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일당(愛日堂) 현판에 얽힌 이야기
1519년 9월 9일(음), 농암선생은 이날 안동부사의 신분으로 '남여귀천'을 막론하고 안동부내 80세 이상 노인을 함께 초청한 실로 파격적인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를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은퇴를 전후하여, 고향(도산)에서 70세 이상 노인을 초청했는데, 마침 그 숫자가 아홉이고 '애일당'에 모였기에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라 했습니다. 농암은 이런 경로잔치 때마다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노인들과 어버이를 즐겁게 해드렸습니다. '애일당구로회'는 근세까지 450여년을 이어와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습니다.
당시 농암가문에는 유난히 장수자가 많았는데, 농암은 89세, 아버지는 98세, 어머니는 94세, 조부 84세, 증조부 76세, 고조부인 입향조 84세이며, 삼촌(鈞, 직장) 96세, 외삼촌(權受益, 문과급제, 호조참판)92세, 아들 6형제도 문량 84세, 희량 65세, 중량 79세, 계량 82세, 윤량 74세, 숙량 74세를 살았습니다. 이런 광경을 유추해보면 농암가문의 경로전통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450여 년 전 조선조 연산군 때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농암 이현보 선생이 고향의 수려한 산천도 즐길 겸 늙으신 어머님을 위하여 말년에 정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선생은 고향인 분천에 정자를 짓고 현판을 걸기 위하여 중국에 있는 명필에게 글씨를 받으려고 아끼는 제자를 보냈습니다.
제자는 반년이나 걸려서 머나먼 중국까지 와서 다시 그 명필을 찾기 위하여 한 달을 이상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물어물어 드디어 깊은 산중에 있는 그를 찾아 조선국 농암 선생에 대한 말씀을 올리고 애일당 현판글씨를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뭐 보잘 것 없는 사람의 글씨를 받으려고 그 먼 곳에서 왔느냐?"고 하면서 산에서 꺾어온 칡 줄기를 아무렇게나 쥐고 먹을 듬뿍 찍더니 단숨에 "愛日堂" 석자를 써서 내 주었습니다. 좋은 붓에 잘 간 먹을 찍어 정성스레 써 줄 것을 기대했던 제자는 내심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건 글씨가 장난으로 휘갈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는 "다시 써 줄 수 없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중국 명필은 "이 글씨가 마음에 안 드시오."하더니 쓴 종이를 가볍게 두세 번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세 글자가 꿈틀거리더니 세 마리의 흰 학이 되어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자는 자신의 우매함을 백배사죄하며 다시 써 줄 것을 며칠동안 간청했으나 결국 거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명필은 "이 아래 내려가면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이르는 대로 다시 산 아래에 있는 명필을 찾아가니 "산중에 계신 분이 우리 스승님인데 그 곳을 찾아가 보시오."하므로 자신이 당한 일을 자세히 밝히니 "본국에서도 별로 남에게 글씨를 써 주지 않는 분인데 특별히 조선국에서 왔다고 해서 써 주셨는데 좋은 글씨를 놓쳤군요."하며 자기의 글씨는 선생님의 글씨를 반도 따라가지 못하지만 학 세 마리는 못되어도 한 마리 정도 된다고 말하며 붓을 들어 정중히 써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글씨를 받아가지고 돌아오는 제자는 농암 선생께 면목이 없고 그 애석함을 누를 길이 없어 돌아온 뒤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유서에서 이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려서 어느 해 큰 홍수가 나 정자를 휩쓸어 갔을 때 현판도 함께 떠내려가 아주 잃었다고 체념했는데 그곳에 40㎞ 떨어진 곳의 한 어부가 이 현판을 찾아 들고 와 무사히 애일당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 강에 갔더니 무언가 물결을 타고 흘러내려오는데 찬란하게 빛이 났다고 합니다. 어부는 금물을 입힌 진귀한 것이 아닌가 해서 급히 배를 대어 건져 내었더니 애일당 현판이었다고 합니다.
※ 이 이야기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 박장영님은 현재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서 학예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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