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요 유산회(二樂 游山會)
1. 이요 유산회
안동에 결성된 지 약 1년이 되는 산악회가 있다. 이요 산악회란 이름을 가졌던 산악회다. 말이 산악회지 회원 4명에 안동 인근의 산을 다니는 작은 모임이다. 봄에는 산나물을 캐러 다니는 산채회에 가까운 모임이기도 하다. 지난해부터 이 산악회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몇 차례 받았지만 산을 오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무릎이 산행을 허락할 정도도 아니어서 건성으로 받아넘기고 있었다. 해가 바뀌어 내 한문 선생님이기도 한 이 회의 회장님의 권유를 받고 가끔 산에나 따라갈까 하고 가입하기로 했다.
2월 첫 일요일, 가입 기념 첫 산행은 전날 연락되어 급조된 산행이었다. 아침에 모이니 나를 포함하여 세 사람. 목적지도 높은 산을 오르기 힘든 나를 고려하여 안동시 도산면의 건지산으로 결정되었다. 건지산은 퇴계 오솔길이 있는 산으로 야산 수준의 나지막한 산이다. 퇴계 오솔길을 따라가다 무작정 능선을 타고 오르는 조금은 무식해 보이는, 그러면서도 그리 무리가 되지 않는 초보자를 배려한 산행이었다.
산행 중에 문제를 제기했다. 산악회라 하기에는 모임의 규모도 그렇지만 안동 인근의 산들만 골라서 다니는 모임의 이름으로는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되어서다. 산행회로 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내가 유산회로 밀어붙였다. 이런 수준의 산행이라면 안동 옛 선비들의 표현인 유산이 적절하다고. 회장님은 선뜻 유산회로의 명칭 변경에 동의해 주셨고 당일로 이요 유산회로 명칭 변경이 이루어졌다. 이요(二樂)란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약자이고, 또 요산요수는 논어의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의 준말이다. 그리고 유산회의 회장님이신 선생님의 종가가 있는 내앞 마을 앞의 백운정에 퇴계 선생이 써준 이요문(二樂門)이라는 현판이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이날로 나는 이요 유산회의 회원이 되어 산행을 따라갔다.
코스는 퇴계 오솔길을 따라가다 건지산 능성을 바로 치고 올라가 학소대를 거쳐 가송리에 옮겨있는 농암 종가를 보고 강변의 퇴계 오솔길을 따라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오는 여정이었다. 퇴계 오솔길의 일부 구간은 안동시와 토지 소유자간에 합의가 되지 않아 막힌 구간이 있었다. 새 길을 만든 것 같은데 우리는 강변을 따라 내려오다 마지막에 다시 야산 능선을 타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길을 두고 왜 이런 능선을 올라갈까? 화두를 붙들고.
2. 잊혀진 고관(高官)의 묘
산길을 찾아가며 내려오다 어떤 무덤을 발견했다. 묘비의 하단이 흙에 묻혀 끝까지 읽을 수는 없었지만 ‘행통정대부심공지묘(行通政大夫沈公之墓)가 분명했다. 통정대부라면 정3품 당상관으로 꽤 고위직이다. 도승지, 대사간, 성균관대사성도 모두 통정대부급이었다. 요즘말로 하면 대통령 비서실장, 감사원장, 서울대학교 총장에 해당하는 직급이다. (통정대부 앞에 ‘행(行)’자가 붙어있는데 ‘행’이라면 실제 직급보다 낮은 직책에 임명될 때 붙이는 것이라고 어느 분이 댓글에서 지적해 주셨다. 그리고 '행'자를 붙이려면 직급과 직책 모두를 적어야 하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직급 뒤 직책 앞에) 직급 명칭인 통정대부만 적혀 있는 것도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해주셨다. ) 통정대부라면 웬만한 가문에선 파조(派祖) 정도는 되고 문중의 불천위가 될 정도는 될 터인데 봉분이 거의 내려앉았고 비석도 흙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보니 잊혀졌거나 버려진 무덤일 가능성이 많아보였다. 호사가의 호기심이 발동한다. 선생님도 관심을 보이면서 비석 뒤의 비문을 읽으신다. 같이 간 사진작가인 회원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글씨가 잘 나오도록 찍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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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 |
무덤 주인공의 이름은 심세남(沈世男)이었고 향년 七十?라고 되어있으니 70세를 넘긴 것은 확실했다. 70세를 넘겼으니 사화와 같은 변을 당해 사망한 것은 아닐 것 같다. 그 뒤의 글들은 주로 자손에 대한 이야기 같다. 조선시대 선비, 특히 고관을 지낸 선비라면 이 비문보다는 좀 더 자세하게, 주인공의 약력과 업적을 기록하게 마련인데 고관의 비문치고는 조금 빈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일대에 청송 심씨가 큰 세력을 떨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없는데 청송 심씨의 비석이 있는 것도 이상하다. 뭔가 사연이 있는 무덤임에는 틀림이 없다. 비문 마지막에 새겨진 연대는 비석을 세운 연대로 생각되는데 건륭51년이다. 내가 알기로는 안동의 남인 계열 선비들은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를 계속 이어 숭정 몇 갑자 00년이라고 쓰는 경향이 있었다. 안동 땅에서 건륭 연호를 쓴 유일한 묘일 수도 있겠다.
