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월재(松月齋) 이시선(李時善)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9-03-04 09:16

일생동안 벼슬을 탐하지 않고 오로지 산림의 은사(隱士)로서 학문탐구에만 전념하다 일생을 마친 송월재(松月齋) 이시선(李時善)은 봉화가 낳은 대표적인 유현(儒賢)중의 한사람이다. 이시선은 1625년(인조31년)에 출생하여 1725년(숙종41년)에 운명할 때 까지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의 4대에 걸쳐 활약한 진일(眞逸)의 선비였다.

 >> 송월재(松月齋),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 명동마을에 있다. ⓒ유교넷

본관이 전주이고 자가 자수(子修)인 이시선은 태종의 제3왕자(문집에는 제7왕자로 돼있다) 온녕군(溫寧君) 정(程)의 후손이어서 말하자면 왕족의 후예였다. 이시선의 가문이 봉화로 이거한 것은 온녕군(溫寧君) 정(程)의 7대손이면 이시선의 아버지인 추만(秋巒) 이영기(李英基) 때의 일이다. 입향조인 이영기 또한 뛰어난 기절(氣節)과 우국지사로 이름 높았다.

원래 이영기 가문은 한양에 뿌리를 둔 사족이었으나 임진란 직후 지금의 봉화군 유곡(酉谷: 닭실) 으로 이거하게 됐다. 그가 봉화로 이거하게 된 사유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남인과 북인 대북과 소북이 난마처럼 얽혀 벌이던 당쟁의 와중에서 희생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즉, 그의 문집을 보면 소북의 영주로서 한때 실권을 장악했던 유영경(柳永慶)과 지봉(芝峯) 이수광(李粹光)이 그의 탁월한 인품에 끌려 그에게 관직에 오를 것을 누차 권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취임하지 않은 사실이 기록 돼있다.

또 그는 아들 5형제에게 과거공부는 남아(男兒)가 마땅히 해야 할 바가 못 되니 과거를 위한 공부는 그만두도록 가르쳤다고한다. 그는 후일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봉화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스스로 참모장이 될 만큼 뛰어난 우국지사이기도 했다.
오늘날 전주 이씨들의 집성촌인 봉화군 법전면(法田面) 풍정리(楓井里)는 바로 그가 처음 터를 잡고 개척한 곳이거니와 그는 이곳에 오기 전 유곡에 잠시 우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유곡에서 기묘사화의 명현으로 꼽히는 충재(충齋) 권벌(權벌)의 중손녀와 이 무렵 혼인하게 됐다. 또 후일 이영기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손녀를 둘째 자부로 맞게 됐고 넷째(이시선) 자부 또한 상주의 대유(大儒)인 월간(月澗) 이전(李전)의 손녀를 맞아들였다. 이것을 보면 이영기가 고향인 한양을 버리고, 산 설고 물선 타지에서 일가독립 했을지라도 영남북부지방의 토착 사대부가문에 뒤지지 않는 가문출신임을 알 수 있다.

 >> 사덕정(俟德亭), 문화재자료 제249호,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 671-2 ⓒ유교넷
그가 터를 잡고 개척한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에는 그가 자제와 후진의 강학을 위한 서원으로 지은 사덕정(俟德亭)이 지금도 남아있다.

송월재 이시선은 바로 이 입향조 이영기의 5남중 제 4남으로 풍정리의 백운봉이 올려다 보이는 시듬물에서 태어났다. 이시선은 일생에 한번도 관직에 오른 일이 없었다. 그도 당초에는 입신양명을 꿈꾸고 과거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훈도대로 잘해야 공과반반(功過半半)이요, 진흙 수렁에서의 명리다툼을 숙명으로 하는 벼슬길은 장부가 취할 길이 못된다고 하여 일찌감치 과거를 단념했다. 관직이 있어야 행세하던 당시 사회에서 관직에 전혀 오른 일이 없는 그의 청명(淸名)이 후대에까지 길이 전해진 것은 그의 독특하고 탁월한 학문과 걸출한 효도와 우애 있는 행실이 당대 사림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시선의 생애에서 유년시절이나 성장 과정을 전해주는 글은 별로 없다. 그러나 정조 때 왕명으로 채홍원(蔡弘遠) 등이 편집 간행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에는 이시선이 사방에 주유(周遊)하기를 즐겨서 속리산 금강산 지리산을 비롯한 명산대천(名山大川)과 평양, 경주, 개성 등 옛 영웅들이 활약했던 통읍도회(通邑都會)의 사적지에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그가 나약한 유생이 아니라 호연(浩然)한 기질을 갖춘 선비였음을 짐작케한다.

