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그 후 '김상헌 따라가기'

person 김종규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8-07-31 10:34

올해 이 땅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소설은 아무래도 김훈의 남한산성이 아닐까 싶다. 소설 속에서도 말들이 많더니만 소설 밖에서도 이 소설을 두고 읽은 이들의 말들이 많았다. 연말의 각종 문학지에 이 소설에 대한 평론들이 많이 실렸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일반 독자들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에게도 주목을 받은 소설인 모양이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소설로 인해 역사 인물 한 사람의 복권이 이루어졌다. 병자호란 당시의 주화파 최명길이다. 최명길은 나약한 지식인, 좀 더 나쁘게 말하면 비겁한 벼슬아치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다가, 이 소설을 통해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책임감 있는 선비로 다시 태어났다. 읽은 이들은 소설 속의 최명길을 통해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들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약간의 편법을 동원해 세금을 줄인 것도, 자식 교육을 위해 위장 전입을 한 것도 가족의 미래를 위한 '합리적' 선택이었음을 인정받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졌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이 책을 두고 말들이 많았던 것은 아닐지.

반면 이 소설을 통해 가장 손해를 본 역사 인물은 아무래도 주전파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다. 이 소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절개의 화신으로 평가받던 김상헌은 이 소설을 통해 대책없는 원칙주의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해진 듯하다. 작가 김훈도 김상헌의 진정성은 인정한 것 같지만 절개를 지킨 강직한 선비로서의 모습은 퇴색한 것이 사실이다. 모두가 죽기로 싸우면 성 안에 있던 사람들(임금을 포함해서)은 죽겠지만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이 나라는 유지될 것이라는 김상헌의 주장을 읽으면서 그의 대책이 제대로 된 대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는 무관하게 강직한 역사 인물 한 사람을 잃게 된 안동 촌놈은 서운한 마음이 앞선다. 더군다나 그 인물이 안동 출신임에랴. 그리하여 안동 촌놈은 김상헌의 뒤를 따라 그의 고향 마을을 방문하면서 조금의 위안을 삼고자 한다. 

우연한 기회에 김상헌의 고향 마을을 알게 되었다. 그 마을 앞을 몇 번이나 지나다니면서도, 그 마을과 김상헌과의 관계를 알지 못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김상헌의 고향 마을임을 알게 되었다.  하회마을 가는 길에 2분 정도의 시간만 할애하면 최소한 김상헌의 시비 앞에서 사진 한 장은 찍을 수 있다. 풍산읍 삼거리에서 하회마을쪽으로 가면 처음 나타나는 마을이 풍산 한지 공장이 있는 마을이고 바로 그 다음 마을이 김상헌의 고향마을인 소산리다. 도로에서 마을로 우회전을 하면 바로 소공원이 나온다. 그 앞에 차를 세우고 오른쪽을 보면 10미터 정도 거리에 김상헌의 시비가 있다. 이 시비를 보면 누구나 '아, 이 시조!' 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동안에 이 시조를 떠올리지 못한 자신의 두뇌 활동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 김상헌의 시비 (시비 뒷쪽은 하회마을 가는 도로)




죽고자 하면 산다고 했던가?  ‘올동말동 하여라’라고 비장한 시조를 읊고 청나라로 끌려갔지만 김상헌은 3년만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돌아와서도 김상헌은 꼬장꼬장한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고향 마을에 누각을 중건하는데 그 누각 이름을 청원루(淸遠樓)라고 지었다.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이란다. 이 소식을 들었다면 청나라 황제가 김상헌을 돌려보낸 것을 땅을 치며 후회했을 것이다. 청원루는 원래 김상헌의 증조부인 안동김씨 장동파 파조 김번(1479~1544)이 지은 살림집이었는데 1643년(인조 21년) 김상헌이 3년간의 인질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이 건물을 누각식으로 중건하면서 이름을 청원루라고 했다. 이 곳에서 김상헌은 그의 손자들을 가르치는데 이 손자들이 중앙 정계에서 출세를 해 후일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뿌리가 된다. 우국충정의 열매가 세도정치로 이어지는 역설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 청원루, 마당에도 김상헌의 시비가 있다.

김상헌의 꼬장꼬장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산(素山)리의 옛 지명은 금산촌(金山村)으로 우리말로는 쇠미마로 불렀는데 쇠붙이인 ‘쇠’와, 산이란 의미의 ‘미=뫼’ 그리고 마을이란 의미의 ‘마’가 합쳐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김상헌은 김씨의 집성촌인 이 마을의 이름을 금산촌이라고 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느낌이 든다고 검소하고 소박한 이름인 소산(素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좌우지간 안동 선비의 대표라 할 만한 사람이다.
 
