동식혜와 떡까지 내놓았다. 이성원 선생님으로부터 무민재 선생은 자신의 9대조와 생가로 4촌이고 3대에 걸쳐 알아주는 학자 집안이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대화 중에 이성원 선생님으로부터 언제든지 놀러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입찰할 때 기대한 목적을 달성했다. 투자는 제대로 한 셈이다.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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