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고와(好古窩) 유휘문(柳徽文)
호고와(好古窩) 유휘문(柳徽文)은 1773년 안동군 예안면 주진동(북삼산)에서 유만휴(柳萬休)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역해참고(易解參考)를 저술한 유정원(柳正源)이 그의 할아버지다
유휘문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단정하여 어른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한번 마음먹은 것은 결코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그는 돌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외할아버지 조선양(趙宣陽)의 지극한 사랑 속에 자랐지만 그를 불쌍히 생각하여 일찍부터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 |
>> 호고와문집(好古窩文集) ⓒ유교넷 |
한번은 그의 외할아버지가 글을 배우려고 애쓰는 그를 보고“내가 새 옷을 입고 진흙에 앉으면 좋은 글을 가르쳐 주겠다”고 농담을 했다. 유휘문은 서슴치 않고 마당으로 내려가 진흙 위에 앉았다. 어쩔 수 없게 된 외할아버지가 백련시(百聯詩)한권을 가르치니 그는 거침없이 외어버렸다. 놀라운 그의 재주를 본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글을 가르치는데 성심성의를 다했다.
부덕(婦德) 높은 그의 어머니는 기회 있을 때마다 유휘문형제를 불러놓고‘너희들은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더욱 공부에 힘써야 한다. 너의 아버지는 생전에 너희들이 과거를 보아 출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현사(賢士)가 되기를 바랐노라’고 훈계하였다.
9세때 작은아버지 일휴(日休)한테 사략(史略)과 통감(通鑑)을 배웠다. 먼저 배운 동료들의 진도가 빠른 것을 안 그는 그날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업에 전념하고 단 하루라도 배움을 결(缺)하는 날에는 밥을 먹지 않았다. 스스로의 노력이 이러하니 11세때 대학을, 15세때 오경(五經: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을 모두 배웠다. 그는 이미 시문에 능하여 교옥(喬獄)과 미법(靡法)등의 시편을 지었다고 연보는 적고 있으나 지금 전하지는 않는다.
그는 날마다‘요순(堯舜)이래 동방유현들의 도학을 전수한 순서를 외며 누가 그 연원을 계승할 것인가’생각하며 유병문(柳炳文)과 함께 유교의 제경전(諸經典)을 읽고 토론하고 사색하니 뜻은 더욱 확고해지고 학문은 더욱 넓고 깊어졌다.
18세때부터 저술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쓴 책이 옥쇄보속(玉璽譜續)이다. 옥새보속은 옛 옥새보(玉璽譜)에 없는 당대(唐代)에서 원명(元明)까지를 역대의 史傳을 참고해서 편설한 역사책이다. 그 당시 정조임금은 현사를 구하기 위해 치국의 법을 구하는 방을 전국각지에 붙였다. 유휘문은 만여자로된 상소문을 올리려다가 나이가 어린 탓으로 스스로 그만두었으나 학문적 야망과 포부가 당당했다.
![]() |
>> 호고와선생문집 별집 ⓒ유교넷 |
그는 22세때 비로소 선현의 학문인 도학을 공부하기 위해 족조(族祖) 유장원(柳長源)을 찾았다. 이황(李滉), 이상정(李象靖)이래 전수한 학문의 요결을 듣고 “진실로 학문하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하고 더욱 인격수양의 학문에 힘썼다. 유장원이 그의 능력을 시험한 후 “총명이 절인하고 노력이 독실하니 두려워할 후배”라고 평했다.
수년만에 유장원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다시 집안아저씨 건휴(健休), 범휴(範休)에게 서면으로 여러 가지 학설을 질문하다가 이상정의 고제자 남한조(南漢朝)를 사사했다. 유휘문은 스승 남한조에게 근사록(近思錄)과 태극통서(太極通書)를 수강했는데 이미 유휘문의 학문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했으므로 남한조가 제자를 벗으로 대했다고 한다.
또 그는 이황-유성룡(柳成龍)-정경세(鄭經世)-정도응(鄭道應)으로 내려오는 학맥을 적전한 정종로(鄭宗魯)을 찾아 수강하기도 했다. 결국 유휘문은 실사구시의 경향이 강한 가학의 바탕위에 철저한 주리론(主理論)중심의 이황-김성일(金誠一)-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의 맥과 정경세 이후부터 주리(主理)의 기반위에 주기(主氣)를 절충하려는 경향이 강한 이황-유성룡(柳成龍)-정경세(鄭經世)-정도응(鄭道應)의 맥을 함께 흡수한 셈이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후일 그가 대유로 성장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유휘문이 40고개를 넘자 그의 학문은 박학강기하였다. 특히 그는 원시유가가 강조한 음률에 정통했다. 주자의 금율설(琴律說)과 성율변(聲律辨)을 보고 설명이 너무 간단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는 채서산(蔡西山)의 율여신서(律呂新書)와 대전(大全)의 제설(諸說)을 참고하여 서로 고증해 가면서 금율설고해(琴律說攷解)와 성율변해(聲律辨解)를 저술하고 또그림으로써 사청오궁(四淸五宮)과 손익상생(損益相生)하는 묘리를 표시 하였다.
