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修巖) 류진(柳袗)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8-08-27 09:23

수암(修巖) 류진(柳袗)은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활약했던 유학자이자 교육자였다. 류진은 경세유학자(經世儒學者), 반양명학(反陽明學), 이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민족의 대재난인 임진왜란에서 국가를 구한 명재상을 길이 추앙받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세째 아들이다.

류진 역시 청렴한 목민관으로서 열화 같은 우국충정의 지사(志士) 교육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개결한 인품과 선정(善政)을 기념하기 위해 합천군민들이 합천군 황강(黃江) 기슭 함벽루(涵碧樓) 옆에 세운 만고인청비(萬古仁淸碑)가 지금도 그 자리에 전해오고 있다.

 >> 선생은 1629년 병산서원 존덕사에 배향되었다. ⓒ안동넷














본관이 풍산(豊山)인 류진은 선조 15년(1582) 아버지 류성룡의 임지인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을 제외하고 생애의 절반을 하회(河回)에서 보낸 그는 37세 때 일가 독립하여 상주의 가사리(佳士里)로 이거하였다. 이 곳은 팔공산의 물줄기가 북으로 흐르는 위강(渭江)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팔공산과 일월산, 속리산의 맥이 이곳에서 끊어져 풍수가에서 매화낙지(梅花落地)의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류진의 호 수암도 마을 앞산의 봉우리인 수암에서 연유한다. 류진의 어린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8세때 모친인 정경부인의 상을 당하자 그는 어린나이에도 여막을 떠나지 않고 두 형과 함께 거상하는 것이 어른 못지않았다고 연보에 기록돼있다.

류진은 10세 때 김치중(金致中)에게서 처음 글을 배웠다. 성품이 겸후단직(謙厚端直)하다는 평을 받은 그는 남달리 총명해서 웃사람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그는 16세 때 부친의 가르침에 따라 경암(敬庵) 노경임(盧景任)의 문인이 됐다. 노경임은 그의 백부 류운룡(柳雲龍)의 사위였다.

노경임의 문하에서 특히 사서(四書)를 철저히 깨져 학문의 기틀을 잡은 그는 2년 뒤에는 아버지인 류성룡을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류성룡은 때마침 북인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을 받아 하회에 낙향해 있었다. 그는 특히 중용(中庸)공부에 몰두하여 그 경의(敬義)를 깊이 깨달았다.

 >> 병산서원 존덕사 ⓒ안동넷















그의 연보를 보면 이 때 그는 아버지와 무릎을 맞대고 조선유학계에 중용연구로 이학(理學)의 거봉을 이룬 일두(一?), 정여창(鄭汝昌)의 이학이론 [氣以成形理亦賦焉 기이성형이역부언] 비판론을 토론하여 이기론(理氣論)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간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20세 미만에 벌써 중용장구(中庸章句)를 둘러싸고 전개된 주자와 정여창의 이론을 섭렵한 그는 49세 때에 부지암(不知巖)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수일간 묵으면서 삼개조의 문목(問目)을 올려 학문을 강마했다.

류진의 학적계보는 노경임과 류서애, 장현광의 세 사람을 징검다리로 하여 퇴계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류진은 한편으로 34세 때에는 국담(菊潭)으로 창석(蒼石), 이준(李埈)을 찾기도 했고 사수(泗水)에서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만나 학문을 묻기도 했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월간(月澗) 이전(李전), 사서(沙西) 김식(金湜)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22세에 향시급제 29세에 증광시, 성시(省試)에 연거푸 장원을 차지한 류진은 42세되던 인조원년에 봉화현감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봉화를 필두로 하여 일생동안 영주, 청도, 합천, 예천의 목민관을 역임한 그는 부임하는 곳마다 백성들의 질곡을 풀어주기에 앞섰다.

봉화현감 재직시에는 전무(田畝)의 제도를 시행하고 감세조치를 취해 농토와 군민이 크게 늘어났는데 인조가 이것을 알고는 표리(옷을 말함)를 내려 그를 표창했다. 합천의 목민관시절에는 영남사림의 종장인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위토가 무단 점탈당한 것을 되찾아 종손에게 돌려주기도 했다.

