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오는 날 팥죽 먹으러 꼭 오렴

person 김희철기자
schedule 송고 : 2007-07-19 09:22
5.18광주 항쟁 당시 가두방송을 했던 한 분을 만나다.

태풍 오는 날 팥죽 먹으러 꼭 오렴
5.18광주 항쟁 당시 가두방송을 했던 한 분을 만나다.
 

(당사자의 허락을 얻지 않아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어제 안동초등학교 앞을 우연히 지나다 낯익은 얼굴이 있어 차를 세웠습니다.

다소 놀란 표정으로 차에 오른 그분의 양손에는 무거운 장바구니와 함께 빨간 애기국화 다발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앞 거리에서 십여 년 째 꽃을 팔고 있는 한 노점 아주머니에게서 받았다며 연신 향기를 맡아봅니다. “평소 알고지내는 사인데 어떤 사람들이 노점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데 어떡하니” 하며 걱정이 태산입니다. 하지만 도무지 말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내 접수되지 못한 까닭에 한마디 대꾸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차를 세우는 순간부터 한동안 저의 뇌리를 지배한 것들로 인해 출발하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으니까요.

우리는 그녀를 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막바지인 27일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으로 진입하려던 순간, 적막한 광주거리를 홍보차량을 타고 애절한 목소리로 방송했던 분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지치고 힘들지만 무고하게 죽임을 당해야 했던 많은 시민과 평범한 형제들을 대신하듯 마지막 힘까지 다했던 그 목소리가 여러 차례 방송을 통해 우리들 귓가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정부의 발포명령으로 인해 2천여 명의 사상자와 실종자를 낳았던 비극의 역사적 순간에 온몸으로 저항했던 분. 그동안 알고 있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작은 궁금증으로 너무도 엄청난 죽음의 상황을 다시 떠올리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제는 반가운 마음에 실수할 뻔 했습니다.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 실존인물로 당시 방송했던 한 분이 배우 이요원 씨가 맡아 나온다는데 감회가 어떠신지, 과연 영화를 볼 수 있을지, 영화를 본다면 누구와 볼 건지 등등, 하지만 이 또한 물어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짧은 고민 끝에 그냥 물어보지 않기로 했죠. 이 분이 살아온 감쪽같은 인생을 조금이나마 들어서 아는 소치일까요.

참 아이러니 하게도 경상도 남자와 결혼해서 너무나 평범한 가정의 아내이자 자녀들에게는 맘 약한 엄마로 지금까지 안동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으니 이를 어찌 봐야 할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광주를 무참히 짓밟고 지역감정을 이용해 권좌에 오른 전두환 전 대통령의 그 경상도가 아니던가요. 정말 본인이 언젠가 말했듯 전두환과 하수인, 정치인들이 밉지만 단지 그들에 의해 조성된 지역감정에 왜 휘둘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경상도 사람을 사랑한다던 그 말.

경상도라면 치가 떨렸을 텐데 이 또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극의 정점에는 통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떠한 큰 사랑이라는 게 있겠거니 하고 맙니다. 그분도 자칫 영화 얘기라도 나올라 싶어 차에서 내릴 때 까지 끊임없이 다른 소재들을 내놓습니다.  

태풍 오는 날 팥죽을 마련해 놓을 테니 오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비 오는 날 술 마시는 건 우리에게 익숙한데 하필 궂은 날, 태풍 오는 날에 술도 아닌 난데없는 팥죽을 먹으러 오라는 건지.. 하지만 내리는데 바빠 몇 번이고 “태풍 오는 날 꼭 오라, 뜨끈한 팥죽 한 그릇 하고 가라”고 당부하고는 내리셨죠. 밋밋한 저의 감성과 굳은 머리로는 이 또한 너무도 힘겨운 과제랍니다.

‘태풍’은 그 엄청난 에너지로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죠. 더러운 공기와 이 땅의 썩은 것들, 대선을 앞두고 다시 고개 들고 있는 지역감정, 권력과 부정부패, 나라를 들어먹은 과거의 잔재들 다 쓸어가 버리죠. 그래서 태풍이 지나간 하늘은 유난히 맑고 파란가 봅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팥죽은 뭔가요. ‘팥죽’, 동짓날 팥죽은 민족이 고래로 잡귀를 쫓아내고 신성한 한해를 맞이하는 의미로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는데 그런 뜻입니까. 그럼 태풍 오는 날 팥죽은 찬란한 내일을 예견하고 새날을 맞이하는 한판 잔치라도 하자는 건가요. 태풍이 지나간 찬란한 내일, 저의 어릴 적 꾸었던 꿈이기도 합니다.  

이육사 선생은 ‘광야’에서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했습니다. 천고의 고통과 역경을 지나 백마를 탄 초인이 반드시 오는데 그 때 우리한번 목 놓아 부르자고 했습니다. 닭 우는 소리조차 없던 까마득한 날에 누구도 예견하지 못하던 해방을 육사선생은 확신을 하고 계셨죠. 결국 해방되기 얼마 전 북경의 싸늘한 감옥에서 숨지면서 남긴 시인의 한 구절을 보면서 저는 너무나 놀라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바람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일까요. 간절한 사람의 눈에는 미래가 보인다는데 그런가봅니다. 오는 20일부터 육사선생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니 의미있는 시간이라 여겨지는군요. 오늘의 이 과제도 깊게는 모르지만 초인을 기다리는 그런 심정이 아닌가 짐작할 뿐입니다.   

어릴 적 태풍예보를 듣고는 ‘에라 이것저것 더러운 것, 이놈 저놈 나쁜 놈들 모두다 쓸어가 버려라’ 생각했던 적이 기억납니다. 좋습니다. 찬란한 내일을 열어줄 초인을 맞이할 잔치라는데 빠질 수 없지요.

광주는 응고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살아있는 27년 전 역사라 생각 합니다. 저는 열다섯 소년 시절에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가 “전라도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나 폭도 두 명이 사망했다”고만 전하는 짤막한 멘트가 생생합니다. 어떤 언론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이라 이름하지 않았고 국민을 지켜야할 군인 2만명이 광주에 내려가 여자, 아이 할것없이 학살했다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당시 사회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문 걸어 잠그고 방안에서 총칼로 형제를 도륙해야 하는 일이 왜 일어나야 했을까요. 저는 사실을 알고 치를 떨었었는데 현장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분들의 마음이야 어떻겠습니까.

촌에서 함께 자란 한 친구는 과거에 들었던 왜곡된 방송 이상을 알지 못합니다. 얘기를 해도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방송이나 컴퓨터에 들어가면 다 알 수 있는 사실을 도무지 알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세대들이 막걸리 얻어먹고 민정당 찍었듯이 그 친구는 신한국당을 찍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와 지금도 친합니다. 답답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앞을 보고 걸어갑니다. 그런데 같은 두 눈을 뜨고도 스스로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어찌 설명 할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초인이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태풍 오는 날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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