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옥(景玉) 이보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7-06-27 10:10

경옥 이보의 본관은 진보, 자는 信古(신고), 호는 景玉이다. 현재 행정 구역상 안동시 예안면 구룡리 양옥에 거주하다가 만년에 거처를 임동 대곡으로 옮겨서 살았다.  부친은 진사ㆍ사마시에 합격을 하고 태학에 유학을 했으며, 글재주와 행실로 칭송을 받았다.

모친 인동 장씨는 忠義衛(충의위)를 지낸 友程의 따님이다. 경옥은 10세에 부친을 여의게 되었다. 모친 장씨는 학덕을 갖춘 분으로 자녀 교육에 남다른 열성을 보여 엄정한 교육 과정으로 자녀의 초학 교육에 힘쓴 결과 경옥은 유년 시절에는 특별하게 스승에게서 학문을 익히지 않았다.

이렇게 유년기를 거친 그는 일찍이 퇴계의 학문을 가학으로 계승한 재종숙부 開谷(개곡) 李爾松(이이송 1598 ~ 1665)에게서 본격적인 학문을 익혔다. 이이송은 그의 문예가 특출함을 보고는 ‘집안을 일으킬 인물’이라며 칭송하였으며 약관에 이르러서 개곡의 외숙인 鶴沙(학사) 金應祖(김응조, 1587 ~ 1667)에게 유학하여 학문을 익혔다.

경옥은 1676년(47세)에 급제를 하게 되었는데, 과거 응시자들의 난동으로 인하여 과장이 난장판이 되고 급기야 과거가 취소되었다.  이후로 그는 과거를 단념하게 되었다. 이내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691년(63세)에 사옹원참봉에 제수되어 잠시 부임했다가 이내 귀향했다.

당시 재상들이 그의 품계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육품으로 올려졌지만 그는 귀향을 결심하였다. 그러자 서울의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은 극구 만류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뒤, 贊成(찬성) 權欽(권흠)이 그에게 서찰을 보내어 상경하기를 재촉했지만 그는 끝내 거부하고 말았다.

만년에는 大谷山에 초옥을 짓고 산 이름에 의거하여 스스로 ‘景玉山人(경옥산인)’이라 하였으며, 金邦杰(김방걸)ㆍ金泰基(김태기)ㆍ李惟樟(이유장)ㆍ柳挺輝(류정휘) 등과 從遊(종유)하였다. 이밖에도 여러 인사들과 함께 노인회를 조직하여 산수를 유람하며 시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이 때 남긴 시를 모은 것으로, 「孤雲寺契帖(고운사계첩)」과「岐山寺契帖(기산사계첩)」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문집에서는 이러한 시들이 확인되지 않는다.

景玉은 애당초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63세 때에 司饔院參奉(사옹원참봉)에 제수되어 잠시 부임했다가 이내 귀향하여 82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시종 향리 생활로 일관하였다. 그가 굳이 향리 생활을 하고자 했던 의도가 다음 기록을 보면 극명히 드러남을 파악할 수 있다.

일찍이 陵官(릉관)에 추천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이어 사옹원에 제수되자 잠시 나갔다가 여행 삼아 돌아왔으니 어찌 선생께서 당세에 관심 없던 사람이라 할 것인가. 다만 스스로 좋아하는 바가 있었을 뿐이다. 만약 그를 끌어 일을 하게 해 육체를 활동하게 했다면 위로는 辭令(사령)을 짓고 임금의 정책을 도왔을 것이며 아래로는 탁한 이를 감격케 하고 맑은 이를 드러내 世敎(세교)를 붙들었을 것이나 막히어 쓰여지지 못해, 궁한 골목에 남다른 기상이 감춰지고 거친 들판에 원대한 뜻이 버려진 채, 즐겨 경옥산인으로 살다 몸을 마쳤으니 명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공은 이로써 마음에 걸려하는 바가 없었으며  그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위해 쉽게 출사를 거부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山水自樂(산수자락)과 다름 아니다. 이는 곧 그가 향리에서 소요음영하며, 성현의 유훈을 체득하여 심성수양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내심의 발동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의지는 다음「경옥산장기」에 잘 드러나 있다. 내 평생 농사는 배우지 못했으며 또 생계 계책은 어두웠다. 때문에 집은 늘상 끼니를 잇지 못해 수십 이랑의 땅을 사서 자급하려 하였으나 쌀자루를 채우지 못해 부끄러웠다.

