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지 못한 청탁 원고
2월 말 우연한 기회에 인터넷 고서 경매 사이트에서 안동의 어느 중요 문중에 소속된 조선시대 선비의 호구단자를 발견한 후(여기에 관한 글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에 원고를 보낸 상태라 완전 공개는 게재 여부의 결정 혹은 인쇄 후로 미룬다.) 고서 사이트를 뒤적거리는 병이 도져버렸다. 그 호구단자를 발견한 며칠 후 고서 사이트에서 재미있는 문서 하나를 더 발견하게 되었다.
‘근세 유학자 기암(箕庵) 김헌주(金獻周)의 친필 서문’이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였다. 이런 문서야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수시로 올라오는 문서이니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별 생각 없이 클릭을 해서 보니 ‘김헌주(1866~1936)는 의성인(義城人)으로, 자(字)는 경맹(景孟), 호(號)는 기암이며, 안동 귀미(龜尾)에 거주한다. 귀와(龜窩) 굉(土+宏)의 주손으로 척암(拓菴) 도화(道和)의 손자이며 유필영(柳必永)의 문인이다.’ 라고 소개되어 있다. 판매자는 이 문서 마지막에 있는 문소(門召) 김헌주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이나 문헌집에서 검색을 한 내용을 올렸을 것이다. 문소(聞韶)는 의성의 옛 이름이다.
판매자가 검색한 내용이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힘들지만 안동 귀미에 거주한 의성김씨라면 안동 내앞 마을의 의성 김씨와 연결되는 집안일 가능성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서 상태로 봐서 구한말 전후나 일제 강점기의 문서로 생각되고 이 시기에 한문으로 문장을 구성할 수 있는 선비로 같은 의성김씨라면 같은 한자 이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니 소개된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이 많아보였다. 한문 선생님이신 김승균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니 가능성이 있겠다고 하셨다. 경매 최저가 3만원이었다. 구한말 전후의 문서 한 장에 3만원이라면 무관한 사람에게는 비싼 가격이기 때문에 경쟁자는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예상대로 단독 입찰로 3만원에 낙찰 받았다.
김승균 선생님이 번역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晴暉堂李先生沒 且三百年之久矣 道德之深且奧者 已至於泯而不傳 文章之著於外者 亦??而不垂 忠孝之表表者 幷皆鬱而不章 ?所謂天道 是耶 非耶 後孫漢儀 昔收拾諸先輩敍述之文 及唱酬講道之可以徵信者 又采倡義前後文字 與狀碣合爲實記一冊 將繡棗而傳諸後 於是而先生之道德也 文章也 忠孝也 將日星於昏衢矣 豈不?哉 昔太史氏 敍伯夷之傳 引重於孔子之言 則今寒岡先生之誌 曰早從師友 聞有義理之學 好古謹禮 出乎其性 人莫能及 梧里李文忠公之? 曰公之道學 千載眞儒 公之忠孝 百世標準 大君子知德之評 豈非所藉重而名益顯者歟 噫盡之矣 功告訖 責一言識其後 辭之甚妄也 不辭亦無義 然平昔景仰之心 不後於人 故面發赤以副其請 聞韶金獻周謹識
청휘당(晴暉堂) 이선생이 돌아가신 지 또 삼백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다. 도덕의 심오함은 이미 민멸하여 전하지 않고, 문장의 현저함은 가려져 내려오지 않으며, 충효의 표상은 모두 막히어 빛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혹시, 이른바 천도라는 것이 이러한 것인가?
후손 한의(漢儀)가 예전에 선배들이 서술한 글과 창수, 강도한 기사 중 징험하여 믿을 만한 것을 수습하고, 다시 창의 전후의 문자를 채록한 후, 행장(行狀) 묘갈(墓碣)을 합하여 실기(漢儀) 한 책을 꾸미더니, 장차 간행하여 후세에 전하려 한다. 이제야 선생의 도덕과 문장과 충효가 장차 어두운 세상에 해와 별처럼 빛날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 아니랴?
옛날, 태사공(太史公)은 백이전(伯夷傳)을 서술할 때, 공자의 말씀에서 중대한 것을 인용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한강(寒岡)선생의 기록에 “일찍부터 사우(師友)를 좇아 의리의 학문이 있음을 들었는데, 옛 것을 좋아함과 예를 삼감은 그 본성에서 우러나왔으니 사람들이 아무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고, 오리(梧里) 이문충공(李文忠公)의 제문에는 “공의 도학은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참된 선비요, 공의 충효는 백세에 사라지지 않을 모범이다.”라 하였으니, 크신 군자들의 덕에 대한 평론이 어찌 중대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름을 더욱 빛낸 것이 아니겠는가? 아, 극진하도다!
간역을 마치자 나에게 권말에 한 마디 말을 쓰라고 청하는데, 말하자니 망령됨이 심하고, 말하지 않자니 또한 그럴 의리가 없다. 그러나 평소에 경모하고 흠앙하는 마음은 남에게 뒤지지 않기에 얼굴을 붉히고 그 청에 부응한다. 문소 김헌주는 삼가 지(識)한다.
