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2)
- 이솝우화를 보면 여우와 학 이야기가 여러 편 나오지요. 오늘은 그 중 한 편의 이야기로 논술의 뿔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대충이라도 만져 볼까 합니다.
여우와 학이 친구가 되어 숲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사냥꾼에게 쫓기게 되었대요. 덜렁 겁이 난 학이 “여우야, 우짜마 좋노. 큰일났대이.” 하니, 여우가 거드름을 피우며, “걱정일랑 붙들어 매거래이. 우리 집으로 도망가마 된다카이.”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학이 “그래도 전 마들이 쫓아오마 우야는대?” “아, 참 걱정말라카이. 이 방법 말고도 내한테 도망갈 방법이 열두 가지는 더 있스이. 니는 뭔 수가 있나?” “난 한 가지 꾀밖에 없다.” “그라마 내만 믿고 따라온나.”
그래서 학이 여우를 따라 동굴 속으로 숨었는데 사냥꾼들이 어찌 알았는지 여우굴까지 쫓아왔다네요. 이쯤되니 여우도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겠지요. “니, 정말 뭔 수가 있긴 있나?” 그래도 명색이 전설의 고향에선 사람 재주까지 피울 줄 아는 영물인데 꼬리를 쉽게 내릴 수 있나요. 썩어도 준치라는데. “험, 험, 아직 달아날 방법이 여섯 가지나 있스이, 우예 안 되겠나.” 그런데 바로 뒤까지 사냥꾼이 바짝 따라붙자 다급해진 학이 “여우야, 뭐하노. 우째 좀 해봐라.” “아이, 참. 가마이 있어 봐라. 니가 자꾸 그라이 빠져나갈 꾀가 세 가지밖에 생각나지 않찮나.”
그러자 더 이상 여우를 따라가 봤자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 학이 여우 앞에 벌렁 드러누웠대요. 여우굴로 쫓아 들어온 사냥꾼이 이 대목을 보니, 아 글쎄 이 여우란 놈이 제 죽을 줄 모르고 학을 잡아다가 성찬을 벌일 판국이네요. 그래서 죽은 체 하고 있던 학을 굴 밖으로 던져버리고 그 잘난 체하던 여우를 잡아 가죽을 벗겨 들곤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굴 밖으로 나왔다고 하네요. 여우목도리가 돈깨나 나가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자 계획을 할 때에는 이 우화에 나오는 여우처럼 당연히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는 너무도 평범한 사실을 우리는 곧잘 잊어 버립니다. 제 꾀에 넘어가는 여우처럼 말이지요.
가령 우리가 집에서 출발하여 안동역까지 가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방법에는 여우의 꾀 이상으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차를 몰고 갈 수도 있고, 택시나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고, 이도저도 아니면 걸어가거나 뛰어갈 수도 있겠지요. 아, 자전거를 타면 걸어가는 것보단 좀더 편하게 갈 수도 있겠네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개 사람들은 ‘에이, 그 뻔한 걸 누가 몰라요.’라고 합니다. 물론 저도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볼까요? 그 전에 이 말씀은 꼭 드리고 가야겠네요. 안동역을 가건 논술을 공부하건 세상사를 풀어가건 무조건 빨리 하고 빨리 가는 것만이 능사는 결코 아니랍니다. 동의하시나요? 당장 동의하기 어려우면 잠시 밀쳐 두었다가 다시 생각해 보세요.
안동역을 가려면 물론 자가용을 몰고 가는 게 가장 빠르겠지요. 그러나 동일한 지점에서 동일한 시간에 출발한다고 해도 사람마다 도착하는 시간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동작이 굼뜬 사람도 있고, 길을 몰라 헤맬 수도 있고, 아는 길이라도 어쩌다보니 돌아가는 수도 있고, 굳이 서두러 가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걸 교육학에선 ‘학습 상황과 동기에 따른 학습 반응의 양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에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가용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고, 돈이 없어 대중교통마저 이용할 수 없을 수도 있고, 하던 일을 마저 끝내야 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안동역에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은 각각의 상황에서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가용을 몰고 가건, 택시를 타건, 자전거를 타고 가건, 비가 내려 우산을 쓰고 걸어서 가건 그 모든 상황마다 말이지요. 학의 지혜와 같은.
논술 공부도 마찬가집니다. 논술뿐 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공부가 다 그러하지요. 학습자에겐 안동역에 가는 일 곧 학습해야 할 내용이 처음 접하는 과업이겠지요. 그래서 그에게는 닫힌 마음의 눈을 한순간에 뜨게 해줄 수 있는 훌륭한 선생님의 명쾌한 지도가 있어야 합니다. 심봉사가 심청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을 때처럼이오.
특히 논술 교육이 그렇습니다. 적어도 학습자가 혼자 힘으로 길을 찾아 갈 수 있을 때까진 더욱 그러하지요. 그런데 대개 남을 가르친다는 분들은 여우가 제 집에서 학에게 대접한답시고 접시에 죽을 내어놓는다거나 학이 여우에게 목이 긴 병에 죽을 담아내는 식의 갑갑한 친절을 베풀지요. 그리곤 말합니다. “니는 줘도 못 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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