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
퇴계문하에서 서도(書道)로 일가를 이룬 매헌(梅軒) 금보(琴輔), 춘당(春塘) 오수영(吳守盈)과 함께 ‘선성삼필(宣城三筆)’로 불리우는 이숙량(李叔樑: 1519-1592)의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이다. 그는 예안 분천(汾川)에서 농암(聾巖)의 여섯째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처사로 지낸 분이었다.
그는 1543년 소과에 합격한 후, 몇 차례 대과에 응시를 하였으나 실패하자 곧 과거를 그만두고 조유퇴문(早遊退門)하여 학문과 강학활동에 전념하였다. 한편, 그는 선업(先業: 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계승하는데도 깊은 관심을 기울여, 퇴락해가는 애일당(愛日堂: 1512년 농암이 부모효양을 위해 지은 것임)을 수리하여 ‘영모당(永慕堂)’이라 개칭하고, 부모봉양의 뜻을 늘 간직하려 했으며, 또한 생전에 아버지가 열었던 구로회(九老會)를 재연하여 노인에 대한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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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초년에 병풍암(屛巖)아래 낙익정(樂益亭)을 짓고 학문을 닦았는데 이곳은 도산(陶山)과 거리가 얼마 떨어져있지 않아 사문(師門)의 가르침을 받는데도 매우 편리하였다.
일찍이 퇴계(退溪)는 이곳 병암에 농암의 초대를 받고 병암에 대해 읊조리기를 ‘어찌 병 속의 은자를(별천지) 자그맣게 여길 수 있으랴. 고요한 가운데 공부하며 역사를 담론할 만 하구나’ 라 하여 은일자의 별천지로 형용한 바 있고, 병암이란 시에서는 ‘병암이 암벽에 매달려 있고, 돌 틈의 샘은 이가 시리네. 예전엔 밝은 한 방이 있어 좋았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구려.’라 하였던 것이다.
매암은 일찍부터 퇴문에 입문하였으므로, 퇴계의 계상서당(溪上書堂: 1551년) 복거시(卜居時)에 가르침을 받았다. 이 무렵 퇴계가 계당(溪堂)에 내방한 여러 사람들을 기뻐하여 지었던 <희제군견방 喜諸君見訪>을 보면,
험한 길 넘어 시골집 찾아주니,
주인이 너무 기뻐 근심을 잊었네.
처마 앞 햇볕 받은 갯버들은 땅에 드리웠고,
골짜기는 봄이 오지 않아 술동이에 눈빛 비치네.
일을 만나도 심히 더디어 적용도 못하는데,
글을 뚫어 공부하려 한다면 이것이 미친 짓일 것이네.
바라건대 그대들 이 새소리를 들어보오.
이 도가 어찌 오늘엔들 없다 하리오.
라 하였으니, 계당에는 학문을 배우러 오는 문도들이 많았으며, 또 강학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차운한 매암은
환해(宦海: 벼슬길)에서 돌아왔으니 다시 바랄 것이 무어랴.
새로이 계당을 지으니 만상이 그윽하구나.
이 고상한 삶으로 세속을 벗어났으니.
황홀히 선계(仙界: 신선이 사는 곳)를 그리워함도 어찌 번거로운 일이랴.
때론 묘한 비결 얻어 병을 조섭하고,
맑은 술로 산수를 유람함이 그 얼마더냐.
꽃을 따고 낚시질함도 바라지만 거듭 약속드릴 것은,
병암정실(屛巖淨室)에서 만나 월란암(月瀾庵) 뱃놀이를 하는 것이라오.
라 하여, 퇴계의 계당생활을 속세를 떠난 고취(高趣)로 예찬하고, 훗날 스승 퇴계를 병암과 월란암(月瀾庵)에서 모실 수 있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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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영천이씨 후손들이여 카페 |
1555년에는 퇴계에게 선고(先考: 아버지)의 행장을 써주기를 청한 바 있고, 퇴계는 이듬해 이 행장을 지어 주었다. 이 무렵 그는 두형(이문량李文樑, 이중량李仲樑)과 함께 퇴계가 편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필사하여 연구에 전념하였다.
중년에는 맏형(석량碩樑)의 죽음으로 대구친가에 가있는 형수를 모시기 위해 자주 대구를 내왕하였는데, 그동안 대구 동편의 연경리라는 곳에 화암이란 승경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곳에다 매암서당을 지어 심경연구와 후학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즈음에 퇴계는 그를 격려하며 ‘심경을 공부하는 재미가 어떠한가’라 묻기도 하였던 것이다.
1563년에는 이 서당을 증축하여 연경서원(硏經書院: 화암서원)이라 개명하였는데 이 사업의 전말이 그의 「연경서원기硏經書院記」에 기술되어있다. 퇴계 역시 이 기에 후서(後書)하여(書李大用硏經書院後) 학도들을 권려하는 뜻을 붙여주었으며, 연경서원 제영시를 통해서는 “그림으로도 못다 펴리라. 화암의 승경은, 서원 짓고 서로 모여 육경을 공부하도다. 이로부터 도술이 밝아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니, 사람들 모두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랴.”라 하여, 절승화암에 자리 잡은 연경서원에 학도들이 모여들어 면학기풍이 진작됨을 칭송하고, 그 전도가 밝으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1570년에는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오천(군자리: 광산김씨)의 김씨 형제 및 조목(趙穆), 이안도(李安道: 퇴계의 손자) 등과 「심경心經」을 읽었는데, 퇴계가 격려하기를, ‘마음을 깨달아 어두운 거울 밝게 하려하니, 다시금 깨닫겠네. 선현이 후생됨을’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이와 같이 매암이 퇴계로부터 받은 영향은 바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풍이었다. 퇴계가 평생 학문의 세계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가 늘 세속적 명리에 초연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이 매암에게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예컨대 <유사遺事(매암선생문집내)>에 기록된 퇴계의 언급한 것을 보면, 매암은 당시에 거업(擧業: 과거공부)을 하는 사람들이 학문을 단순히 과거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독서를 깊게 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주자서(여기서는 퇴계의 주자서 절요를 가리킴)」를 공부하면서 용력(用力)을 깊게 하고 세밀히 연구 사색함으로써 체득 한 바가 깊었다고 한데서 잘 파악된다 하겠다.
이와 같이 일찍부터 과거를 포기한 채 퇴계의 훈도(訓導)를 받았던 매암은 퇴계가 명리를 떠나 계상서당, 도산서당을 지어 도학을 밝히고 후학을 인도하였듯이, 45세때(1563년) 연경리 화암에다 서원을 지어 학업연마에 전념하였다. 이러한데서 안동, 예안지역 학풍의 한 가운데에 매암은 우뚝한 선비로 자리매김하였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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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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