그가 45세때 성균관 분묘의 석다례(釋茶禮)에 참석했다. 거기에 모인 궁중악사들과 악률(樂律)을 논하게 되었다. 한악사가 초라한 시골선비가 무엇을 알겠나 생각하며“율(律)이 32가닥이 있고 편종편성(編鍾編聲)하는데는 반드시 16가락으로 함은 무엇 때문인가”고 물었다. 그는 벌써 이 분야에 대해 책을 두권이나 저술한 경험이 있으므로 막힘이 없이 설명하고 궁중음악의 연주가 잘못된 곳까지 지적하니 모든 악사가 놀랐다.
노악사(老樂士)들은 “박연 이래 음악의 최고가는 사람이라”며 거듭 감탄했다. 이길로 그는 서적에서 보아온 전국명승지를 유람했다. 개성을 찾고 강화도의 마니산을 오르고 북으로 함흥, 남으로 경주, 동으로 영해까지 탐승하며 2년 동안 전국 산천을 실지로 답사하여 책에 기술된 내용과의 일치여부를 직접 확인하였다.
![]() |
>> 이 건물은 조선 정조, 순조 연간의 실학자인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이 지은 가옥으로 원래 안동시 임동면 마령 1동의 가르편(갈편, 渴鞭)에 있었으나, 1987년 임하댐 건설로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건하였다. ⓒ유교넷 |
그는 결코 책상머리에 앉아 공리공론만을 일삼는 유약한 학자는 아니었다. 그가 평소 서민의 의복제도까지 관심을 기울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미간행본 창랑답문(滄浪答問)은 각지의 특산물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이고 보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유휘문은 책에서만 본 천하의 명승고적지 등을 실제로 답사한 후 서유록(西遊錄), 북유록(北遊錄), 남유록(南遊錄), 동유록(東遊錄) 등을 담은 사방유록(四方遊錄)을 지었다.
이후 그는 고산(高山), 사빈(泗賓)서원에서 혹은 기양(岐陽)서당 및 삼산정(三山亭)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한편 저술작업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의 60 생애는 학문과 구도(求道)로 일관되었다. 유휘문의 학문적 업적은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더욱 크고 다양했다.
그는 선배유학자들이 추구한 맹목적 답습에 그치지 않고 연구할 것은 연구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주장할 것은 주장하였다.
![]() |
>> 호고와 류휘문의 당호 현판으로 호고와 종택 외당(外堂)의 어칸 위에 게판되어 있다. ⓒ유교넷 |
이결과 그는 십여종의 서적을 저술하였고 수십종의 논설을 작성하였다. 그의 저술 및 편저(編著)를 열거하면서 그 내용의 일부나마 살펴보면 유휘문의 학문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28세때 시대전(詩大傳)을 편저했다. 이 책은 춘추전국시대에 우후죽순처럼 배출된 제자백가들의 시부(詩賦)를 발췌 수록한 것이다.
그 이듬해 쓴 소학후편(小學後篇)은 주자이후의 중국유현들의 사적과 우리나라 선혈들의 언행을 수집하여 두 편으로 엮은 책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그의 논설 지명설(知命說)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천명을 받음에는 일정한 분한(分限) 있으니 거기에는 일호의 인력도 용납하지 않는다.
가령 일분(一分)이라도 재외(在外)한 것을 얻으면 그것은 그만큼 재아(在我)한 것을 상실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빈병에 물 일분(一分)을 넣으면 그만큼 공기 일분(一分)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니 그의 분(分)이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외물을 얻어도 다행할 것이 없고 잃어도 걱정될 것도 없다. 그저 천신(天神)의 명령대로만 따를 뿐이다. 천신이 모든 인간을 낼 때 각각 그의 직분을 주는 것 이니 만약에 자신이 태만하여 천직을 폐해버리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복록을 방기하는 것이다.
이 같은 도리는 불교의 인과응보설과는 스스로 다르다”
32세때 그는 유건휴(柳健休)와 서신으로 논변한 후 별자리 등 우주천체도인 선기옥형을 만든 후 주역에 심혈을 쏟았다. 그 이듬해 사단칠정이기논서(四端七情理氣論書)를 지어 성리학자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40세에 들어선 그는 예학(禮學)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가져 주자의 가예고(家禮攷)를 수정보완 하여 가례고정(家禮考訂) 1책을 지었다.
