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헌법' 1조, 우리집은 골동품 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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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년된 선풍기 버튼이 여럿이지만 잃어버린 기능이 더 많다. 흰 얼룩 부분은 지금은 성년이 된 아이들이 어릴 적에 붙인 스티커 자국이다. ⓒ 장호철 |
한낮 날씨가 더워지면서 창고에서 선풍기를 꺼냈다. 선풍기는 모두 세 대다. 둘은 이태 전과 오륙 년 전에 각각 산 놈이니 아직 생생한 편이지만, 나머지 하나는 연륜이 만만찮다. 그게 언제쯤 산 건가, 가만 있자, 산 시기가 너무 까마득하다.
초임교인 경주 인근의 여학교에서 근무하던 때였다. 전세 120만원, 단칸방에서 3년을 살다 방 두 개에 입식부엌이 있던 양옥으로 옮기고 산 놈이니, 정확히 1987년에 산 것이다.
"맙소사, 아빠 21년이에요."
저녁을 먹으면서 고물 선풍기가 시원찮은데 버리나 마느냐며, 내외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얼마나 묵었냐'는 말에 대답을 했더니 딸애가 입을 딱 벌리고 보인 반응이다.
아내는 우리 집을 '골동품 공화국'이라 이른다. 그 수명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서 쓰는 가전제품은 그 나이가 만만찮은 까닭이다. 우리 집에서 가전제품이 10년을 훌쩍 넘기는 건 예삿일이다. 무슨 대단한 내핍생활을 해서도, 절약이나 물건 오래쓰기 같은 걸 의식해서도 아니다.
세월이 좋아서 가전제품이 고장이 나서 못 쓰는 경우는 드물 만큼 품질이 좋아졌고, 쓰는 데 지장이 없으니 내처 써 온 것일 뿐이다. 또 그렇게 오래도록 물건을 쓰면서도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탓도 있겠다. 좀 기능이 떨어지거나 낡아서 외관이 곱지 않은 것쯤에 무심한 탓이기도 하다.
이래 좋은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 내외가 '오래 쓰기'를 처음으로 의식한 것은 아내가 시집오면서 가져온 다리미를 버리면서였다. 울산에 있는 유명한 알루미늄 회사에서 만든 예의 다리미를 아내는 정확히 17년 동안 썼다. 그걸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버릴 때 그걸 쓴 세월을 헤아려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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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녀석을 버리게 된 것은 고장이 나서였던 듯하다. 낙심한 아내에게 나는 그 즈음 나오기 시작한 스팀다리미를 사라고 말했고, 아내는 5만 원이 조금 넘는 예의 물건을 할부로 사 왔던 것 같다. 저절로 스팀을 뿜어내는 그 신식(!) 다리미를 쓰면서 아내는 억울하다는 듯 그렇게 탄식했다.
"이래 좋은 세상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하기야 아내는 가사노동을 절감해 주는 전자제품의 혜택으로부터 좀 처진 사람이다. 위에서 말한 단칸방 시절에 아내는 연탄불로 밥을 지어 먹었다. 처음으로 가스레인지를 쓰게 된 게 입식부엌 집으로 옮기면서부터였으니 이는 전적으로 무심했던 내 탓이다. 가스레인지가 그렇게 고가의 물건도 아니었건만 그걸 마련해 달라고 왜 요구하지 않았나 했더니 아내는 그렇게 쥐어박았다.
"이 양반아, 그거 편한 줄 누가 모르우? 돈이 무서워서 그랬지."
가스레인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1994년 해직됐다가 복직해 경북 북부지역으로 옮기면서 산 3구 가스레인지는 지금 명이 경각에 달렸다. 나이로 치면 14살, 노쇠해질 때도 되었다. 한 구멍은 자동 점화가 안 되고 전체적으로 불길도 시원찮아 아내는 교체를 저울질하고 있는데, 이왕 바꾸는 건 좋은 걸로 하라고 했는데도 아내는 당분간 불편을 참을 모양이다.
구시대의 유물이 된 TV
식탁 옆에 커다랗게 놓인 전자레인지도 복직하던 해에 산 물건이다. 요즘 물건과는 달리 덩치도 큼직하고 특별히 디자인 개념이 적용되지 않은 듯한 고물이다. 이용 시간이 길지 않아선지 이 물건도 아직 생생하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스무 살을 채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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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쓰다가 아들 녀석의 방이 된 작은방에 놓은 14인치 텔레비전도 이 집으로 옮기던 해 산 것이니 11년째다. 11년째 된 것은 내 승용차도 마찬가지다. 아내는 당신 차를 바꾸어야 하는데, 하고 말꼬리를 늘어뜨리지만, 어차피 그건 일이백만 원으로 해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별한 탈이 없는 한, 승용차는 물론이고 나머지 것들도 우리 집에서 얌전히 나이를 먹으리라.
오래된 물건에 담긴 건 가족이 함께 건너온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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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쓰는 건 지장이 없는데…….'
품안이든, 집안이든 지니고 있는 물건을 버리는 건 반드시 쉽지만은 않은 법이다. 그것도 한두 해가 아니라 십수 년 세월을 같이한 물건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아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크고 작은 찜통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같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 장호철객원기자는 현재 안동여고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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