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왜 '고장말'을 잊지 못할까?
person 장호철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8-05-27 08:59
타관에서 제 고장말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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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의 무말랭이김치 '오그락지'. ⓒ 장호철 |
'골짠지'라고 들어 보셨는가. 골짠지는 안동과 예천 등 경상북도 북부지방에서 '무말랭이김치'를 이르는 말이다. '짠지'는 '무를 소금으로 짜게 절여 만든 김치'인데 여기서 '골'은 '속이 물크러져 상하다'는 의미를 가진 '곯다'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잘게 썰어서 말린 무는 곯아서 뒤틀리고 홀쭉해져 있으니 골짠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에선 아무도 그걸 골짠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 식구들은 골짠지 대신 '오그락지'라는 이름을 쓴다. 이는 내가 나고 자란 경상북도 남부지방 칠곡의 고장말인데, '골' 대신 '곯아서 오그라졌다'는 의미의 '오그락'이라는 시늉말을 붙인 것이다.
남의 고장말과 내 고장말이라는 것 말고 두 낱말의 차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아내는 물론 아이들마저 짐짓 골짠지 대신 '오그락지'를 쓰는 것이다. 아내는 나와 동향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안동에 들어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을 넘긴 아이들마저 '골짠지'대신 '오그락지'를 굳이 쓰는 까닭은 무엇인지….
@BRI@때로 말은 한 인간의 정체성의 표지일 수도 있는 듯하다. 외국어에 대응하는 모국어의 의미가 그렇듯이 자기 고장말에 대한 애착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변수의 하나다. 자기 고장을 떠나 타관에 정착해 살게 되면 누구나 거기 말을 받아들이고 살 수밖에 없다. 토박이를 비롯한 다수의 틈에 끼어 부대끼며 사는 게 마이너리티의 생존 전략이라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힘의 우열이 두드러지지 않는 고장 사이의 고장말 수용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처에 나간 시골 사람과 달리, 그만그만한 고장에서 수평이동한 이들은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자기 고장말을 쉽게 버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안동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전적으로 여기에 있는 듯싶다.
시나브로 아내와 나는 무의식중에 안동 특유의 고장말을 쓴다. '~니껴' 형의 안동말이 주는 인상은 강하다. '아이라예(아닙니다)' 식의 애교 섞인 경북 남부의 고장말에 비기면 안동말은 불친절하고 다소 시비조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산 지 햇수로 10년, 아내와 나는 가끔씩 이곳 토박이처럼 안동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게 되는데 그러면 아이들은 아주 질색을 한다.
딸애는 내 고향 칠곡에서 태어났고, 경주 근처에서 4년, 다시 칠곡 쪽으로 와서 5년, 예천에 와서 4년여를 살았는데, 중학 3학년 때 안동으로 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여기서 다녔다. 가장 오래 산 땅으로 치면 안동이지만, 딸애는 아비 고향을 자기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아들 녀석은 태어난 곳은 대구의 산부인과 병원이지만, 역시 경주에서 자라다 칠곡, 예천을 거쳐 안동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0년도 넘게 안동에 살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이 고장말을 거의 쓰지 않는 이들을 나는 여럿 알고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할 터이고 여기 묻힐 이들인데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이 고장말을 쓰지 않는 그들의 마음이나 여기서 만난 동무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굳이 '골짠지'를 '오그락지'라고 쓰는 내 아이들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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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고장말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무의식적인 자기 정체성 지키기일지도 모른다. 사진은 경북 영주 문수면 무섬의 외나무다리. ⓒ 장호철 |
