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우는 거문고(自鳴琴) 이야기

person 박장영
schedule 송고 : 2008-09-17 13:48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금당실) 박노준(함양박씨)씨 댁에는 길흉을 알려주는 기이한 거문고가 가보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자명금(自鳴琴) 일명 태랑금(泰娘琴) 으로 불러지는 이 거문고는 박정시(朴廷蓍)의 현손 손경(孫慶)이 지은 이름으로 1671년(현종 12) 박정시가 충청도 태안군수(泰安郡守)로 있으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 195cm, 폭 25cm, 6현(絃)으로 된 거문고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전해옵니다.

지금부터 약 400년 전 1670년(현종 11)에 박정시(朴廷蓍)가 충청도 태안군수(泰安郡守)로 부임했는데 박 군수가 부임하기 몇 해 전인 1666년부터 이 곳에 군수로 부임하기만 하면 첫날밤에 죽었습니다. 이러기를 여러 번 거듭하는 동안 이상한 말들이 말에 말을 거듭하여 떠돌았습니다. 이 고을 사람들은 사또가 이상하게 죽어 가는 까닭을 몰라 인심이 극도로 흉흉해지고 사람들은 불안하여 누구나 이 곳으로 부임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형조(刑曹)에서 근무하던 담력과 지략이 뛰어난 박씨가 해괴한 이 사실을 밝혀 민심(民心)을 수습하고자 자원(自願)하여 이 곳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임 첫날 밤, 관복을 정제하고 등촉(燈燭)을 낮과 같이 밝혀 놓고 동헌(東軒)에 정좌하고 있었는데, 삼경(三更)이 되고 인적이 적적할 무렵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휘익 몰아치자 밝혀 놓은 촛불이 일시에 탁 꺼져 버리고 비릿한 피 냄새와 더불어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며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 통곡하는 소리가 되어 점점 동헌(東軒) 쪽을 향하여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제 아무리 담력이 큰 박 군수도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떨리기 시작하자, 박 군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자리에 앉아 울음소리가 가까워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앞문이 소리도 없이 열려지면서 울음소리가 동헌 마루 끝에 와서 뚝 끊겨 지더니 동헌 뜰아래에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아래위로 소복(素服)을 한 소녀가 목에 칼을 꽂고 피를 뚝뚝 흘리면서 박 군수에게 얌전히 절을 올리고 있지 않는가?

이 때 박 군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네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역대 군수가 까닭 없이 죽은 것은 네 소행이었구나! 사람이면 이 밤중에 여기에 온 까닭을 고할 것이며, 귀신이라면 사불범정(邪不犯正)인데, 네 어찌 감히 관장(官長) 앞에 이런 꼴로 나타났느냐 ?” 하면서 눈을 부릅뜨고 동헌의 대들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쳐서 꾸짖었습니다.

이에 소녀는 “사람이 어찌 이런 모습으로 이 시각에 나타나겠습니까? 소녀는 틀림없이 귀신이온데, 원귀(寃鬼)가 되어 신원(伸寃)을 하려고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나타났사오나 소녀의 비참한 꼴을 본 전임 사또들께서 마음이 약하여 죽었기 때문에 하소연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다행히 명관을 만나 이런 다행한 일이 없습니다.” 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의 설로
“지금부터 5년 전 태안 군수가 된 아버지를 따라 이 고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녀의 미색(美色)을 탐낸 아전 한 사람이 소녀를 겁탈하고 난 다음, 후환(後患)이 두려워서 소녀의 목을 칼로 찌르고 동헌 앞뜰에 있는 수백 년 묵은 저 오동나무 속에 거꾸로 집어넣어 오늘에 이르렀으나 소녀는 원귀(寃鬼)가 되어 썩지도 않고 아직도 그대로 있으니 소녀의 원수를 갚아 주소서” 하는 사연으로 그렇게 할 것을 약속하고 소녀를 돌려보냈습니다.

그 이튿날 날이 밝자 태안 관아에 있던 아전들이 이번 군수도 으레 죽었으려니 하는 지레짐작으로 장사(葬事)지낼 준비를 갖추고 들어오다가 사또가 생생하게 동헌(東軒)에 정좌하고 있음을 보고 모두 놀라 꿇어 엎드렸습니다.

