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탑리 고분군
일직면 조탑리(남안동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지방도로를 달리면 왼편에 보이는 마을) 뒷산에 고분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2월 마지막 주 유산(遊山)은 고분군 탐사로 정했다. 회장님, 사진작가인 강작가, 나 이렇게 세 사람만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회장님의 친구분이 안동에 내려온 김에 동참했다. 등단 수필가이면서 시도 쓰는 분이다. 네 사람 모두 초행이라 권정생 선생님 살던 집 바로 뒤의 동산에 고분군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멀리서부터 탐색을 하며 접근하느라 본의아니게 산행을 겸하게 되었다.
안동에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탓으로 고인돌이 지천에 늘렸고 고분들도 여러 곳에 있다. 일직면에만 해도 조탑리 고분군과 평팔리 고분군이 있다. 조탑리 고분군은 1960년대와 1990년대 두 차례 발굴이 이루어졌다. 현장에서 보인 고분들 중 파헤쳐져 봉분 위가 열린 고분들이 보여서 도굴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발굴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발굴의 흔적이라면 발굴 후에 너무 무심하게 방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동역사 바로보기'를 참고하면 미천의 중류 지역에 분포하는 조탑리 고분군의 고분 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다. 비교적 큰 봉토를 가지는 수혈식 석곽묘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을 뒤의 비봉산 지맥 능선상에 있는 고분들 중 발굴한 고분의 구조는 동서 21미터, 남북 10미터, 높이 3.5~5미터 정도의 대형 봉토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바닥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시신을 안치한 것으로 보이는데 동쪽 석실에 6구, 서쪽 석실에 5구의 유해가 있었다고 한다. 책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매장된 것으로 본다고 되어있는데 혹시 순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대가야 고분에서 순장이 확인되었고 비슷한 시기의 고분인 경산의 고분에서도 순장이 있었다는 글을 읽은 것 같기도 하다. 출토된 유물은 금제 귀고리, 금동 귀고리, 금, 은, 철 등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들이 다량 나왔고 장신구의 형태와 무덤의 형식으로 보아서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를 전후한 시기까지 유행한 가야식 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1991년에서 1995년까지 중앙고속도로 건설 구간내 유적 발국조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조사되었는데 조사된 고분이 모두 100여기가 넘었다고 한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까지 만들어진 고분에서는 토착적 성격이 강한 토기와 경주식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6세기 후반부터 안동식 토기가 경주식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는데 상대적 독립을 누리다가 점차 경주의 중앙 권력에 편입된 모양이다. 남서 해안에서 나는 두드럭 고동이 만히 출토된 것으로 봐서 낙동강을 통해 해안지방과 활발한 교역을 한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처음 가야 영향권이었는데 후에 신라에 병합된 것은 아닐까 짐작된다. 그렇다면 이 지역이 진한 12국 중 한 곳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재고해봐야 할 일이다.
안동 지역의 고분군과 고인돌을 찾아다니는 일들이 조금씩 잦아질 것 같은 생각이다.
일행(오른쪽은 이요 유산회 회장님, 가운데는 회장님 치눅로 등단 수필가, 동행한 사진작가가 찍어준 사진)
고분인 것 같은데 확신이 서지 않는다.
고분임이 거의 확실하다.
고분(가운데가 파인 것이 도굴된 것이거나 발굴 후 방치된 모양이다.)
고분?
주변에서 잠시 수습한 그릇 파편들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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