 >>송월재선생문집(松月齋先生文集), 시문집으로 6권 3책의 목판본이다. ⓒ유교넷



 

 

 

 

 

 

 

 


전국을 두루 탐방하고 돌아온 이시선은 향리의 숲속에 서재를 짓고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한 채 독서와 학문탐구에 전념했다. 그가 이 서재의 당호로 지은 송월재(松月齋)는 그대로 그의 호가 됐다. 남달리 검박하고 근면 했던 그는 송월재에다 사면에 서가를 두르고 책상하나만을 들여 놓은 채 독서에 몰두했는데 잠은 언제나 한식경(一更)만 잤고 음식은 흰죽으로 조석으로 두끼만 먹었다. 이시선은 이때의 자신의 생활을 이렇게 시로 읊었다.

 청산은 예닐곱 길
 인가는 두세채
 그가운데 한선비있어
 평생토록 글짓고 또 지우네
 
한겨울이 되어도 화롯불을 쬐지 않았고 무더위가 닥쳐도 부채질을 하지 않아다는 그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을 이루었으나 그 방법과 내용이 독실하고 치밀해서 한 치의 흐트러짐이나 잡스러움이 없었다. 그의 독서방법을 보면 언제나 먼저 외부에서 일어나는 잡된 욕망을 끊고 안으로 정신을 집중시킨 다음 독서에 들어갔다. 그는 난해한 서적을 대하면 한번 읽을 때 마다 빈 바가지에 팥알을 던져 넣어 바가지에 팥이 가득 차도록 거듭해서 책을 읽곤 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이시선은 학문을 하되 육경(六經), 사서(四書)와 성리학을 최우선을 하고 한편으로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를 섭렵하여 학문의 영역을 넓혔다. 또 당시 외면 받던 노장(老壯), 제자백과(諸子百科)의 학문을 통달하여 일가견을 이루었다. 그는 또한 병서와 지리서적도 버리지 않았고 심지어 복서(卜筮)에도 정통하였다.

영남인물고의 저자는 그의 학문은 정밀하게 드러나서 새롭고 기이해서 숨어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내서 한구절도 티끌과 좀의 흔적이 없었다고 평하였다. 고금의 서적과 학문에 두루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그는 또한 남달리 활발한 저작활동을 보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알려진 저술로는 사략보(史略補), 역대사선(歷代史選), 칠원구의(漆園口義), 서전참평(書傳參評), 시전남과(詩傳濫課), 전의병지(傳義騈枝)와 손수 편집한 자신의 문집 (하화편荷華編)이 있다.

그중에서 중국에서도 특출한 것으로는 중국의 역사를 상고시대부터 명나라까지 서술한 역대사선이다. 모두 70권으로 서술한 이 역대사선은 정작 본고장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드물 정도로 규모면에서 대작으로 꼽힌다. 그는 이것을 다시 35권으로 축약하기도 했다. 역대사선과 함께 또 특출한 것은 난해하기 그지없는 주역을 한글로 옮긴 주역언해본(周易諺解本)이다. 이 주역언해본은 최근까지도 전해왔으나 관리부실로 없어졌다.

평생에 명리다툼을 멀리한 그는 성품 또한 고고하여 사귀는 벗은 언제나 일시의 명류(名流)두어 사람뿐이었다.

그는 늘 제자들에게 선비의 지킬 바는 “불괴심(不愧心, 부끄럽지 않는 마음이라는 뜻)” 석자에 있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그의 평생신조이자 위학정신(爲學精神)이기도 했다 .그의 고결한 인품과 학덕은 영남사림에 널리 알려져서 그는 83세에 호군(護軍)이란 관직을 제수받기도 했다.

그는 남달리 건강하여 91세라는 수복을 누렸는데 90세에도 피부가 더욱 살찌고 정신은 더욱 맑았다고 한다. 그는 운명하던 날 자제들에게 몸가짐을 삼가고 벗 사귀는 일을 살펴서하고 혼인은 제 때에 하라고 가르친 다음 중용수장(中庸首章)과 주역(周易)의 건괘(乾卦) 조용히 외우면서 운명했다. 그의 사후 묘갈명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이 행장은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이 지었고 행장은 성호(星湖) 이익(李翼)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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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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