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좌왕 생존일기(5)-술집에서
여행의 맛 중 한 가지는 그 나라의 술집에서 한잔 하는 것이다. 도착하는 날은 너무 늦게 도착했고 다음날 밤은 일요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 부담 때문에 한잔하기 힘들다. 금요일 밤이 한잔 할 수 있는 마지막 밤이다. 호텔에 도착한 후 아내의 허락을 받고 호텔 인근의 술집으로 향했다.
손님은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 둘, 그리고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전부였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문을 받는 안주인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あなたの choice"라고 해서 알아서 달라는 뜻을 피력했다. 사실 외국에서 술집을 찾는 이유는 술 자체가 아니다. 술이야 호텔 방에서 마실 수도 있는데 굳이 술집을 찾는 이유는 그 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다. 그런데 이 집 분위기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손님 두 팀 모두 둘씩 앉아서 대화에 열심이고, 자리도 주인과 마주 앉는 자리가 아니라 홀에 떨어진 자리라 주인과 이야기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다. 손님이 많거나 아주 없는 다른 집을 갈 것을 그랬나 생각하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TV만 쳐다보고 있었다. 주요 해외 뉴스로 코소보 독립과 관련된 내용들이 나오는 것 같고, 프로 야구 스타와 인터뷰하는 내용이 나왔다. 안주는 고등어구이가 나왔는데 내가 좋아하는 고등어인데다 맛도 괜찮았다. 계산하면서 주인장에게 한마디 했다.
“しゃちょうさんの やきさかなが number one でした。
わたしの ははの りょりと おなじいです。”
사장님 생선구이가 넘버원이네요. 우리 어머님 요리 맛과 같아요.
사람 사는 세상은 다 같은 법. 요리하는 사람에게 이 정도 해주면 싫어할 사람은 없다. 안주인이 어디 사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어쩌면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입에서는 쉬운 단어로 구성된 대답이 벌써 나왔다.
“この ホテルが わたしの じゅうしょです。”
이 앞의 호텔이 제 주소지예요.
일단 호텔로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많이 아쉽다. 도쿄까지 와서 동네 술꾼이나 술집 주인과 대화 몇 마디 나눠보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것은 내 해외여행에 오점을 남기는 일이다. 눈치를 보아하니 두 50대 남자 술꾼 중 잘 생긴 아저씨는 내게 관심을 가지는 눈치였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라도 단골 술집에서 옆에 외국인이 앉으면 말을 걸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내 경험으로는 약간의 술이 들어가면 아무리 짧은 외국어라도 대강의 대화는 이루어진다. 급기야 아내를 꾀었다. 그 집 고등어구이 맛이 괜찮다고. 아내도 일본 술집에 호기심이 있던 터라 못 이기는 척하며 따라나섰다.
몇 시까지 하는지는 물어보고 다시 들어가는 것이 예의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시까지 영업을 하십니까? 이렇게 완전한 문장으로 묻지 않는다. 영업이란 일본어를 모르지만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
なのんじまで しますか?(몇 시까지 해요?)” 하며 문을 열고는 생선구이(고등어란 단어의 일본어는 모르니까) 맛이 좋아 아내에게 소개해서 다시 왔다고 어설픈 말로 아부를 하며 다시 들어섰다. 예상대로 잘 생긴 아저씨는 내가 다시 나타나자 반색을 하고 좋아한다. 그 아저씨와 같이 마시던 다른 아저씨는 술꾼 친구를 인계할 사람이 나타나자 얼른 자리를 뜨고.
일어와 영어 단어를 섞고, 과대한 몸짓을 더하며 그 아저씨, 주인장과 나눈 대화는 대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대만에서 왔느냐? 아니 한국에서 왔다. 일본은 몇 번째 여행이냐? 세 번째 여행인데 도쿄는 처음이다. 교토와 오사카를 두 번 갔다. 아내는 두 번째 여행인데 첫 번째 여행은 구마모토쪽에 갔었다. 그래? 내가 구마모토 출신이다. 그래? 구마모토쪽은 도쿄보다 한국이 더 가깝지 않느냐? 도막운동 주역들이 큐슈 출신들이잖아.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단어를 몰라 사이고 다카모리만 언급하고 말았다.) 나도 한국어 몇 마디 안다. 아버지, 어머니. 내가 이승엽 고등학교 선배다. 옆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를 모른다. 그래? 여기 주인아저씨가 요미우리 팬이잖아. 도쿄에서는 어떤 곳을 둘러봤느냐? 우에노 공원, 아사쿠사, 오다이바, 도쿄 타워를 봤다. 내일은 신주쿠, 메이지 신궁, 시부야를 둘러보고 시간이 나면 도쿄대, 긴쟈, 아키하바라를 가볼까 한다. 와세다 대학은 어떻냐? 와세다 대학 좋지. 한국에서는 도쿄대, 와세다대, 게이오대가 유명하다. (교토대는 그 때 생각이 나지 않았고 동지사대는 일본 발음을 몰라서 말을 못했다.) 우리 딸이 와세다 대 다닌다. 그래? 그렇게 좋은 대학을 다니냐? (엄지 손가락을 세우며) 그 대학 들어가기가 엄청나게 어렵다는데 대단하다. (이 말을 현장에서 한 말로 하면 Entrance가 ほんとうに むずかしい. High level がくせだけが enter だいがくですよ.) 우리 딸 전공은 물리학이야. 그래? 당신에게 사인 좀 받아 둬야겠다. 당신 딸이 노벨 물리학상 받으면 노벨상 수상자 아버지 사인이라고 자랑할 수도 있잖아. 요즘은 한국에서 일본공대도 유명하다. (공대란 말을 몰라서 engineer だいがく라고 했다.)당신 직업이 뭐냐? 0000000다. 일본으로 치면 00000에 해당한다. 우리가 젊은이 때는 도쿄의 거리 중 긴쟈가 가장 유명했는데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긴쟈가 별로 유명하지 않은 것 같더라 등등.
이야기가 재미있게 진행되고 있을 때 일단의 젊은이들이 들어오려고 했다. 주인은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고 팔로 X자를 보여주며 클로스라고 한다. 이 광경을 본 아내는 그 때부터 불안해한다. 너무 늦은 시간까지 있어서 실례라고. 그 집 단골인 그 아저씨는 친절하게 설명한다. 원래 이 집은 밤 10시까지 영업하는데 내일(토요일) 노는 날이어서 오늘(금요일)은 원래 늦게까지 한다고. 그 아저씨가 느긋하게 앉아서 마시는 것 보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내는 그 후로 계속 일어나자고 눈치를 준다. 아쉽지만 이 정도에서 마쳐야지. 다른 곳에서는 물가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이 집에서 안주를 곁들여 마신 술값은 물가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심야 할증료가 더해져서 그런가?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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