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함께한 일본 여행2 (쿄토, 나라)
13일 오사카성을 나온 후 간 곳이 쿄토의 헤이안 신궁이다. 일본 역사에서 794년~1192년연간의 약 400년 동안을 헤이안(平安) 시대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중기까지 해당하는 이 시대는 일본의 50대 왕 간무천황이 수도를 나라에서 헤이안쿄(平安京, 지금의 쿄토 지역)으로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한반도의 통일신라와 고려와도 큰 문제가 없었던 기간이기도 하다. 쿄토는 1868년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수도를 지금의 토쿄로 옮길 때까지 1,100년 가까이 일본의 수도였다. 도시 이름만 봐도 쿄토는 수도라는 의미가 중복되어 있는 반면 토쿄는 동쪽의 수도라는 격이 낮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천년이 넘는 세월을 수도로 있게 해준 간무천황을 모시는 신사이니 일본 사람들이 이 신사를 신성시 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이 신사에서 결혼식이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는 황족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오사카 사람은 쿠이다오레(食倒れ), 쿄토 사람은 키다오레(着倒れ), 토쿄 사람은 미다오레(見倒れ)' 오사카 사람은 먹다 죽고, 쿄토 사람은 입다 죽으며, 토쿄 사람은 보다 죽는다는 의미를 가진 말인데 그 지역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상인의 도시인 오사카에는 접대가 잦아서 음식이 발달했고, 쿄토는 천년이 넘는 세월을 수도였으니 각종 왕족과 귀족들이 참가하는 행사가 많아 늘 키모노를 차려입고 참석해야 할 행사가 많았으며, 토쿄는 에도시대 이후 쇼군이 거주하면서 정치의 중심지니 각종 행렬이나 행사가 많아 볼거리가 많다는 뜻이다. 실제 쿄토에서는 키모노 차람의 여성을 자주 볼 수 있고 교포가 운영하는 MK 택시는 키모노 차람의 손님에게는 택시요금을 할인해주기도 한다.
나라에서 쿄토로 수도를 옮길 때 나라 지역에 천연두가 유행했다고 한다. 점장이에게 물어보니 간무천황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형제의 원혼 때문이라고 했단다. 백성들에게 그대로 이야기 할 수는 없고 땅의 기운 운운하며 수도를 옮긴 모양이다. 9월에 이 천도를 기념하는 마츠리가 쿄토에서 열리는데 몇 년 전 일본 갔을 때 이 마츠리를 볼 기회가 있었다. 9월에 쿄토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사람은 날짜를 잘 맞춰 가면 일본의 대표적 마츠리를 구경할 수도 있다.
보통 신이 된 사람 등을 모시는 곳을 신사라고 하는데 왕을 모시는 곳은 신사라는 말 대신에 신궁이란 표현을 쓴다. 헤이안 신궁, 메이지 신궁 등으로. 신사나 신궁을 알리는 문을 토리이(鳥居)라고 한다. 새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의 솟대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는 다시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신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시베리아의 샤머니즘 신앙에서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매개가 새이며, 이 새는 신성한 나무에 앉아 하늘의 뜻을 전하고 그 나무 아래에서 샤먼이 그 뜻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는 구조를 가진 것으로 알고있다. 일본에서는 그 신앙이 신사란 형태로 정형화되었고 우리나라는 삼한의 소도를 거쳐 솟대로 남아 전해지다 소멸의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헤이안 신궁 앞에도 주황색의 거대한 토리이가 있었지만 사진은 찍지 못했다.
이어서 청수사(淸水寺, 기요미즈데라)로 옮겼다. 청수사는 지난 번 방문 때 사진도 찍고 했으므로 별로 사진도 찍지 않았다. 사람이 많아 어머니의 기념사진도 생략했다. 본당은 139개의 기둥 위에 얹었다는데 지진이 많은 일본에서 오래 남을 수 있는 건축 방법으로 생각된다. 지혜, 부, 건강을 상징하는 세 줄기 앞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청수사 안에도 신사가 있었다. 절 안에 신사가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부처와 신사의 신을 구태여 구분하지 않고 편리한 대로 믿으면 되는 모양이다. 향을 피우는 곳이면 어김없이 향을 자신의 몸으로 부치고, 신사에 가면 손을 모으는 행위는 가장 종교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종교적이지 않은 특성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이어서 이총으로 옮겨갔다. 임진왜란 때 군사들이 자신들의 전공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귀를 베어와서 바쳤다. 토요토미가 귀는 둘이 있으니 전과로 확인하기 힘들다고 하자 다음에는 코를 베어왔다고 한다. 산 사람의 코도 베어와서 임진왜란 직후 실제로 조선에는 코없는 사람도 많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도 있다. 이런 귀와 코를 모아 매장한 곳이 이총이다. 이 이총을 우리나라로 옮기자는 논의도 있다고 한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차라리 이 곳에 두어 일본 사람들이 조상의 만행을 기억하게 하는 것도 방법일 수도 있겠다. 이총 바로 위쪽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가 있어 자신의 전과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이 이총은 관리가 되지 않다가 바로 그 옆에 사는 어느 노인이 최근까지 관리했는데 요즘은 시로 관리권이 넘어간 모양이다. 