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 앞 회화나무

person 김종규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8-09-04 10:41
22일 새벽, 안동에서는 큰 사건이 있었다. 임청각 앞의 회화 나무가 누군가에 의해 잘려져 나간 것이다. 나무 한 그루 잘린 사건이니 다른 지역에서는 뉴스 거리도 되지 않겠지만 22일 안동에서는 한국 야구가 일본을 이긴 것 이상으로 큰 사건이었다.

 >>잘리기 전의 회화나무 (왼쪽은 중앙선을 달리고 있는 기차)

 >>  잘려진 위의 회화나무 

많은 사람들에게 이 나무는 단지 민간 신앙과 관련된 신목(神木)으로 인식되고 있다. 1970년대 안동댐이 건설될 당시 건설 회사는 차량 진입에 방해가 되는 이 나무를 제거하기 위해 인부를 고용했는데 톱으로 이 나무를 자르던 사람이 사망하고 나무를 제거하던 중장비의 삽날이 부러지면서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목으로 불려왔다고 한다. 무속인들에게는 영험 있는 나무로 인식되어 내림굿을 받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10여 년 전에는 4명의 20대가 타고 달리던 승용차가 이 나무와 정면충돌해 3명이 숨지는 큰 사고가 발생했는데 당시 나무에서는 별다른 사고의 흔적을 찾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안동 사람들은 교통에 장애물이 되지만 없애기는 뭣한 나무로 인식되어져 왔다. 그래서 이 나무가 잘려져 나간 날 범인은 어느 ‘영안실’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만 인식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나무가 잘려져 나간 사건을 시원섭섭한 사건 정도로 본다.

 >> 회화 나무가 도로를 조금 차지하고 있긴 하다.

 >> 위험 표지판과 안전장치


반드시 현대사의 사건들 때문에 신목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안동문화 지킴이 김호태 대표의 글에 의하면 임청각에서 공부하던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갈 때는 기도를 하고 떠났고, 과거 급제를 하고 돌아와서는 청ㆍ홍 비단을 걸어주어 감사의 뜻을 전했던 학자수(學者樹)이기도 했다고 한다. 한말 일제가 안동 시내에 불을 질러(의병운동에 대한 보복)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을 때 시민들이 피신을 했던 곳이며, 6,25 때 폭격으로 사람들이 갈 곳이 없을 때도 이 곳에 모여 생명을 부지 했던 곳이기도 하며, 안동 시내와 용상동을 잇는 개목나루의 행인들의 쉼터가 되기도 했던 나무라고 한다.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나무라고 봐야 한다.  
 

  이 나무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역사물이기도 하다. 안동문화 지킴이 대표 김호태님은 이 나무를 안동에서는 서울의 숭례문 훼손 사건과 같은 비중으로 보기도 하는데 나도 이에 공감한다. 이 나무가 있는 도로의 명칭은 석주로(石洲路)인데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을 기리는 명칭이다. 석주 선생은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서른여덟의 나이로 구국 의병 활동을 하였고, 경술년에 나라를 잃자 쉰셋의 나이 친인척 50여 가구를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4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설립, 독판(督辦)으로 취임하고 부설 신흥무관학교를 열었다. 1925년 9월 상해 임시정부의 개정헌법에 따라 석주는 초대 국무령(국가원수)에 선출되었다. 이후 남북 만주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을 시도하다 1932년 75세를 일기로 길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하였다. 이 석주 선생이 태어난 곳이 임청각인데 잘려진 회화나무는 임청각 큰대문 앞에 있던 나무였다고 한다. 옛 사진을 보면 나무와 임청각 사이에 몇몇 초가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집들도 임청각에 속한 집들일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일제 말 중앙선을 내면서 의도적으로 석주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 아래채로 철길을 내었다고 한다. 그 철길로 인해 이 회화나무는 중앙선을 사이에 두고 임청각과 분리되었다. 말하자면 이 나무는 독립운동가 석주 선생의 생가가 일제에 의해 유린된 역사적 증거인 셈이다.

 >>왼쪽 철로 건너편에 석주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이 있다.


과연 누가 이 나무를 절단했을까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newsis 피재윤 기자의 기사에 의하면 안동경찰서는 이 나무가 새벽 3시 경에 누군가에 의해 잘려나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경찰은 잘려나간 회화나무에서 기계톱에 의해 절단된 흔적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목격자 등을 토대로 탐문수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 누가 잘랐을까 짐작을 해보기도 했다. 이 나무가 잘려진다고 해서 특별히 가시적 이익을 볼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먼저 그 나무 때문에 액운이 생긴다고 믿거나 그 나무에 대해 피해망상을 가진 사람, 미신에 극단적인 적개심을 가진 광신도를 의심해보기도 했다. 친구들끼리 나무를 베어도 죽는지 죽지 않는지 내기를 한 젊은이의 치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다. 설마 과거사를 지우고 싶은 친일파의 후손이나 1945년 이전의 역사를 현대사에서 지우고 싶은 세력이 한 짓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 시민들이 얹어놓은 꽃들

경찰이 좀 더 적극적으로 수사를 해줬으면 좋겠다. 안동시에서는 범인 검거에 결정적 제보를 하는 사람에 대한 현상금이라도 걸었으면 좋겠다. 나무에 얹혀진 꽃들에서 보듯이 많은 시민들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자리에 다시 회화나무를 심자는 의견도 있는데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꼭 나무를 다시 심지 않더라도 석주 선생의 독립 운동과 일제의 임청각 유린을 기억할 수 있는 예술적 조형물을 세우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단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비석을 세우는 것은 반대다. (봉정사 아래 명옥대 옆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용도 알 수 없는 큼지막한 비석을 세워 명옥대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킨 비석을 다시 이 자리에서 보고 싶지는 않다.)  잘려져나간 회화나무가 가지고 있던 역사적 의미를 복원시킬 수 있는 방안을 안동 사회가 진지하게 논의했으면 좋겠다. 이 기회에 중앙선에 가려진 임청각을 원래의 의미대로 맑은 물 가에 있을 수 있도록(臨淸流而賦詩,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중앙선을 우회시키는 방안도 공론화 되었으면 좋겠다.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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