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배 생각(시집)
월요일 인편으로 한 권의 책을 받았는데 안동넷에서 보내온 안상학 시인의 ‘아배 생각’이라는 시집이었다. 안상학 이란 시인의 이름은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인사를 나눈 기억은 없다. 들춰보니 내 이름과 함께 시인의 서명이 있었다. 받는 사람의 이름과 함께 책을 보낸 성의를 보인 시인에게도, 그렇게 부탁했을 안동넷의 우이사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성의가 담긴 선물에는 성의로 보답해야 한다. 수요일 밤 시집을 다 읽었다.
밤늦게 성의 때문에 읽은 시집은 뜻밖의 소득이었다. 그래,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시인의 경향성 어쩌구 하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시가 내게로 왔다’는 표현이 이런 것이구나. 인간 안상학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아침에 그 이름과 얼굴을 어디서 본 듯한 기억을 되살렸다. 지인의 블로그에서 서예가, 한학자 형제, 시인, 약초 연구가, 화가, 사진작가 들이 모여 밤새워 술을 마신 사진을 보고 배가 아픈 일이 있는데 그 곳에 있었다. 취기가 오른 다른 이들과 달리 어벙한 표정으로 출연한 그 시인이다. 머지않아 대면하며 한잔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식
어매아배 무덤가에
약쑥 개쑥 뿌리 뽑으며
나도 모르게 끙끙대다가
문득 아배 생각
철도 들기 전 어느 늦봄 다랑논
아배는 모를 심으며
막판 힘에 부쳐 끙끙댔던가
나란히 모를 꽂던 반장댁 할매 옳다구나 싶어
쫘악하니 허리 퉁겨 젖히며
- 아, 여보소, 무신 큰 힘 쓴다꼬 그클 끙끙대긴 끙끙대노
그 말 날름 받아든 아배 짐짓 낮고 다급한 목소리로
-어허, 아 깬다마는
그 말 떨어지기 무섭게 두레꾼들
한바탕 배를 잡고 웃었다.
못줄 잡고 맞주 앉은 누이와 나는
벙벙한 눈만 마주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뜻 알만한 나이가 되어
약쑥 개쑥 뿌리 뽑으며 끙끙대다 문득 돌아보니
아배 어매는 태연하게도 내외하며 잠든 척하신다
그림과 이야기의 조화가 재미있다. 한식날 성묘를 간 시인이 무덤 가의 쑥을 뽑다가 힘들 때쯤 어릴 적 모내기 풍경을 떠올린다. 힘든 모내기에 아버지가 끙끙대자 이웃 할머니가 한마디 한다. 무슨 큰 힘을 쓴다고 그리 끙끙대냐고. 이 때 절묘한 반전이 일어난다. “어허, 아 깬다마는” 아버지의 끙끙거림은 힘든 모내기에서 야간 스포츠로 변신한다. 방이 모자라서, 혹은 추운 계절엔 땔감을 아끼느라 아이들과 같은 방에 자면서도 끊임없이 아이들을 생산해 핸드볼 팀도 만들고, 많으면 야구팀도 만들고, 심지어는 축구팀도 만들던 부모님 세대의 야간 스포츠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다. “어허, 아 깬다마는” 앞에 ‘낮고 다급한 목소리로’가 들어감으로 해서 한밤 자식의 눈을 피해 자식농사를 짓는 부부의 모습이 웃음과 함께 다가온다. 다음 반전이 압권이다. 부모님 무덤 가에서 끙끙거리며 쑥을 뽑던 시인이 부모님의 무덤을 돌아본다. ‘아배 어매는 태연하게도 내외하며 잠든 척하신다’ 밤일을 벌이다 자식의 깨는 기척에 번개같이 원위치한 부모님. 삶과 죽음이 한 자리에 있다.
2002년 북한에 갔을 때 안내원에게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어느 부부가 단칸방에서 밤농사를 지을 때마다 옆에서 자는 아들이 잠들었는지 성냥불을 켜서 확인하곤 했단다. 그러던 어느날 확인을 너무 오래 했는지 성냥이 다 타서 끝이 그만 아이의 얼굴에 떨어졌단다. “앗, 뜨거” 하며 벌떡 일어난 아이 왈 “씨, 내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 ”
아배 생각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야야, 어디 가노?
- 예...... 바람 좀 쐬려고요.
-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디?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그 때 그렇지 않은 젊음이 어디 있었겠냐만 시인도 젊은 시절 어지간히 밖으로 돈 모양이다. 밖으로 도는 자식을 이해하면서도 한마디씩 던지는 아배의 말씀이 촌철살인이다. 안상학 시인이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아버지의 유전자 혹은 훈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안동 숙맥 박종규
신문 지국을 하는 그와 칼국수 한 그릇 할 요량으로 약속 시간에 맞춰 국숫집 뒷방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터억하니 두 그릇 든든하게 시켜놓고 기다렸는데 금방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국수는 퉁퉁 불어 떡이 되도록 제사만 지내고 있는 내 꼴을 때마침 배달 다녀온 그 집 아들이 보고는 혹 누구누구를 만나러 오지 않았냐고 은근히 물어오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홀에 한번 나가보라고는 묘한 미소를 흘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마당을 지나 홀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아연하게도 낯익은 화상이 또한 국수를 두 그릇 앞에 두고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문장으로 되어있다. 박종규란 사람을 숙맥이라 소개하고는 시인 자신도 숙맥임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어쩐지 사진으로 볼 때부터 사람이 좀 어벙해 보이면서 속알머리는 있어도 주변머리는 없을 것 같더라니. 소개된 주인공에게도 관심이 간다. 언제 서예가 장종규 선생님과 함께 각성동명회(各姓同名會)라도 만들어 볼까나.
시를 즐겨 읽지는 않는다. 사춘기 시절 시작된 센티멘털에 대한 혐오가 그 시작인 듯하다. 읽은 시집이래야 다 합해서 열권이 되지 않을게다. 몇 구절이라도 기억하고 있는 시집이라면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정도다. 기억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시어나 문학성 때문이 아니라 스토리 텔링 때문이었다.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비슷한 나이의 시인들이라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기도 했다. ‘노동의 새벽’을 읽던 독자들 중 다수는 지금 중년의 지식 노동자가 되어, 피곤한 ‘노동의 저녁’에 마누라가 대신 돈 벌어주고 자신은 ‘이불을 꿰매며’ 사는 삶을 꿈꾼다. 잔치가 끝나고 설거지나 하던 시인이 ‘컴퓨터와 씹하고 싶다’고 선언한 후 이 땅의 남녀노소들은 매일 ‘컴퓨터와 씹하고’ 산다. 나는 예지력이 높은 시인의 몇 구절을 잘 기억하는 모양이다. 안상학 시인도 비슷한 연배다. 그래서 마음에 더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인의 시적 예지력으로 안동에 좀 더 많은 숙맥들이 모여들어 조금 더 숙맥같이 살아도 되는 세월이 오면 좋겠다.
예감대로 26일 어느 자라에서 시인을 만나 한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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