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報恩)의 주막(酒幕) 이야기

person 박장영
schedule 송고 : 2009-02-12 10:26

구미시(龜尾市)와 의성군 단밀면의 경계를 이루는 열재(十嶺)라는 고개 중턱에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있었으니 오랜 세월의 흐름을 말하는 듯 벽은 바람에 군데 군데 허물고 문짝은 부서져서 형태만 겨우 남았고 마루 바닥엔 연륜이 깊이 새겨진 빈 집이 있었습니다.
조선 말기 동학란(東學亂)이 한창일 무렵 우리 사회는 지극히 불안하였습니다. 도처에 민란이 일어나니 관군은 이를 토벌하러 나섰고 그 틈을 타서 도적떼들이 우글거려 외진 산길을 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곳 열재도 산적이 자주 출몰하여 한 두 사람이 재를 넘는 것은 위험하고 열사람 이상이 떼를 지어서 넘어야 안전하다는 데서 열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때는 마침 보리고개라는 3월이었으며 가뭄이 들어서 보리농사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에 60을 넘은 노인이 9살 쯤 되는 어린 소년의 팔목을 잡고 의성쪽으로 넘고 있었습니다. 이 날 노인은 긴요한 일이 있어서 황소 한 마리를 팔아 돈을 마련해 집으로 돌아가는 참이었습니다.

산림이 울창한 산중에서 바람소리인지 사람의 아우성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기에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는데 분명히 사람 소리였습니다. 어린 손자도 이 소리를 들었는지라 바쁜 산길이라 그냥 지나쳐 버리려 하였으나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의 손을 끌고 사람이 다투는 소리 나는 곳을 찾아 가까이 가 보았습니다.

기상천외의 싸움판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한 젊은 부인이 아기를 업고 있는데 상투한 한 남자는 아기를 잡아먹으려고 발버둥이었습니다. 아기의 손을 잡고 당기니 여자는 넘어지고 엎어지며 허둥지둥 달아나니 아기는 자지러지게 울어댔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기진맥진하여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할아버지께서, "여보시오! 여보시오! 이 무슨 까닭이요?" 하고 곡절이나 알아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인기척에 놀란 사나이는 그만 그 자리에서 늘어져 누워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한 숨을 돌리고 말없이 있다가 노인에게 이르기를 눈물을 흘리면서 양식이 없어 굶주린 지 몇 날이 지난 끝에 남편이 배가 고파 눈이 뒤집혀서 아이를 고기로 잘못 알아서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싸 가지고 가는 떡을 주자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즉시 떡을 나눠 주었으나 손자의 말이 기특하고 배고픈 이를 완전히 구해 내야만 하겠다는 뜻이 고마워 조금 남겨 두고 주려던 떡을 전부 다 주고야 말았습니다. 그들은 미친 사람 모양으로 떡을 받아먹고는 생기를 되찾는 듯했습니다.

남자는 그래도 아무런 말이 없으나 여자는 정신을 가다듬어서 다시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가난하여서 굶주리기만 하다가 의성쪽으로 친지를 찾아서 구원을 청하러 떠나는 길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갈 길을 재촉하려는데 손자가 격려의 말과 동정의 뜻이 담긴 할아버지의 말에 크게 느낌이 있었던지 큰 소리로 "할아버지 소를 판돈을 이 사람들에게 줍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손자의 제의에 할아버지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꼭 필요해서 소를 팔아 장만한 돈인데 주어버린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생각한 할아버지는 죽어가는 일가족을 구해 내는 것은 자기 계획의 차질과는 비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이 얼마 되지 않는 돈이나마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재생의 길을 찾도록 하시오"하며 돈을 전부 내주었습니다.

길을 떠나는 조손(祖孫)앞에 엎드린 남녀는 이렇게 고마울 도리가 있겠느냐, 어디에 사는 누구신지 성명이라도 알고 싶다고 애원하였으나 "그다지 이름을 내어 놓을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대답하고는 그냥 떠나버렸습니다.

이 노인의 성은 조씨(趙氏)로서 이 고장에서 이름 있는 부자였으며 널리 혜택을 베풀어 왔던 분이었습니다. 흐르는 세월은 주마등같아서 20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당시의 노인은 저 세상으로 떠났고 9살 나던 어린이도 이제는 30대의 청년으로 변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조씨가(趙氏家)도 그 많던 살림이 기울어서 생계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화려하던 가업을 되뇌이고 다시금 잘 살 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가다듬어 지내던 나날이었습니다.

한편 열재에서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하여 집으로 돌아간 부부는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부지런히 일하고 착실한 생활을 영위해 갔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대로 그들은 20년 만에 재물을 크게 모으고 자기 고장에서 노부자(魯富者)라면 다 알게 되었습니다. 이 노씨 부부는 어느덧 흰 머리가 잡혀가니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지난날 열재에게 구원 받았던 그 은인을 찾아낼까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는 날 부인으로부터 한 가지 계책이 제시되었습니다. "지난 날 구원을 받았던 그 십령에 가서 주막을 마련하고 내왕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어 보면 무슨 수가 나지 않겠나."하였습니다. 남편도 수긍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열재에 가서 아담한 주막을 마련하고 술을 파는 것이 아니라 쉬어가게 하고 술은 무료로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는 지난 날 자기가 이 자리에서 구원 받았던 일의 자초지종을 오는 사람마다 이야기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데리고 이야기 한 지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나가 몇 번을 거듭해도 찾는 은인은 나타나지를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였습니다. 이러다가 영영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쩔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였습니다.

긴긴 봄철도 지나고 초여름 어느 날 서산에 해는 넘어가는데 텁수룩한 나그네가 지나가는데 바쁘게 지나가는 나그네의 차림은 궁색했으나 기품은 의연하게 보였습니다. 들어 와서 좀 쉬어 가기를 청하는 부인의 말에 "말씀은 고마우나 해는 지는데 갈 길이 바쁘다"하고서 그냥 가려고 하였습니다. 재삼 간청에 "돈이 없으니 술을 먹을 형편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다시 간청하는 부인의 말에 나그네는 발길을 돌려서 주막에 들러 쉬어 가기로 했습니다. 후히 대접하고서 어느 손님에게나 마찬가지로 지난날의 이야기를 또 다시 되뇌이었습니다.

물끄러미 듣고 있던 나그네는 눈을 감고 한참 있다가 지난 날 20년 전에 9살 때의 기억을 더듬어서 소상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바로 찾기를 기다리던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그 은인을 찾고야 마는 순간이었습니다. 초로의 부인은 와락 젊은이를 껴안았습니다. 지난 날 죽음의 지경에서 구출하여준 은혜를 잊지 못하여 자기를 찾아서 이 곳에 주막을 차리게 된 동기까지 이야기를 전부 다 들려주었습니다. 조씨도 지난 날 화려하던 가세가 기울고 어렵게 살아나가는 지금의 실정에 이르기까지 소상한 이야기가 계속되었습니다. 주막집 내외는 의논을 하고 조씨를 다시 크게 도와서 보답의 기회를 찾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선산의 노씨(魯氏)와 의성의 조씨(趙氏)는 친형제와 다름없는 사이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열재에는 길이 막히고 숲이 우거져 지금 주막은 흔적만이 남았지만 지난날의 미담가화(美談佳話)는 아직도 전해 내려와서 주민들에게 착한 마음씨를 기르는 계기가 되어 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 박장영님은 현재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서 학예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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