내용을 요약하면 충효와 도덕이 뛰어났던 청휘당 이선생이 돌아가신지 300년이 되었지만 기록이 미비하여 그분의 덕을 기리기가 어려운데 그분의 후손이 여러 기록을 모아 그분의 실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실기 후기를 적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후기를 적는다는 내용이다. 즉 어느 책의 후기를 적은 글이다. 청휘당은 어떤 사람이고 글을 쓴 김헌주와는 어떤 관계에 있길래 후기를 부탁했을까? 먼저 인터넷에서 청휘당 이승에 대한 자료를 모아봤다.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은 전주이씨로 1552년(명종 7년) 지금은 칠곡군인 인동현(仁同縣) 약목리(若木里)에서 태어나 1598년 사망한 사람인데 주로 성주에서 거주하였다. 공식 기록에 희운(希雲)의 아들로 되었지만 양자로 간 것이고 생부는 사운(思雲)이다. 8세에 소학을 공부하였고 11세에 벌써 논어를 공부할 정도로 뛰어났다. 19세에 퇴계 선생에게 대학을 질의하면서 유숙하였고 20세에 남명 조식을 찾아가 공부하였다. 37세에 서애 유성룡의 추천으로 선공감가감에 천거되어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유성룡에게서 공부하였다. 1589년 여름 한강(?岡) 정구,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 송암(松庵) 김면(金沔), 대암(大庵) 박성(朴惺), 낙빈(洛檳) 이홍우(李弘宇),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등과 함께 개경포(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의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시를 지으며 놀았는데 이 때 일곱 사람을 낙강7현(洛江七賢)이라고 전한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낫게 하고 도둑이 들어와서 칼로 부친을 해치려고 하는 것을 “나를 대신 찌르라”고 사정하니 도둑도 그 효성에 감복하여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부친의 병이 위독하여 밤마다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었으며 친상을 당하여 여묘 생활 3년을 옷도 벗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41세(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기와 군량을 마련하여 용기산성(백운동의 가야산성)에 실어다 바치고, 6월에 김면(金沔)과 더불어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7월에 진군하여 고령(高靈)에 주둔한 왜구를 격파하였고, 8월에 진격하여 금산(金山)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성주(星州)에 있는 왜구를 공격하기도 하였고, 9월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관군과 합세하여 30여 차례의 격전을 벌여 지례 · 안음 · 함양 등지를 수복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1598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부름을 받고 가던 중에 청주 말리에 이르러 과로로 병을 얻어 순직했다. 사망 후, 장원서별검의 벼슬을 증직으로 받았고 1689년 사림의 청에 의해 통훈별제(通訓別提)의 증직(贈職)이 내려졌으며고 신계서원(新溪書院)에 봉향되었다. 오리 이원익이 "도학은 천년 동안 있을까 말까 하는 진정한 유학자요, 충효는 백세의 모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무덤은 수륜면 신파리 봉암산에 있다. 청휘당 실기는 1934년 경북 성주에서 목판본 1책으로 간행되었다.
당대의 유명한 학자로 한강 정구와 친분이 있었고,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할 정도로 충을 실천해서 오리 이원익이 극찬한 인물이라면 실기를 남길 만하고, 실제 1934년 청휘당 실기가 간행되었다. 이런 사람의 실기 후기를 적어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 이분의 실기 후기를 왜 김헌주란 사람에게 부탁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청휘당의 후손은 아마도 계속 성주 인근에 살 것이고 김헌주란 사람은 안동 인근에 거주했다면 당시로 봐서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굳이 김헌주란 사람에게 글을 부탁했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김헌주와 관련된 내용을 검색해봤다.
기암(箕庵) 김헌주(金獻周, 1866~1936)는 안동 귀미(龜尾)에서 태어났다. 문장가로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에게 글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바로는 창원 허정호(許正灝)의 호기(號記), 창원 박성립(朴誠立)의 묘갈(묘碣), 군위 섬계정(剡溪亭)의 기문(記文), 쌍매당(雙梅堂) 이윤(李胤)의 유허비명(遺墟碑銘), 창원 가양재(嘉陽齋) 오상원(吳尙源)의 누각에 기(記) 등 다양한 사람들에 관한 글을 쓴 것으로 되어있다. 글을 받으려는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표현이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의 집안 자체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할아버지인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역시 뛰어난 유학자였다. 척암의 증조부인 귀와(龜窩) 김굉(金土+宏) 역시 뛰어난 문장가로 낙동강 가의 낙암정에 귀와의 글이 붙어있다.
문장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성주에서 영천까지 왔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음직 한데 기암의 할아버지 척암 김대화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척암 김도화는 구한말 의병대장이었다. 안동 일대의 의병대장으로 안동을 일시적이나마 점령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국왕의 명령으로 의병이 해산되자 글로 항일 활동을 했는데 나중에는 대문에 합방대반대지가(合邦大反對之家)라는 글을 붙여놓기도 했다. 기암이 만년에 영천 죽천으로 옮겨 살았다고 했는데 안동 지역의 일경의 탄압이 워낙 심해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조상의 실기 말미에 붙일 후기를 부탁하러 온 청휘당의 후손은 기암의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문서는 임란 의병과 구한말 의병을 이어주는 매개체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안동대 도서관의 청휘당 실기 해제에는 이 글이 없다고 한다. 원고 청탁을 받고 쓴 글이 실리지 않은 것이다. 기암이 이 글을 쓴 후 미처 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고, 전달받은 후손들이 청휘당의 업적을 잘 나타내지 못했다고 판단해서 올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전달이 너무 늦어 실기가 편찬된 뒤에 이 글이 도착했을 수도 있겠다. 청휘당 실기가 편찬된 것이 1934년이고 기암이 사망한 연도가 1936년인데 기암이 이 글을 쓴 직후 병석에 누웠을 수도 있겠다. 글이 실리지 않은 것은 섭섭하지만 좋게 생각하면 내가 구한 이 문서는 지구상에 같은 내용의 문서가 달리 없는 유일본이 되는 것이다.
읽을 수도 없는 사람이 가지고 있을 일이 없을 것 같아, 내가 아는 분 중에 기암과 가장 가까운 분인 김승균 선생님께 문서를 전해드렸다. 소장하지도 않을 문서를 왜 샀느냐고? 낚시하는 사람들이 꼭 매운탕을 끓여먹기 위해 고기를 낚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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