사또는 명(命)하여 뜰 앞 오동나무를 베어 보니 과연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소녀의 시체가 목에 칼이 꽂힌 채 거꾸로 쳐 박혀 있으므로 그는 소녀의 목에 꽂힌 칼을 뽑고 정성을 다해 장사(葬事)를 지내주고 소녀의 원혼을 달래는 한편, 그녀가 일러준 아전을 살인범(殺人犯)으로 잡아 자백(自白)을 받고 처형하였다고 합니다. 범인을 처형(處刑)하던 날 밤에 박 군수가 꿈을 꾸니 소녀가 먼저와는 달리 깨끗한 소복 차림으로 나타나 무한히 감사드리면서, 이번에 벤 오동(梧桐)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박 군수는 소녀가 시키는 대로 오동나무를 다듬어 거문고 세 개를 만들고 이러한 사실을 조정(朝廷)에 보고하였더니 조정에서 박 군수의 처사를 칭찬하는 한편, 거문고의 내력(來歷)이 이상하니 두 개만 조정에 보내라고 하여 조정에 올리고, 하나는 간직하였다고 합니다. 청(淸)나라 성조 임금도 이 기괴한 소문을 듣고 한 개를 희망하므로 숙종(肅宗) 임금이 하나를 선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 후, 청렴(淸廉) 강직한 박 군수는 선정(善政)을 베풀고 임기를 마친 후 거문고 한 틀만 안고서 고향인 이 곳 금당실(金塘室)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갑속에 든 이 거문고는 박 군수의 집안과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나 흉(凶)한 일이 일어나면 스스로 소리를 내어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후손(後孫)들은 신비한 이 거문고 이름을 자명금(自鳴琴)이라 하여 대대로 가보(家寶)로 물러오던 중 지금부터 100여 년 전 당시의 세도가(勢道家)였던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이 빌려가서 거문고 뒤를 칼로 뚫어 본 후로는 스스로 우는 일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로
 “소녀는 4년 전 이 고을 원의 외동딸인데, 애달픈 사연으로 죽은 몸입니다. 이 곳에서 동북(東北)쪽으로 멀지 않는 곳에 소녀의 무덤이 있는데, 그 옆에 두 그루의 오동나무가 있사옵니다. 그 뿌리가 소녀의 시구(屍軀)에 파고들어 견딜 수가 없사오니 베어 없애주소서” “어렵지 않구나! 그 뿐이냐?” “그리고 그 오동나무를 베시거든 버리지 마시고 거문고를 만드시면 스스로 소리를 내는 자명금이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소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말기를 천만복원하오며, 다시는 현신(見身)치 않겠나이다.” 하고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튿날 아침, 문밖이 소란하여 단잠에서 깨어 크게 호령하여, “게 아무도 없느냐? 밖이 왜 이리 소란한고?” 하니 이방을 비롯한 모든 관속들이 새 원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도구를 들고 파랗게 질린 체 잘못을 빌었습니다. 이에 사또는 너그러이 용서하고 태랑(泰娘)이라는 여인에 대해 물으니 오래 있었던 아전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4년 전 고을 원에게 태랑이라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마음씨와 행실이 고와 부모는 물론 온 고을의 총애(寵愛)를 독차지했습니다. 그러나 기구하게도 평민의 아들과 사련(邪戀)이 있어 끝내는 인연(因緣)을 맺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눈치 챈 아버지는 양반의 체통과 귀여운 외딸의 사랑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그들의 정열을 끊을 수 없음을 알고 비밀리에 이를 허락하고 신혼초야(新婚初夜)를 맞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을 원은 자객(刺客)을 보내어 신랑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초야(初夜)의 피곤함과 나른함에 젖어 꿈길을 헤매던 신랑에게 백발의 노인이 현몽(現夢)하여 “잠자리를 바꿔 눕지 않으면 큰 화(禍)를 당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는 신부(新婦)와 잠자리를 바꾸고 잠이 들었는데 그 때까지 그들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자객은 밤이 깊어지자 지자 이러한 사실도 모른 체 신방으로 들어가 초저녁에 가늠해 둔 신랑의 가슴에 비수(匕首)를 힘껏 찔렀습니다. 이를 본 신랑은 그 즉시 줄행랑을 쳤으며, 이튿날 새벽 신방의 문을 열었던 원은 눈앞에 비친 참상에 아연질색을 하고 뉘우쳤지만 소용없었으며, 알량한 체통으로 인해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고을원은 오동나무 곁에 딸을 묻어버리고 근심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병을 얻은 원은 사직(辭職)하고 귀향(歸鄕)하여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연을 들은 원은 그들을 재촉하여 간밤에 말하던 그곳에 찾아가니 과연 오동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 나무를 벤 후 거문고 두 개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든 두 개 중 한 개는 태안군에, 다른 하나는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가져와 자손에게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구한말(舊韓末) 당시의 세도가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이 빌러 가서 낡은 거문고 줄을 갈아 2년 여간 쓰다가 다시 돌려주었으나 그때 고친 이후부터 스스로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 박장영님은 현재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서 학예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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