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형제 팔천석 영광 이야기

person 박장영
schedule 송고 : 2009-04-09 10:11

경북 의성군 단밀면 서제리는 서제, 구서당, 기동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동은 구서당 마을의 바로 뒤 고개를 넘어 서쪽 산중에 위치한 벽지마을입니다

지금부터 300여 년 전에 안동에서 김창일이란 사람이 옮겨와서 독가촌에서 온갖 어려움을 참고 산전을 개간하며 생업을 유지하다가 죽었으나 지지리도 가난한 탓에 아들(김태안)은 친상을 당하고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시신 옆에서 슬프게 곡이나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임시로 토령을 차리고 평소와 다름없이 전답에 나가 땀을 흘려 일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엔가 길지를 찾아 부친을 편히 모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석양나절에 집 앞의 텃밭에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노승이 다가와서 쓰러졌습니다. 그는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노승에게 다가가서 무슨 곡절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노승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배가 고파 죽겠소이다." 하고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는 급히 노승을 집으로 옮겨 눕히고 시장기를 달래면서 편히 쉬도록 하였습니다. 단칸방이라 부인은 부엌에서 밤을 세워야하는 고충을 겪으면서도 몇 날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지낸지 어느 날 아침에 노승은 크게 감사하고 "자선을 베푼 이 댁에 반드시 경사가 올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주인장 소원은 무엇이요?"하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이직도 터를 잡지 못했으니 이에 더한 고충이 어디 있겠습니까?"고 답했습니다.

이에 며칠간 더 머물면서 먼 눈길로 좌우산천을 살피던 노승은 벼슬을 바라는지? 제물을 바라는지를 묻자 주인은 "워낙 어려우니 과분한 것은 바랄 수 없고 조반석죽이나 잇게 하여주시면 더 바랄 여지가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노승은 주인의 간절한 눈빛을 헤아려 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나서라고 했습니다. 노승은 집 맞은 편 북쪽 산자락 나직한 곳인 산맥이 다한 자리에 와서 걸음을 멈춘 다음, 좌향을 자세히 가르쳐 주고 표적을 한 뒤 장삿날과 하관 시간까지 일러주고 홀연히 떠났습니다. 주인은 아버지의 만년유택이 결정되니 마음에 흡족하고 만가지 시름을 한꺼번에 놓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리가 가까우니 어려운 형편에 더할 수 없는 다행이었습니다. 토령을 헐어서 노승이 일러 준대로 장사를 치렀습니다.

이렇게 장사를 치르고 난 뒤 어느 날 백립(白笠)을 산더미같이 지고 집을 찾아와서 하룻밤을 쉬고서 다음날 떠나면서 지고 온 백립은 가져갈 형편이 못되니 맡기고 가겠다고 해서 승낙하고 그 백립은 헛간에 옮겨다가 잘 갈무리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 백립을 찾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국상이 났다고 소문이 나고, 마을마다 방방곡곡 갓을 벗고 백립을 갖추어 쓰니 백립 값이 다락같이 올랐습니다. 주인은 고심을 하다가 백립을 팔기로 마음먹고 4km 거리 안계장을 찾아 백립을 지고 나서면 중도에 빼앗기듯 다 팔리고 말았습니다. 값도 부르는 대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전답을 사고, 또 백립을 지고 나와서 파고 전답을 사고 몇 차례나 되풀이 하여 일조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부자가 된 주인은 그 백립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지런히 일만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어느 날 등 넘어 사래가 긴 밭을 갈고 있노라니까 쟁깃날이 커다란 돌 위를 끌면서 떨거럭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자 소를 멈추고 살펴보았습니다. 흙을 파고 구들장을 들고 보던 주인은 구들장을 되 덮고 다시 묻었습니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농사일에만 몰두하던 주인은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가서 이상한 말이 들려와서 크나큰 수수께끼를 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인의 선대가 안동에서 이곳으로 오기 전에 창말랭이(단밀면 주선리 창상)를 거점으로 한 도적떼가 사방으로 재산을 털어 모우다가 일망타진 되어서 참형이 되었는데 그 도적들이 바로 자기 집 방면 어느 곳에 묻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비로소 그 밭에 숨겨진 돈의 정체를 깨닫고 안심하고 이 돈을 거두어 백배를 더하는 부호가 되었으며 거쳐도 산 넘어 구서당으로 옮겼습니다. 이 주인은 8명의 아들을 두었고, 팔천석을 했다고 해서 팔형제 팔천석 영광이란 전설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축복받고 살던 안동김씨가문에도 영고성쇠는 피할 수 없듯이 조선조 말엽에 오사는 가운은 크게 기울어졌습니다. 마을 앞에까지 들이닥쳐 굽이쳐 흐르던 위천이 차차 멀리 북으로 흐름을 바꾸어 지나가니 쇠운은 걷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 이 이야기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 박장영님은 현재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서 학예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뷰/기고"의 다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