딸애는 내 고향 칠곡에서 태어났고, 경주 근처에서 4년, 다시 칠곡 쪽으로 와서 5년, 예천에 와서 4년여를 살았는데, 중학 3학년 때 안동으로 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여기서 다녔다. 가장 오래 산 땅으로 치면 안동이지만, 딸애는 아비 고향을 자기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아들 녀석은 태어난 곳은 대구의 산부인과 병원이지만, 역시 경주에서 자라다 칠곡, 예천을 거쳐 안동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따로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들 녀석도 칠곡을 자기 고향으로 여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얼마 전 특박을 나와서 그 애는 제가 즐겨 먹는 반찬이라며 '오그락지'를 맛나게 먹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어버이를 따라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닌 게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그런 뜻에서 새로운 고장말을 애써 익히거나 쓰지 않는 것은 제 나름의 자기 정체성을 방어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오그락지'를 씹으며, 고향을 떠올리다
어떤 고장에서 그 울타리 바깥사람들을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배척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이 아니라면, 그 고장에 '들어온 바깥사람들'이 스스로를 울타리 안 사람들과 달리 자리매김하는 것을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지역에서 살아왔다는 것은 단순한 지리적·물리적 공간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과 체험, 가치관과 태도, 사물에 대한 이해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복합적인 개념인 까닭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장말에 대한 태도는 자신을 성장케 한 고장, 즉 자기 고향과 그 문화에 대한 자기 정체성(正體性, Identity)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마음처럼, 말도 스스로 여미고 다듬어가는, 훌륭한 자기 정체성의 표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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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는 그릇에 따라 음식의 인상은 달라지기도 하는 것일까. 접시에 담긴 오그락지. ⓒ 장호철 |
20년도 넘게 안동에 살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이 고장말을 거의 쓰지 않는 이들을 나는 여럿 알고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할 터이고 여기 묻힐 이들인데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이 고장말을 쓰지 않는 그들의 마음이나 여기서 만난 동무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굳이 '골짠지'를 '오그락지'라고 쓰는 내 아이들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맛있는 무를 얇게 썰어 잘 말린 뒤에 갖은 양념을 버무려 숙성시킨 오그락지도 세월을 따라 진화했다. 빨갛게 양념을 먹어 부드러워진 무말랭이를 씹을 때 나는 상쾌한 소리와 담박한 맛에서, 오그락지는 김치와는 다른 각별한 맛을 선사한다.
요즘 우리집은 오그락지에 마른 오징어를 찢어 넣는다. 숙성된 시간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달라지는 그 오징어포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나는, 인근의 국가공업단지의 팽창에 힘입어 지난 해 10월 '읍'으로 승격한, 떠나온 고향을 가끔 떠올린다.
'사투리'가 아니라 '고장말'이다
흔히 고장말은 대체로 '사투리'나 '방언'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내가 '사투리' 대신 '고장말'을 쓰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한겨레신문의 고정 우리말글 관련 꼭지인 '말글찻집'과 '고장말 탐험'을 빼놓지 않고 읽게 되면서부터다.
'사투리'가 아니라 '고장말'이다
흔히 고장말은 대체로 '사투리'나 '방언'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내가 '사투리' 대신 '고장말'을 쓰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한겨레신문의 고정 우리말글 관련 꼭지인 '말글찻집'과 '고장말 탐험'을 빼놓지 않고 읽게 되면서부터다.
이 고정란을 꾸려가는 최인호 한겨레말글연구소장은 말에도 '주류-비주류'의 구분이 있다면서 표준어-사투리의 대립을 꼽고, 그 대립이 한쪽 말의 존폐를 돌아보게 만든다고 말한다.
주류인 표준말에 맞서 사투리는 꼼짝없이 비주류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현행의 표준어 규정에 비춰보면 표준어도 그 근본은 서울 방언, 즉 서울이라는 지역에서 쓰는 말, 즉 '고장말'이다.
따라서 '고장말'은 단순히 방언(方言)의 우리말 표현을 넘어선, 훨씬 가치중립적인 낱말이다. 방언에서 '방'이 '중앙'이나 '서울'과 대립되는 '지방', '변두리'라는 곁가지의 뜻을 털어낼 수 없는데 반해서 '고장'은 비교적 무색무취한 어휘인 것이다.
표준말에 대해 경상도 사투리(방언)보다 경상도 '고장말'이 전라도나 충청도 고장말처럼 그것 자체로 자족적이며 완결적인 뜻을 품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표준말 중심의 사고나 태도가 필경은 민족의 중요한 언어문화 유산인 고장말을 위축시키고 있는 이즈음에 독립적인 말글로서 고장말을 새롭게 이해하는 게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 장호철객원기자는 현재 안동여고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 장호철객원기자는 현재 안동여고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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