 수암선생문집(修巖先生文集) 목판, ⓒ유교넷제공



















그는 한편으로 흥학(興學)에 중점을 두어 오성(五性: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과 오륜을 밝히는 것을 학문의 근본으로 하는 그의 위학정신(僞學精神)을 임지해서 향민에게 교육하기에 부심했다.

류진은 남달리 강직했고 의를 보면 참지못하는 성품이었다. 그는 광해군 4년 김직재(金直哉) 무옥사건에 무고로 연류되어 목에 칼을 쓰고 포박을 당한채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중죄인의 신세가 되었으나 언동(言動)이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는 인조 4년에 형조정랑이 되었을 때에는 묵은 원옥(?獄)을 시시비비를 가려 명쾌히 판결하니 형조판서가 “공이 아니면 이 옥사를 그르칠 뻔 했다고” 하여 그의 강직함을 칭송했다.

시시비비가 분명했던 그는 그의 정론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인조 12년 그가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에 때마침 강학년(姜鶴年)의 상소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장령으로 있던 강학년이 피폐한 민력(民力), 인심(人心)의이산(離散), 도적의 봉기, 기강의 문란 등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소를 올리면서 인조가 천의(天意)에 반역하고 정사에 덕을 잃고 숭례(崇禮)를 지키지 않은 점을 질책한 사건이다.

류진은 이 사건이 터지자 강학년을 극형에 처하라는 조정대신들의 벌떼같은 주장에 맞서 홀로 강학년이 언관으로서 군왕에게 직언하여 직책에 따르는 책임을 다한 점을 들어 강학년을 극구 옹호했다. 이때에 그가 급환으로 세상을 버리니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사관은 응천일록(凝川日錄)에서 [전 지평 류진은 영남선비들이 추앙하던 바였는데 과감하게 말하다가 시론(時論)에 배척당하고 갑자기 명(命)을 마치니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그의 강직한 인품을 극구 칭송했다.

46세 때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류진은 향리인 상주에서 반청창의(反淸倡義)의 선봉장이 됐다. 정경세가 호소사(號召使)가 된 상주의 의병군은 류진을 의병장으로 초대하였다.

이 책은 도산서원이 소장하던 『수암집(修巖集)』이다. 류진(柳袗, 1582~1635)의 시문을 총 4권 2책으로 엮어서 1734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유교넷제공 
류진은 그의 성품에 걸맞게 대나무와 연꽃을 사랑했다. 그의 정전고죽기(庭前枯竹記)와 분지연기(盆地蓮記)를 지어 풍우(風雨)에 굴하지 않고 곧음을 자랑하는 그 절조를 찬양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내적인 정신세계의 한 표현이기도 했다.

류진은 많은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그의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관찰력을 보여주는 몇 편의 수작(秀作)을 남기고 있다. 그 중의 한 편인 임진록(壬辰錄)은 국문학 사상 자조적(自照的) 수기문학의 백미(白眉)로서 높이 평가될 만한 귀중한 국문학 유산으로 꼽히고 있다.

류진이 11세때 임진왜란을 당해 매형 이문영(李文英)을 따라 경기도와 강원도로 피난다니면서 경험한 사실을 후일 한글로 당당하게 기록한 임진록은 문학적 가치외에도 당시 관리의 부패상과 왜적의 잔학상, 왜적과 결탁한 도적들의 실상을 여실히 묘사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살피는데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김직재의 무옥에 연류되어 경옥(京獄)에 유치된 때의 전말을 일기체로 기록한 임자록(한글로 기록)한국 두견새에 관해 동물학적 견해를 밝힌 두견설, 상례제설(喪禮諸說), 사례집략(四禮輯略), 격치설(格致說), 자경설(自警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54세 되던 해에 영주 구학사(龜鶴寺)에서 급서(急逝)한 그에게 조정에서는 좌승지와 이조참판을 연이어 증직했으며 현종 3년에는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종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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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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