이 당시 기호학파는 인물동이(人物同異)문제를 싸고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으로 갈라져서 서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기호학파의 중진학자 권상하(權相夏)의 문인 중 사람과 그 밖의 생물의 성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 한원진(韓元震)일파는 호론(湖論)으로 일컬어졌고 심성론에 있어서 금수(禽獸:길짐승과 날짐승)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오상(五常)의 성(性)을 구비했다고 주장한 이간(李간)일파가 낙론(洛論)으로 취급되었다.
유휘문은 기호학파가 인물동이설(人物同異說)을 싸고 양분한 상태를 보고 맹자와 중용을 인용하면서 그 자신의 학설을 상세하고도 분명히 개진하였다. “인간도 같은(同) 중에서도 다름(異)이 있고 다른(異)가운데서도 같음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설(二說)바로 일설(一說)로 합수(合數)가 되는데 어찌 모순된다는 의혹이 있을까” 46세 때 주자가 유곽지(劉郭之)의 오류를 시정한 책을 주해하며 저괘고오(著卦攷誤)를 저술하였다. 주역에 능한 그는 주자의 계몽(啓蒙)을 깊이 연구하여 계몽고의(啓蒙攷疑) 세권을 편성하였다. 또 그는 이황의 계몽전의(啓蒙傳疑)에 대한 전의여론(傳疑餘論)을 써서 개몽고의(啓蒙攷疑)에 더 붙였다. 남성재(南誠齋) 같은 유학자는 개몽고의(啓蒙攷疑)를 보고 “원서(原書)를 크게 보익하는 대저(大著)”라고 평했다.
54세 때 유휘문은 지금의 안동군 임동면 수곡동으로 이사를 갔다. 여기에는 학덕 높은 유건휴와 후일 영남학파의 종장이 될 유치명(柳致明)이 있었다. 세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만나 성리학의 주체인 심성이기설(心性理氣說)과 선현의 경전을 끊임없이 토론하고 의논하였다.
사람들은 수곡동(대평:大坪)을 가리켜 학문과 도덕이 한꺼번에 모인 마을이라고 입을 모았다. 새로 수곡동에 자리 잡은 유휘문은 대하변천종시기(大河變遷終始記)를 썼다. “천독(川瀆)의 최대한 것은 중국의 황하(黃河)만한 것이 없으니 고금의 변천도 황하 같은 것이 없다. 황하의 도가 변하니 중국의 지형도 크게 변하고 세도가 따라서 거듭 변하였으니 가히 천지의 변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황하의 본원의 서역에서 나왔다 이것이 중국대륙으로 들어오기는 주대(周代)이전으로 서쪽에서 동으로 북으로 흐르다가 한대(漢代)이후에는 서쪽에서 동으로 송대(宋代) 이후에는 서쪽에서 동으로 흐르다가 그 반은 남쪽으로 해서 회수(淮水)로 들어가고 명대(明代)이후는 서쪽에서 남쪽으로 흘러서 모두 회수로 들어갔다. 옛부터 사독(四瀆)은 모두 남쪽으로 모여 흐르면서 수해가 더욱 심해졌으니 변천이다.”
이 밖에도 그는 주역경전통편(周易經傳通編) 이정전서해(二程全書解) 주서강록간보설(朱書講錄刊補說) 계몽익요(啓蒙翼要) 염낙풍아보유(濂洛風雅補遺) 등을 편저하였다. 이처럼 방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그는 박학강기(博學剛氣)하였다. 인용제서(引用諸書)를 색출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닌데 그는 동서고금의 서적 중에서 무슨 구절이 어느권 어느판에 있다는 것을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사(先士) 및 선배의 수많은 문집을 교정하는 일을 거의 주관하였다. 또 한(漢), 진(晋)이래로 의복에 관한 책을 널리 채록하여 관복고증(冠服考證) 1책을 편성하기도 했다.
생전의 그에게 학행으로 천거되어 두 번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그는 끝내 사절하고 초야에 묻혀 인격도야와 학문에 평생을 바쳤다. 임종을 앞두고도 그는 자제들에게 학문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나이 50이면 요절은 아닌데 이제 내 나이 60이라 죽어 한 될 것은 없으나 왕고도문(王考道文)과 역해참고(易解參考) 내년 봄에 고증과 교정을 끝낼까 했는데 이것을 완성을 못했으니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내수명이 이러하니 어이할 수 없구나”하며 조용히 눈을 감으니 향년 60세였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