이런 김상헌이지만 김상헌을 기리는 서원을 세우는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웬만한 사람은 다 서원에서 모셔지는 분위기였지만 김상헌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그가 서인-노론이 내세우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안동의 유림들은 대부분 남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안동 인근의 모든 선비가 남인 계열은 아니었다. 영조 14년에 안동의 일부 노론계 인물, 문중들을 주축으로 김상헌을 모시는 서원을 건립하였는데 안동의 유림들이 이 건물을 무너뜨렸다. 안동의 유림들은 이 지역에서 노론의 세를 확대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 파악했다고 한다. 이 문제는 결국 중앙 정가로까지 확대되었는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서인 계열이었지만 안동의 유림을 대접해줘서 벌은 면해줘야 한다고 주장한 모양이다. 결국 영조는 서원을 짓지 못하게 했는데도 강행한 관리들을 문책하고 서원을 무너뜨린 안동의 선비들을 귀양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결국 김상헌의 서원은 세워지지 못했다.

 >> 마을에 있는 또다른 시비. 시비의 주인공 김영은 김상헌의 종증조부. 

이 마을 인물 중 유명한 사람이 또 있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이라고 알려진 보백당 김계행이 이 마을 출신이다. 안동에서 사진을 찍는 분들이 좋아하는 정자 중의 한 곳이 길안면에 있는 만휴당인데 이 만휴당을 지은 사람이 보백당 김계행이다. 그는 연산군 치하가 되자 벼슬을 버리고 길안면 묵계리에 은둔했다고 한다. 만휴당에 보면 이런 현판이 있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우리집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은 오직 청백 뿐이다.) 청백리가 어떻게 정자를 지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긴 하지만 최소한 뇌물을 받거나 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 후손들은 가까운 문중인 안동김씨 장동파가 조선말 세도정치로 득세를 할 때도 그 세도에 빌붙지 않고 벽촌에서 꿋꿋하게 살았다고 한다. (보백당 김계행에 대해서는 아래 '강추'된 '이 풍진 세상에'에 잘 소개되어 있다(http://blog.ohmynews.com/q9447/185208).
 
마을 앞 언덕에 보면 삼구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정자 내에 거북이의 모양을 한 커다란 돌이 3개가 있어 삼구(三龜)라 했다고 한다. 1495년 김영수가 영천군수를 마치고 소산에 머무를 때, 그의 형인 김영전, 김영추와 더불어 87세의 노모를 위하여 세웠던 정자로 자기의 어머니는 거북처럼 장수하고 건강은 돌처럼 단단해지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효행도 어지간한 마을이다.





이 마을의 특징 중 한 가지가 분명 안동김씨 집성촌인데 서로 다른 뿌리의 두 안동 김씨 문중이 있는 동네라는 것이다. 안동김씨는 같은 본을 쓰면서도 뿌리가 다른 두 개의 유력한 갈래가 있다. 한 갈래는 경주김씨 계열의 안동김씨로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은열의 둘째 아들 숙승을 시조로하는 김씨로 '선김' 혹은 ‘구김’으로 부른다. 다른 한 갈래는 '후김' 또는 '신김'으로 불리는데 고려 개국공신 대광태사 김선평을 시조로 한다.
 
'선김=구김'의 중시조는 고려 원종 때의 시중이자 상락군에 봉해진 충렬공 김방경인데 ‘선김=구김’은 이 상락군을 파조로 하는 충렬공파가 가장 번성하였으며 그 후손 중 일부가 소산 마을에 세거하고 있다.
'후김=신김‘의 정착 과정은 시조 김선평의 9세손 되는 김삼근이 비안 현감에서 물러난 뒤 이곳 소산에 정착해 그 후손을 비안공파라 부른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은 김삼근의 둘째 아들이다. 김삼근의 큰 아들 계권(係權)의 막내인 영수(永銖)의 첫째인 영(瑛)의 후손이 소산파, 둘째 번의 후손이 장동(壯洞)파로 분류된다. 장동파는 김상헌대에 명문으로 떠올라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주인공으로 군림했다.
 
이 마을의 삼소재(三素齋)는 ‘선김=구김’인 김용추(金用秋)가 처가 진성이씨의 재력으로 1674년경에 건축하였다 전하는 집이다. 삼소재란 이름은는 김용추의 5대 손인 김종락의 아호이다.삼소라는 뜻은 소리(素履)를 행하고(行素履), 소찬(素餐)을 먹고(食素餐), 소산(素山)에 산다(居素山)는 것이다. 양소당은 ‘신김=후김’김씨의 종택이다.

 >> '선김=구김'의 종택 삼소재 

 >> '신김=후김'의 종택 양소당

청에 대항해 끝까지 싸우자던 김상헌 이후 안동김씨 장동파는 명문이 되고 이는 세도정치로 이어져 조선 말기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세력이 되어버렸다. 우국충정의 열매가 세도정치라니. 김상헌은 예상이나 했을까? 그래도 이 마을에서만큼은 그 정신이 남아 일제시대 풍서농민회 사무실이 이 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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