黑鼠(흑서)(壬子, 1672)년 봄에 임하현 계곡리에 우거하였는데 골짜기 사람 중 최씨 성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밭을 팔려고 하였으나 땅이 척박하여 팔리지 않았다 내가 마침내 재화를 기울여 소유하게 되었다. 밭은 산 위에 있어 추위가 일찍 찾아오고 바람이 많았다. 토양은 적색인지라 수해나 한해에 견디기 어려웠다. 해마다 거두어들이는 양은 5말 정도였는데 종 한 명을 보내어 살게 해 농사일을 맡게 하였다. 내가 틈을 내어 수확한 것을 살펴보러 간 것이 네 차례였는데, 아래쪽의 경사진 곳은 끊어질 듯 가파르고 위쪽 끝은 평평하였다. 앞쪽은 한 길이 나있어 왕래가 가능하였다.

옛적 마을 유지에는 부엌 연돌이며 우물 구멍이 의연하여 구별할 수 있었고, 복숭아ㆍ살구ㆍ대추ㆍ배ㆍ깨끔ㆍ앵두ㆍ추자ㆍ밤ㆍ오얏 등등에서도 어떤 것들은 묵은 그루터기에서 난 싹들이 드러난 채, 숨은 채로 있으며, 어떤 것들은 상처를 입은 채로 겨우 남아 있었다. 그 밖에 奇勝可觀處(기승가관처)는 없어 달리 풍치가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 내가 비로소 기뻐 얻은 바가 있어 그 산의 이름을 물으니 ‘경옥’이라 하였다.

시를 읊조릴 만 하여 마침내 산이름을 취하여 정자 이름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땅의 名勝(명승)으로 드러난 것은 대부분 崎嶇幽隱(기구유은)한 곳에 있다. 비록 險絶寥更(험절요경)ㆍ曠朗奇偉(광랑기위)의 경관이 있더라도 눈에 들 수 있는 경계가 다하기 쉬우니 눈에 들 수 있는 경계 밖의 것은 모두 나의 소유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산은 곧게 우뚝 솟은 흙 언덕일 뿐이지만 수 백리 안의 명산ㆍ대악을 모두 한 눈에 거두어들일 수 있고, 또 나의 흉중이 여덟ㆍ아홉 구름 꿈을 삼켜도 막힘이 없는 것 같으니, 崎嶇幽隱處(기구유은처)와 비교하더라도 어느 것이 더 낫겠는가. 

내가 이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학문을 하는 자에 비유하건대 처음에는 下學의 단계를 쫒다가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것과 같다. 비록 기이한 자취는 없더라도 세상을 놀라게 하고 사람을 감동시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昭曠之域(소광지역)에 홀로 이를 것이며, 온 천하의 만사ㆍ만물도 나의 헤아림 안에 있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인 즉, 마치 이 산의 차지한 형세가 높아 멀리까지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밭을 산 것으로 인해 이산의 승지를 깨달았고, 이 산의 승지로 인해 爲學之方(위학지방)을 깨달았다.

경옥은 이 글의 서두에서 「경옥산장」을 설치한 경위를 밝혔다. 그리고 이 산의 산세를 상세히 설명하고는 자신의 만년 휴양소로 삼게 된 연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 경옥산의 장점은 일단 등산을 하게 되면, 주위 안동 경내 명산이 한 눈에 들어오며, 소위 下學而上達(하학이상달)하는 원리를 체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경옥은 만년에 대곡선장에 전장을 설치, 자호를 ‘경옥산인’이라 하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게 된다.