건륭제(乾隆帝)는 청나라의 6대 황제(중국을 지배한 때로부터 치면 4대 황제)로 1711년에 태어나 1735년부터 1796년까지 60년 이상을 제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건륭제 51년이라면 1785년으로 18세기 후반의 정조 집권기이다. 정조 집권기에 안동에서 청나라 연호를 쓴 무덤의 주인공이라면 영남 남인 계열은 아니었을 것 같다. 노론 계열 관리의 무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보고 지적해준 어느 분의 의견처럼 공명첩을 사서 얻은 벼슬일 가능성도 있겠다. 공명첩을 살 정도로 부를 가졌다면 무덤에 돈을 많이 들였을 터인데 비석이나 비석 앞의 상석을 보니 그리 돈을 들인 것 같지는 않다. 후대에 와서 가세가 기울었거나 대가 끊어졌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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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문내용 |
3. 농암 종택
산에서 가송리 일대를 둘러보고 농암종택쪽으로 내려왔다. 농암종택은 원래 지금의 위치에 있지는 않았고 분강촌에 있었지만 안동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지금의 농암 종손인 이성원 선생님께서 이곳에 땅을 조금씩 마련하여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 블로그에 있는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심심산골에서 갑자기 궁궐같은 종택을 만나게 되면 누구나 탄성을 지르지만 같이 간 사진작가의 관심 분야와는 달라서 멀리서 보는 종택의 경관 사진은 없다. 종택 마당에서 강변으로 조금 나온 곳에 자리잡은 긍구당은 밤새 물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잘 수 있는 환상적인 민박 체험 코스다. 농암종택에서 1박을 하기 위해서는 오래 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아주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안동 지역의 종가댁 자제이신 선생님이 농암 종가의 종손께 인사나 드리고 가려고 내당을 찾았지만 종손인 이성원 선생님은 문회 일로 출타중이어서 돌아나왔다.
농암종택의 사랑채 격인 긍구당, 누군가 이곳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밤을 보내는 멋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농암종택에서 강변으로 이어지는 퇴계 오솔길은 걸어보면 누구나 탄성을 지를 만큼 환상적인 걷기 코스다. 다만 중간에 사유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곳이 있어 아직 마음놓고 강변을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근에 학소대라고 학의 둥지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큰 바위가 있다.
농암 종택에서 퇴계 오솔길을 따라
4. 공룡 발자국
강변을 따라 퇴계 오솔길을 걷다가 사유지 문제로 출입을 만류하는 안내 표지판을 무시하고 조금 더 내려가면 공룡발자국 화석을 만나게 된다. 질서 정연한 다른 곳의 발자국들과 달리 이곳의 발자국 화석들은 공룡들이 떼로 놀았거나 싸움을 했는지 수많은 발자국들이 무질서하게 찍혀있다. 같이 간 일행인 사진작가는 내가 아무리 공룡 발자국이라고 우겨도 잘 믿지 못하겠다면서 사진을 찍어두라는 나의 부탁에 영 시큰둥한 반응으로 찍는다.
공룡 발자국과 강변 일대
산행 후 출발점에서
이 글에 있는 사진은 동행한 사진작가의 사진을 얻어서 올린 것으로 일부는 찍어달라고 부탁을 해서 마지못해 찍은 사진도 있다.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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