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호(鶴湖) 김봉조(金奉祖)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8-05-14 10:01

김봉조(金奉祖)의 자는 효백(孝伯)이며 호는 학호(鶴湖)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楊震)의 증손인 유연당(悠然堂) 대현(大賢)의 아홉 자제 중 맏자제로 한양 장의동(지금의 청운동)에서 선조 5년(1572)에 태어났다.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서 ‘爲己之學(위기지학)’을 닦았으며, 임진왜란때는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을 지켰으며 선조 33 경자(1600)년에 부친 유연당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 때 전소된 종택을 심력을 다해 중건한 후, 영주의 우거에서 돌아왔다.

선조 34(160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광해 5(1603)년 증광 문과에 갑과 제이인자로 급제하였다. 임인(1602)년 음력 3월 부친상(유연당 50세로 서세)을 당하여 한 달 후인 4월 광석산 아래에 여막을 지어 빈소를 꾸몄다. 5개월이 지난 가을 (음력 8월), 광석산 오향지원(午向之原)에 장례를 들이고 묘소하의 여막에서 삼년상을 지내는 동안 상복을 벗거나 여막 밖을 나가는 일이 없었다. 다만 삭망제(초하루와 보름에 모시는 제사)날만 오미동종택(약 2km거리)을 다녀왔다.

산 아래의 마을 이름은 대지[행갈]이다. 그 북쪽에 작은 골이 있는데, 이 골은 공이 전후 두 차례의 거려지지(여막을 지어 시묘한 곳)로서, 지금에 전하기를 빈솟골[빈소동]이라 한다. 여막 옆에 방을 한 칸 마련하고 여러 아우들과 거처하면서 날마다 공부거리를 제공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선친께서 학문과 덕을 높이 쌓았는데, 너희들은 어찌 선친의 유지를 잊을 수 있겠나? 그러므로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교도하니, 이 가르침을 받은 아우들은 더욱 부지런히 면력하였다. 상을 마친 후 공은 성균관 유생들의 기풍이 온전치 못함을 보고 문을 닫고 교유를 삼가며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공은 병산서원의 창건(1613)에 수년간 주역할을 하였다. 공은 서애류선생을 사사하여 위기지학을 닦았으며, 선생의 서세후 곧 향내유림의 협력을 얻어 지금의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서원을 세워 이름을 병산서원이라 하고, 선생을 주행하여 춘추향사를 모심은 물론, 후학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길러내도록 하였다.

 >> 병산서원, 사진: 안동넷.

 

 

 

 

 

 


 >> 병산서원 만대루, 사진: 김창호

 

 

 

 

 

 

 

 

 

 

 

당시 풍산에 있는 풍악서당은 고려 공민왕으로부터 사패지로 받은 재산이 상당했는데 이는 풍산현 유림의 소유였다. 이 재산 모두를 병산서원 소유로 옮겨 건물을 짓고, 수호답(守護畓)까지 곁들이는 데는 처음에 반대하던 사람도 있었으나, 끝내는 공의 뜻에 사심이 없고 오직 선현을 받들고 그 숭고한 대의정신을 이어 받자는 간곡한 호소에는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광해 5(161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곧 사도시직장에 임용되었으며, 이어서 성균관전적 · 사헌부감찰을 거쳐 광해 8(1616)년 경상도 단성현감에 부임하였다. 이 고을은, 왜란직후 몇 해 동안은 산음현에 소속되었다가, 3년 전인 1613년에 다시 단성현으로 그 이름을 되찾았다.

공이 부임길로 떠날 때 어머니 완산(전주)이씨께서, “단성은 너의 아버지께서 다스렸던 고을이다. 더더욱 조심하여 아버지의 청덕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임진란의 상처로 몹시 피폐한 이 고을에 먼저 민력휴양에 힘을 기울였다. 그 때 고을 사람 박모가 정모에게 가까이 하면서 그 위세를 빌어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공이 그를 잡아 죄를 다스리니, 권신인 정이 그 도당을 시켜 온갖 수단으로 협박했으나 공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가끔 현내의 단소루(丹?樓)에서 고을사람을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고, 양로연을 열어 즐겁게 하니, 모두들 기뻐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하기를, “우리들이 다행히 죽지 않고 남아 있어서 15년 만에 또다시 선명부(유연당을 가리킴)처럼 베풀어 주시는 이 훌륭한 연회를 받게 되었습니다.”(유연당께서 1602년 봄에 도사관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그 때부터 15년이 되었다는 뜻임) 하고 해가 지도록 술과 시작(詩作)으로 즐기고 놀다가 흩어졌는데 이 때가 바로 음력 3월 13일이었다.

