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리에 전하는 이야기
안동에서 서쪽으로 4㎞ 정도 가면 풍산김씨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오미리입니다. 오미동은 뒤로는 학가산의 한 갈래인 죽자봉을 배산으로 하고 동(東)으로는 아미산을 좌청룡으로 삼고 서(西)로는 도인산을 우백호로 삼은 명당터에 자리 잡은 풍산김씨 500년 세거지입니다. 풍산 김씨가 이곳에 정착하기는 조선 초기 시조 문적(文迪)공의 8세손 자순(子純)공 때부터입니다.
이때에는 마을 이름을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 있다고 해서 오릉동(五陵洞)이라 불렀습니다. 그 후 의정(義貞) 공이 을사사화 후에 낙향하여 오무동(五畝洞)으로 고쳤는데 능이란 글자가 언덕을 뜻하지만 임금의 무덤을 뜻하기도 해서 이랑 무(畝) 자를 넣어 오무(五畝)로 고쳤습니다.
그 후 의정공의 손자인 유연당(悠然堂) 대현(大賢)공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5형제는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팔연오계(八蓮五桂)라 하여 오미동이라는 지명을 하사하게 되자 오미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미리에 전하는 이야기
이 마을의 풍산김씨 한 집안에서 아들만 9형제를 낳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아들을 낳은 것도 천복인데 모두 재기가 출중하고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 인근 마을 사람들도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막내 아들이 제일 영리하여 내외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습니다. 이 때 안동부사는 자식이 없어 적적한 나날을 보내던 중 김씨댁의 9형제 이야기를 듣고 그 중 총명하고 귀여운 막내아들을 데려다 훌륭히 기르겠다고 청하여 마침내 막내 아들은 부사댁에서 명문자제로 귀하게 자라게 되었습니다. 하나를 배우면 백을 통하는 총명에다 깍듯한 예의범절과 부모에게 대하는 깊은 효심도 있어 부사는 친아들처럼 사랑하였으며 이동할 때 마다 데리고 다녔습니다.
몹시 무더운 여름 어느날 막내아들은 더위를 식힌다고 낙동강에 뱃놀이를 나갔습니다. 영호루 앞에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호기심에 사람이 없는 깊은 곳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물살이 세어지자 노젓는 손에 균형을 잃어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부사와 온 마을 사람들은 매우 슬퍼했습니다. 특히 아우를 잃은 나머지 형제들의 슬픔은 더더욱 컸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글을 읽어 훌륭한 인재가 되는 것이 아우의 죽음에 대한 형제의 정이라 생각하여 학업에 열중하였습니다.
드디어 한 과거에서 5형제가 다 같이 급제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사스런 소문이 전국에 퍼지니 이를 시기한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임금께 무고(誣告)를 했습니다. "5형제가 동시에 등과한 것은 불길한 징조이며, 그곳은 필시 보통 지형이 아닐지니 이를 그냥두면 역모가 날 것이옵니다. 처단하여 원화소복하기를 바라옵니다."고 임금에게 연일 상소를 올렸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처음엔 시기하는 무리의 참소라고 생각했으나 그 횟수가 잦아지자 마음이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임금은 당시 풍수지리에 뛰어난 지관을 밀파하여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밀령을 받은 칙사가 안동에 와서 지형을 조사해 보니 역모의 땅같지는 않았으나 어명인지라 김씨네 선조의 묘지를 파보기로 했습니다. 무덤을 반쯤 팠을 때 이상하게도 붕어 3마리가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 1마리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저만큼 나가 죽었습니다. 다른 1마리는 갯가에 뛰어나가 죽었고, 마지막 1마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괴이하게 생각한 지관은 살펴보니 명산혈이 산줄기를 타고 뻗었는지라 혈을 타고 가 보니 예천군 고평면 오천리에서 끊어져 있으므로 이는 역모가 날 징조가 아님을 확인하고, 오히려 명당의 무덤을 파헤치기까지한 것을 퍽 애석히 생각하여 이 마을의 새 이름을 지어주니 5형제가 한꺼번에 과거에 급제한 것은 과연 아름다운 일이란 뜻에서 오미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 이 이야기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 박장영님은 현재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서 학예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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