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花山) 권주(權柱)
선생의 휘는 柱(주)요 자는 支卿(지경)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할아버지 휘는 恒(항)이니 司藝(사예: 정 4품직)로서 이조참의로 증직을 되었고 아버지의 휘는 邇(이)니 署令(서령: 종 5품직)으로 증 吏曹參判(이조참판)이다. 모친은 덕산송씨니 정랑 元昌(원창)의 따님이다.
![]() |
병곡종택(안동시습제), ⓒ유교넷제공 |
세조 丁丑(정축:1457)년에 선생이 나시니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고 총명했으며 특히 기억력의 뛰어남이 남들과 달랐다. 7, 8세에 이미 四書(사서)를 읽고 이미 10세에 경사에 밝았다. 13세에 시를 지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마침 감사가 순시차 안동부에 이르러서 백일장을 베풀어서 선비들을 시험할 때 선생의 작문이 장원을 하였는데 “내가 仙嶽圖(선악도)를 그려서 上帝(상제: 옥황상제)가 天機(천기)를 울림을 왕에게 올리고 싶다”고 말을 하니 감사가 크게 놀랐으며 앞에 놓인 앵도반을 손가락질하며 운자를 불러 시험해 보니 선생이 운자를 부르는 즉시 지체 없이 대답했다. 자라면서 행동함이 깨끗하고 강직했으며 남다른 기품이 있어 감히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문장과 글씨가 또 정교해서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성종 甲午(갑오:1474)년에 태학관에 들어가서 上舍生(상사생)이 되었다가 戊戌(무술:1478)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내려와 삼년상을 마치고 성균관에서 유학할 때 秋江(추강) 南孝溫(남효온) 中和(중화) 姜應貞(강응정) 潭庵(담암) 金用石(김용석)과 더불어 朱文公(주문공)의 옛일을 모방하여 鄕約(향약)을 짓고 매월 초하루에 小學(소학)을 강하였으니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하는 선비였다.
![]() |
권주종손가소장문적(權柱宗孫家所藏文籍) 보물 제1002호, 권주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편지글『경수첩』, 『선세수찰』등 총 5종 7책이 있다. ⓒ 문화재청제공 |
세상에서 배우기를 즐겨하지 않는 자들이 시끄럽게 하여도 동요되지 않았으며 또 錦南(금남) 崔溥(최부) 迂拙(우졸) 朴漢柱(박한주)와 서로 교분이 좋았으며 일찍이 同房錄(동방록) 서문을 지었는데 교제를 잘하고 신의가 돈독하고 마음이 같고 뜻이 같다는 뜻이 있어서 서울 사람들이 서로 전해 가면서 외우기까지 하였다.
辛丑(신축:1481)년에 친시 갑과 2등에 올라 己酉(기유:1489)년에 持平(지평)으로 임명되고 庚戌(경술:1490)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했으며 壬子(임자:1492)년에 상을 마치고 홍문관 부응교로 임명 되었다. 癸丑(계축:1493)년에 漢語質正官(한어질정관)으로 요동에 갔다가 甲寅(갑인:1494)년에 섬 오랑캐로서 우리나라에 있는 자가 우리나라 백성과 작은 이익으로서 다투니 장차 변방의 혼란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곧 도주에게 下諭(하유)를 보내야할 것인데 그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사신을 뽑아서 보내기가 어려워 왕이 하교하시되 “반드시 문신에서 학식과 아량이 있으며 국가의 대세를 아는 자를 보내라” 하시니 조정에서 선생을 지목 하였다. 書啓(서계)를 가지고 가서 諭示(유시)하여 무사히 돌아와서 응교에 승진하였다.
![]() |
화산신도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이현일이 글을 짓고, 이유의 글씨로 새겨놓았다. ⓒ문화재청 제공 |
이해 겨울에 성종이 승하하자 선생이 諡冊(시책)을 지어 올렸고 丁巳(정사:1497)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先朝(선조)가 사람을 얻은 방책을 이어서 여러 현인들을 모두 같은 도로써 벗하였으며 도승지 李世英(이세영) 우승지 崔漢源(최한원) 우부승지 金?(김봉) 좌부승지 李蓀(이손) 동부승지 安潤德(안윤덕)과 함께 명망이 높았다.
얼마 후 도승지로 승진하고 8월에 가선대부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교서에 이르기를 “권주는 품성이 단아하고 처사가 정민하며, 문장에는 뛰어난 재주가 있고 정치에는 뛰어난 재능이 있다. 간쟁에 처하면 정직한 기품이 있고 언변에 있어서는 논리가 정연하여 마음을 바꾸도록 한 獻言(헌언)이 있었고 승지로 있으면서 왕명을 오래도록 맡았다. 일처리에 있어서는 典故(전고)에 특히 밝아서 출납에 진실로 능하다. 이에 近密(근밀: 군주에 가까이 할 수 있는 곳)을 중지하고 평치할 뜻을 펴게 하노라” 하였고 그 뒤에 大司憲(대사헌) 吏曹(이조), 禮曹參判(예조참판)을 연이어 역임하였고 도총부 총관을 거쳐서 壬戌(임술:1502)년에 同知中樞府事(동지중추부사)가 되어 하정사로 연경에 갔다가 癸亥(계해:1503)년에는 경상감사에 임명되어 정사를 함에 항상 백성을 먼저 생각하였다.
안동에 순시할 때 士民(사민)들이 南鄕子(남향자) 한 폭을 써서 올렸으니 그 말에 벼슬하는 이들이 말하기를 “여러 동류에 으뜸가서 일찍이 왕의 문에 출입했네. 국내외에 명성이 돋아 벼슬아치가 모두 놀라고 다시 南州(남주)의 安廉使(안렴사)가 되었음에 우리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리다” 라고 하였다.
甲子(갑자:1504)년에 연산군이 장차 폐비윤씨의 사당을 세우려 백관에게 의론할 때 조정에 있는 여러 문신들이 모두 성종의 옛 신하인지라 이미 폐출된 뒤라 다시 추숭을 논의함은 선왕의 뜻이 아니라 하여 그 불가함을 자세히 말하였다. 이때에 왕후의 아우 愼守英(신수영)이란 자가 은총을 받으면서 用事(용사: 군주와 가까이 있어 제 마음대로 정치함을 이름)하면서 부정하는 까닭에 士類(사류)들이 모두 미워하더니 이 일로 인해 음모하는 계획으로써 先朝(선조: 성종)를 섬기던 자들은 거의 주살을 당하였다.
선생도 평해로 귀양을 갔다가 이내 사약을 받고 운명하였으니 乙丑(을축:1505)년 6월18일이다. 향년 49세이며 가일마을에 안장하였다. 부인의 묘는 묘전에 부장하였으며, 丙寅(병인:1506)년 의정부 右參贊兼兩館大提學(우참찬겸양관대제학)의 증직이 내렸다.
* 신수영: 본관은 거창 承善(승선)의 아들이며 여동생이 연산군 비가 되었다.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나 중종반정에 형 守勤(수근) 아우 守謙(수겸)과 함께 피살되었음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 안동넷 & pressteam.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