잔치가 끝난 후 오삼도(吳三濤)가 앞으로 다가와 말하기를 “선명부께서 지나간 임인(1602)년 봄에 이런 잔치를 이 고을에서 베풀었을 때, 내가 친히 모시게 되자 하도 반가워서 연회도를 그려 바친 일이 있었습니다. 또 오늘날 사또께서 이런 잔치를 베풀어 주시기에 내가 70 늙은이로서 외람히 참석하였습니다. 다만 전후의 혜택에 너무도 감사할 뿐 아니라 옛날 서백(西伯: 주나라 문왕)이 노인들을 잘 위로하였다는 말이 절로 생각납니다. 내가 지금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시력도 전 같지 않으나, 마땅히 이번 연회도를 한 폭 그려서 길이 전하여 좋은 승적이 되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직접 그 자리에서 붓을 잡고 그렸다.

그 후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물러와 자취를 숨겨 지낸지 5년 후에 광해가 물러나고 인조가 즉위하니, 공이 52세 때인 1623년 경상도사(慶尙都事)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에 기용된 후, 어떤 사건으로 금부에 갇히게 되었는데, 임금이 그 억울함을 알고 본임에 복직, 왜사접위관(倭使接慰官)에 차출되었다. 그해 10월 또 서원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익산군수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는데 양로회를 베풀고 고을 백성들의 당면한 고통을 물으니, 모두 첫째로 내세우는 것이 포적(逋?: 대여해간 곡식을 갚지 않아 장부에 숫자로만 남아 있는 곡식)이어서, 공은 곧 조정에 제청하여, 그것을 감면토록 하는 등, 폐를 없애고 세금을 덜어 주는 다스림을 편 뒤 인조 3(1625)년 겨울 고향으로 돌아왔다.

공이 31세의 봄, 부친 유연당께서 산음 내아에서 서세하였을 때 11남매의 맏이로, 아우 팔형제 중 오형제는 20세 미만이었고, 특히 막내아우 설송은 5세였다. 그 후 대가족의 장자로서, 아우들을 교양하고 제가에 진력하며, 공을 포함한 저 유명한 팔련오계(팔사마오급제)의 명예를 얻는데 견인적 역할을 다하여 그 기본 바탕을 마련하였다.

 >>유경당종택: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8호로 지정된 이 종택은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고,
     1600년에 김봉조가 다시 건립한 것으로 오미동 풍산김씨의 큰 종가이다.
     사진: 한국국학진흥원(유교넷).

그 후 예조좌랑, 승문원교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예조정랑에 취임한 후, 인조 7 (1629)년 성균사예에 올라, 어느 날 입시에서 근래 선비들의 기풍이 차츰 부박함을 논고함에 “근자에 선비를 권장하는 일이 과거에만 주력하여, 선비들이 사장, 기송만을 숭상할 따름입니다. 소학 같은 글은 인격을 형성하고 도야함에 매우 긴요하며, 이를 필수적인 과정으로 삼아 강독시킴과 함께 그 실행 여부를 살펴 권징 함으로써 반드시 생활화 되도록 하여야만 그 보람을 옳게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아뢰니 임금은 이를 가납하였다.
 
다음에 사헌부 지평에 옮겨다가, 성균관 직강, 예조 정랑을 다시 거듭 지내고, 또 성균사예를 거쳐, 제용감정, 다시 지평이 되었다. 공은 중후온화한 자질에 아우 망와 · 장암 ·학사와 더불어 문명을 떨쳤으며, 류수암 · 김계암 · 김매원 등과 사귀었다. 당시 간당의 구정물을 모두들 하도에서는 정한강이 막았고, 상도(영남북부)에서는 학호공의 형제분이 막았다고 일컬었다.

광해 3(1611)년 정모가 퇴계 이황 선생과 회재 이언적 선생을 무고하자, 그를 규탄하는 상소에 공이 소수로 추대되었다. 상소문은 다음과 같으며 내용은 충의를 다한 명문이라고 한다. 첫 번째 상소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해 여름 6월에 모든 유생들을 인솔하여 복합(대궐문 앞에 엎드림)한 상소에,
신등은 전에 오현(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 · 이언적 · 이황)이 문묘에 종사된 이후로 모두 축하하기를, 우리 성상께서 올바른 학문을 높여 조신(벼슬이 높은 사람)에게 모범이 되도록 하여, 선비로 하여금 나아갈 바를 알도록 하였습니다.

정모는 오랫동안 산림(학식과 도덕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선비)이란 이름을 갖고 선왕의 말기 때, 남들이 말할 수 없는 바른 말을 능히 했다 하여 명망이 한 시대에 높아지고 직위도 정승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를 본다면 정모야로서는 마땅히 올바른 도를 개진하여 특이한 예우에 만분지일이라도 보답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찍이 군덕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말도 없고, 도리어 터무니없는 말을 퍼뜨려서 성총을 어지럽히고, 또 전하께서 선현을 높이고 정도를 중히 여기는 훌륭한 마음을 이간시키려고 하니, 정모의 마음은 실상 헤아리기 어려운 바입니다.

