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이 안동에 내린 선물
1. 복주목이었던 안동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킨 것입니다.
안동이란 지명은 고려 초기 930년에 왕건이 처음으로 내려준 바 있으나 몇차례 다른 이름과 교체되고 회복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민왕 몽진 후에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킴으로써 오늘날까지 안동이라는 지명을 확고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공민왕이 피난 와서 안동 고을에 머무를 때 봉환(당시 안동목사 김봉환. 김굉필의 5대조)이 힘을 다하여 대접하였다. 이 일로써 주를 승격시켜 대도호부로 하였으며, 임금이 환도하여 교서를 내려 표창하였다." 고 적고 있습니다.
『금방기』에 따르면, 공민왕은 안동대도호부에 대하여 세금을 면제해 주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단순히 읍호만 대도호부로 승격하는데 그치지 않고, 부민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었다는 것은 안동부민들에 대한 공민왕의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줍니다.
2. 공민왕은 안동부와 안기역리에게 여러 점의 복식류와 식기류를 하사.
안동이 나를 중흥시켰다(此安東我重興)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물품의 하사가 형식적이거나 관례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마움의 표현이었습니다.
3. 영호루 현판과 안동웅부 현판 글씨를 하사했습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목은 이색이 쓴 영호루 찬서에 "병오년(1366) 겨울에 임금이 서연에서 영호루 석자를 큰 글씨로 써서, 정순대부상호군 김홍경에게 명하여 왕지(王旨)를 전달하고 봉익대부 판전교시사 권사복을 불러 들여 면전에서 글씨를 주었다. 그 때 안동도호부의 판관 조봉랑 신자전은 아전들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누의 제도가 박루(朴陋)하여서 임금이 하사할 현액을 빛나게 할 수 없음을 두려워한다고 하고, 이에 기일을 정하여 더 넓히고 더욱 물에 가깝게 하니, 그 규모가 더욱 크고 시원하였다. 권사복이 그 까닭을 내게 말하고 또 기(記)를 청하였다." 하였습니다.
4. 손홍량에게 구절산호용장(九節珊瑚龍杖)을 하사
손홍량은 1287년(충렬왕 13)에 안동 일직에서 출생하여 여섯 임금(충렬, 충성, 충숙, 충혜, 충목, 충정왕)을 섬기면서 벼슬이 판삼사사에 이르렀고 복주부원군에 봉해 졌습니다. 40여 년의 벼슬길에서 나라의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충정왕 3년에 65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복주로 몽진 오는 공민왕을 중도에서 평복으로 맞이하니 왕이 그의 충의에 감탄하여 "충정이 하나같이 곧은 사람이 늙을 수록 나라 위한 마음이 독실하도다" 라는 시를 내렸습니다. 손홍량이 당시 난국 수습책을 진언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364년 78세 나이로 홍건적 난 평정에 대한 하례를 하러 왈실에 갔을 때 왕은 구절산호용장을 내리며 경의 두 아들도 나를 섬기도록 하라고 당부했으며 사후에 정평(靖平)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5. 봉정사의 진여문 현판하사 및 극락전 중수
진여문 현판 왼쪽에 "고려공왕보묵 광서 8년 4월 6일 개채"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1625년에 중수한 봉정사 극락전 사량문을 보면 그 이전 중수일이 "지정23년 계묘 3월" 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공민왕이 안동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그 이듬해 봄입니다. 진여문이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극락전 중수는 공민왕이 몽진 시 안동사람들의 환대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6.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현판하사
무량수전은 공민왕 7년에 불타 버려 우왕 2년(1376)에 재건하였습니다. 무량수전 현판 뒷면에 공민왕 친필임을 알리는 묵서가 있는 점으로 보아 재건을 준비하는 과정에 공민왕이 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 이 이야기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 박장영님은 현재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서 학예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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