晩年結屋大谷先庄 置山田數頃於景玉山上(만년결옥대곡선장 치산전수경어경옥산상)
因自號景玉山人  日?卷引壺(인자호경옥산인  일휴권인호)
蕭然老其中  間以竹杖籃輿(소연노기중  간이죽장람여)
尋壑經丘  村?野?(심학경구  촌수야수)
??爭席  蓋不知巖谷之窮寂(설합쟁석  개부지암곡지궁적)
而身世之蹇連也(이신세지건연야)

만년에 대곡산장에 띠집을 얽고 경옥산 위에 몇 이랑의 산전을 마련하고 인하여 경옥산인이라 자호하였다. 날마다 책을 끼고 술병을 가지고서 소연히 그 가운데서 늙으려고 했다. 간간히 대지팡이를 짚고 남여를 타고 구렁을 찾고 언덕을 지나니 시골의 늙은이들이 술통을 당겨 자리를 다투니 시골에 살면서도 신세가 궁박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경옥의 처사적 생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경옥산인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의 궁박한 신세를 탓하지 않고, 향리에서 이웃과 좋은 관계 속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따뜻한 인간애와 강적한 선비상을 구비했으며, 세상의 영욕에 대해 초탈했음을 다음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得者便欣欣  失者乃??(득자편흔흔  실자내척척)
及至?仰間  得失俱陳迹(급지면앙간  득실구진적)
可笑塞上翁  預料失與得(가소새상옹  예료실여득)
惟應達去人  得失都忘却(유응달거인  득실도망각)
얻은 자 기뻐하고
잃은 자 슬퍼하나
천지간에 부끄러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득실이란 모두 진부한 자취인 것을.
우습다. 변방 노인도
미리 알았도다. 득과 실이
응당 달도한 이에게는
일체 망각할 수 있는 것임을.

위의 시에서 경옥은 득과 실에서 비롯된 인간의 심사를 서술하고 나서 塞翁之馬(새옹지마)의 고사처럼 세상 득실이란 부질없는 것이므로 달관한 자만이 이 멍에를 초극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는 곧 그 자신의 정신 지향점이기도 하다. 만년을 이렇게 보낸 경옥은 1710년 82세의 일기로 처사의 생을 마감했다.

후인들의 기록에 의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정리해보면 우선 그의 성품이 매우 청렴했던 점을 들 수 있다. 그가 서울에 응시하러 갔을 때, 그의 응시 장소가 一所(일소)였는데, 二所(이소)의 掌試者(장시자)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떤 자가 은밀하게 그에게 二所로 옮겨 응시하도록 종용했으나 그는 끝내 따르지 않았었다. 또한 許積(허적)이 그의 명성을 듣고 자제를 시켜 패물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했지만 그는 결국 거부했다고 한다. 역시 그가 서울에 우거할 때 어떤 낭관이 부유한 고을의 수령이 얻는 봉록에 대해 말하자, 그는 몹시 언짢아하며 후일 자제들에게 재물과 권세에 대해 초연하길 가르쳤다. 

그는 가족과 이웃에게도 따뜻한 애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한 번은 장인이 빈궁하게 사는 그를 보고 집과 땅을 마련해 주려고 했지만 그는 마다하고 맏형과 한 집에 살기를 희망하여 거의 20년 동안 함께 살면서 늘 화목ㆍ우애하였다. 그리고 그는 경옥산으로 들어갈 즈음 땅과 노비들을 형제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이웃 사람들이나 친척 중의 불우한 사람들에게는 귀천을 막론하고 자애를 베풀었고 집안사람들에게는 노비들을 매로 다스리는 것을 엄금하고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기를 당부했다. 

아울러 그는 향리에서도 늘 모범적인 생활을 실천하였다. 각종 세금이 나오면 누구보다 먼저 납부했다고 한다. 한편 그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강인한 성격과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고 시속을 애통해 하는 유자적인 인간성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으며. 선비들이 본분을 망각하고 이단사설에 현혹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유학의 진흥과 지방 서당 교육의 활성화를 통해, 이 사회에 유교적 덕목을 구현시킬 것을 시종 역설하였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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