이총 바로 옆의 어린이 놀이터를 요즘은 이총공원이라고 이름을 붙여놓았다. 일본에서 주관하는 관광코스에는 절대 들어가는 일이 없는 이 이총을 한국의 관광회사들은 꼭 코스에 넣기를 바란다. 가이드는 이총 위에 있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으라고 권했다. 단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그러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것도 한 가지 표현 방법일 수는 있겠지만 나는 조용히 보고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슬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이총을 떠나 나라의 동대사로 옮겼다. 동대사 입구는 여전히 사슴으로 인한 동물 냄새로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슴들이 먹이를 줄 사람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큰 절인 동대사는 나라시대에 만들어진 절로 대불전은 최근까지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태국에 그 자리를 내어준 모양이다. 지금의 대불전 건물은 양식으로 보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후에 중건한 건물이라고 한다. 대불전 안의 대불 역시 엄청나게 컸다. 불상도 좌대는 창건 당시의 불상이지만 몸체는 그 후에, 두부는 더 후에 새로 주조된 것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이라고 하는데 수인은 지권인이 아니라 오른손 시무외인, 왼손 여원인을 하고 있다. 이 수인이 비로자나불의 수인이 맞나? 대불의 왼손(여원인) 위에 장정 여덟 명이 설 수 있다니 과연 크다. 대불의 콧구멍과 같은 크기의 구멍을 기둥에 만들어놓고 사람들이 그 구멍을 빠져나가도록 하고 있었다. 그 구멍을 빠져나가면 불행이 물러간다든가? 절 안에서 본 원래 동대사의 건물 배치도는 경주의 불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있었던 형태였다.
동대사의 창건에는 한반도와의 관련성이 많다고 한다. 김대근 시인의 블로그 '반디불의 똥꼬'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의상대사의 제자였던 심상대덕이 백제계 양변스님의 초청으로 화엄불교를 강설하게 되고 이에 성무천황은 747년부터 동대사를 짓기 시작한는데 총책임자는 고구려계인 고려복신(高麗福信)이 맡았으며 대불의 주조는 백제계 국중마려(國中麻呂)가 맡았다. 그리고 당시 최대이던 대불전 건축은 신라인 저명부백세(猪明部百世)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불상 제조를 위해 나라 안의 모든 구리를 동원했고 연인원 51만명이 동원되어 10년만에 완성했지만 불상에 칠할 금이 없어 애를 타고 있을 때 백제왕 경복이 이 소식을 듣고 일본 최초로 무쓰국(임지 -지금의 아오모리)에서 금을 캐서 그가 황금 9백냥을 바쳐 겨우 불상에 금도색을 했다고 한다. 시인의 글에서 조금 이상한 점은 백제가 멸망한 것은 그 절을 짓기 시작하기 약 80년전에 망했는데 백제왕은 무엇이며 경복이라는 사람은 누군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백제 왕족 출신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동대사는 의상 계열의 화엄종의 영향을 받아 한반도 도래인들의 주도로 지어진 절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래서 그 불상을 당연히 비로자나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둘째날 숙소는 고시엔(甲子園) 경기장 옆이었다. 어린 시절 일본 고교야구의 가장 중요한 대회 이름으로 알고 있었던 구장이다. 그날은 한신 타이거즈의 시합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대는 한신 타이거즈의 경기가 마칠 때쯤이었는데 숙소에는 그 야구를 보고 투숙하는 팬들도 있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한신 타이거즈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3박 중 2박이 공항 호텔이라 이 날이 아니면 동네 선술집에서 한잔 하기 힘들 것 같아 혼자 동네 선술집을 찾아나섰다. 경기장 주변이라 내가 기대하던 그런 선술집은 없었다. 한참을 돌아 겨우 한 집을 찾았는데 그 집은 야구 경기 관람을 마친 손님들이 진을 치고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일본에 갈 대마다 동네 아저씨와 호구조사를 하며 한잔 마시는 기회를 노렸는데 이번에는 무산되었다.
헤이안 신궁 입구
- 헤이안은 일본 50대(?) 왕 간무천황 시절의 연호로 이 때 나라에서 쿄토로 수도를 옮겼다.
이 때 부터 전국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를 헤이안 시대라고 하는 모양이다.
신궁 안에 있는 나무에 걸린 종이들
- 소원을 비는 종이들이 아니라 점괘가 나왔을 때 좋은 점괘가 아니면 여기에 붙인다고 한다.
그러면 신궁의 신통력으로 좋은 점괘로 바뀐다는 믿음에 의한 행동이라고 한다.
신궁 앞의 이 물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입과 손을 씻고 정결히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다른 신사에도 이런 물이 있다.
신궁 앞의 술통
- 주류 회사들이 신궁에 이런 술통을 바치면 새해 첫 날 술통을 열고 사람들에게 나눠준다고 한다.
물론 사진 속의 술통들은 빈 술통
이총
- 임진왜란 때 그들의 전과로 잘라간 귀와 코들의 무덤, 근처 쪽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가 있다.
동대사 대웅전 기둥 아래의 구멍, 동대사 대불의 콧구멍과 같은 크기라고 한다.
동대사 앞의 어머니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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