정모가 젊었을 때 조식을 스승으로 마치 부모처럼 섬겼다고 자부한다 하니, 그렇다면 정모는 조식을 섬길 때 그 도를 스승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 도를 스승으로 삼았다면 조식이 이황에게 드린 편지에, 평소에 우러러 보는 마음이 마치 하늘의 북두성을 쳐다 보는듯하다고 했고, 거리가 멀어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다고 했으며, 선생은 몸소 상등경지에 도달했습니다 라고 했고 또, 이황과 이야기할 때 퇴계의 학문은 우리들이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하다면 이황의 높은 어짐을 알고 또 이황의 도를 높인 자로서는 조식 같은 이 외에는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식을 스승으로 섬겼다는 정모가 그의 스승도 인정한 선현을 헐뜯는다면 이는 바로 그의 스승을 헐뜯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황의 올바른 도에는 조식도 추종했었는데, 정모는 도리어 그를 배척하고, 전하께서도 이황의 도를 높이는데 정모는 도리어 그를 헐뜯었으니, 정모는 다만 이 밝은 시대에 득죄하였을 뿐 아니라 조식에게도 득죄한 셈입니다.

                                                               - 중 략 -


또 이언적은 병오(1546)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에 내려가 있다가 이듬해에 강계로 귀양 가게 되었습니다. 봉성군은 바로 이 때 처형을 당했는데 귀양 간 이언적이 어찌 봉성군을 죽이라고 청할 수 있었겠습니까? 옥당에서 봉성군을 죽이라고 청하던 날이, 마침 이황이 외지로부터 처음 조정에 들어오던 날이었습니다. 다음날 조정 신하들이 모두 탑전에서 봉성군을 죽이라고 청했으나, 오직 이황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만 물러나 사직하고 말았습니다.

                                                               - 중략 -

그리고 전일에 받아들인 정모의 차자(신하가 임금에게 올린 간단한 상소문)를 불태워서 중외에 선포토록 하고, 그의 죄상을 열거하여 묘당에서 처리하도록 한 다음, 선왕께서 도를 중히 여기신 뜻을 계술하고, 신민들의 울분한 심정을 풀어주시면, 유교학문도 매우 다행하고 국가도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임금께서 답하기를, 소를 보니 공들의 생각을 다 알겠노라. 그러나 사람이란 소견이 각각 다르고 의논도 모두 같지 않음은 예부터 다 그러한 것이다. 공들도 각기 다 소견을 이야기하였으니, 물러가 몸이나 더 잘 닦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후, 다섯 번째까지 상소를 올려도, 비답에는 나의 뜻은 더 이야기할 것이 없다. 공들은 각각 수기에 대한 학문과 위도지업(爲道之業: 도를 지키는 공부)에 잘 힘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 학호집: 조선 중기의 학자 김봉조(金奉祖, 1572~1630)의
     시문집이다. 사진: 한국국학진흥원(유교넷).

공은 이 때 소(疏)로서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자 도를 걱정하고 시국을 슬퍼하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동지 몇 사람과 더불어 두류산으로 들어가자고 약속하고 초가을에 적벽에서 뱃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은 답답한 마음을 불살라버리기 위해서였다.

이보다 앞서 권정보(權靜甫이름은 도, 단계에 살고 있음)에게 편지를 부치고 두 종씨(4촌), 또 여러 친구와 함께 음력 10월 16일 날 적벽 아래에 모였다. 며칠동안 놀다가 서로 작별하려 할 때, 권정보(權靜甫)와 박군수(朴君秀)가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머금고 우리들이 지금 서로 흩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하기 어려우니, 이 모임을 그림으로 그려 후일에 전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고하니, 여럿이 모두 찬성하므로 드디어 어떤 화수(畵手)를 시켜 강성에서 범주한 모습 그대로를 그려 각각 한 폭씩 가지도록 하였다. 이때 뱃놀이를 같이 한 사람은 권집(權潗)· 권도(權濤)· 권준(權濬) ·박문영(朴文?) · 이흘(李屹) · 권극량(權克亮) 등이었다.

인조 8(1603)년 2월 한양에서 하세하니 향년 59세이다. 임금이 부의를 내리고 고향으로의 운상을 돌보게 하였다. 류수암(柳修巖: 袗진)은 만사(輓詞)에서 人文已晦儒林痛(인문이 어두워지니 유림이 통곡하고,) 世道將淪志士驚(세도가 장차 떨어지니 지사가 놀라도다.) 이라고 하였다. 영주 구호서원(鷗湖書院)에 선고(先考: 아버지) 유연당과 함께 배향되었다.

*본문에서 한문이 ?표로 나오는 것은 웹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한자입니다. 이점 양해바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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