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곡(屛谷) 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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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일마을 전경, 사진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제공. |
선생의 諱(휘)는 구요 자는 方叔(방숙)이며 안동권씨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搏(박)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는 징이며 선교랑이다. 처는 풍산류씨인데 拙齋(졸재) 元之(원지)의 따님으로 柳成龍(류성룡)선생의 증손녀이다.
현종 13년에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자물쇠를 거꾸로 잠갔는데 외숙이 꾸짖자 이에 스스로 풀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제갈량은 八陣圖(팔진도)도 풀었는데 천하의 물건이 어찌 풀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하셨다. 스승에게 나아가 수업하며 글의 뜻을 모두 밝게 풀이하셨고 커가면서 세속에 얽매임이 없이 옛사람의 법도를 따라하였으며 독서를 통하여 사물에 本末(본말)과 輕重(경중)을 살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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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시습재, 사진 국학진흥원 제공 |
六經(육경)과 四書(사서)를 탐독하였으며 程朱學(정주학)에 이르기까지 독실한 뜻으로 연구하셨다. 성년이 되어서는 葛菴(갈암)선생의 문하에 遊學(유학) 하였으며 密菴(밀암)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切磋琢磨(절차탁마)하여 견문이 매우 넓었으며 학문의 깊은 뜻을 밝히어 스스로 깊이 이해하였다.
山澤齋(산택재) 權泰時(권태시) 都事(도사) 金命基(김명기) 縣監(현감) 柳後光(류후광) 蒼雪齋(창설재) 權斗經(권두경) 같은 선배들과 나이를 잊고 벗하였으며 유림에서 큰 의론이 일어나면 반드시 선생의 한 말씀으로서 去就(거취)로 삼으면서 이르기를 ‘아무개는 나이는 젊으나 우리가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丁丑(정축:1697년), 戊寅(무인:1698년)에 거듭 內外艱喪(내외간상)을 당하였는데 병을 救療(구료: 병을 고쳐줌)하고 居喪(거상: 상중에 있음)의 범절에 정성과 예절을 다하였다. 선고(아버지:징)께서 일찍이 병중에 계시면서 甘酒(감주)를 원하였으나 의원이 이롭지 못하다고 말하기에 드리지 아니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평생토록 자신은 감주를 마시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세상사에 뜻을 끊으시고 杜門不出(두문불출)하여 독실히 학문에 정진하였다. 丙申(병신:1716년)에 병산에 우거하고 자호를 병곡이라 하였다. 藍田鄕約(남전향약)을 增減(증감)하여 주민들을 깨우치니 백성의 풍속이 점차 개선되었다. 戊申(무신:1728년) 봄에 大臣(대신)이 그 착한 行誼(행의)를 들어 조정에 狀啓(장계)를 올렸는데 밀암과 함께 薦目(천목)에 들어갔다.
이해(1728년)에 역적 鄭希亮(정희량)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賊將(적장) 李能佐(이능좌)가 무리를 이끌고 밤에 들이닥쳐 사태를 헤아릴 수 없이 위급하였는데 이는 평소에 선생의 聲望(성망)을 듣고서 중요한 인물에게 의지하려고 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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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곡선생문집, 사진 국학진흥원 제공 |
선생께서 꾸짖으시고 목을 내어 주며 말하기를 ‘다만 내 머리를 잘라가거라’ 하셨다. 賊徒(적도)의 기색은 울상이 되어 물러갔으며 이어서 文扇(문선)에 글을 써서 이르시기를 ‘밝은 해 머리위에 다르다니 붉은 마음 한 올이 밝아지도다. 차라리 죽고 사는 변고 있을지라도 기어이 귀신에게 맹세하리라’ 하셨다.
그 후 親鞫(친국)에 나아갔을 때 왕께서 그 神色(신색)의 편안하심과 응대함에서 정직하심을 살피시고 大臣(대신)과 郞官(낭관)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떠하오?’ 하셨다. 대답하기를 ‘도학을 배워서 지킴이 있는 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 옵니다’하였다 왕께서 그렇다고 하시고 석방을 명하시면서 두 군졸을 시켜 거처에 까지 모셔다 드리게 하셨다.
이어서 관찰사에게 諭旨(유지)를 내리셨는데 요약하여 이르자면 ‘안동사람은 順(순)과 逆(역)을 밝게 이해하였으며 역도를 꾸짖어 적을 물리쳤으니 가히 아름답다 할 것이다’ 하였던 것이다.
그 후 戊申(무신:1788년)에 영남유림에서 왕께 疏(소)를 올렸는데 정조께서 경연에 있는 대신에게 이르기를 “권구의 일은 참으로 장하도다. 칼날을 무릅쓰고 어찌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으랴”하시었다. 선생의 이름난 절의는 더욱 오래도록 더욱 빛나게 드러났다.
戊辰(무진:1784년) 겨울에 병환이 있음을 탄식하며 말하기를 “중용과 대학은 내 일생동안 독송하였는데 이제 구절을 외우는데 자꾸만 헷갈리니 정신은 거의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구나!”하셨다. 이듬해 정월에 정침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78세이며 井山南麓(정산남록)의 庚坐原(경좌원)에 안장하였으며 장례에 모인 이가 300여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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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의 불천위 위패를 모신 사당, 사진 국학진흥원 제공 |
선생께서는 단정하고 온화하며 담백하고 깨끗하였다. 평소 생활에서 진실함은 사람에 따라 다름이 없었다. 마음을 변함없이 지키심은 더욱 꿋꿋하셨고 利(이)와 義(의)에 이르러 판단하고 분석함에 있어서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니 가히 그 지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접하고 사물을 대응함에는 한결 같이 성실하였으며 간소함을 즐기시어 의식이 나쁘거나 거처가 누추하여도 태연하고 편안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학자는 모름지기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사물의 깊은 이치를 궁구함에는 스스로 깨달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반드시 平平(평평)한곳에 두어야 하며 한 터럭이라도 잡념이 드러나서는 아니 된다.
사람은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여 혼미하며 함부로 넘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마음은 본시 광명한 것이며 이를 맑게 다스리는 법은 “敬(경)” 뿐이다.
道(도)의 本體(본체)가 비록 크다고 하지만 실은 우리 마음속에 갖추어 있으며 사물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실은 우리 몸에 근본이 있다. 이를 앎이 精微(정미)하지 못하면 스스로 이해하여 이치를 꿰뚫어 깨우치는 오묘함을 이룰 수 없고 이를 행함에 힘쓰지 않으면 그의 처소에서 편안히 살고 그에게 주어진 물질을 충분히 활용하는 영역에 이를 수 없다”고하셨다.
사서에 있어서는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더욱이 주역과 중용, 대학에 힘을 써서 “讀易?義(독이쇄의)”와“學庸就正錄(학용취정록)”을 저술하셨고 또 周敦?(주돈이)의 “太極圖說(태극도설)”에 취하여 이를 推衍(추연)해서 두 圖形(도형)을 만들고 邵雍(소옹)의 坎?寅申(감리인신)의 說(설)에 就(취)해서 끝에 도형을 이루었는데 이들을 합쳐 이름 하기를 “二五交感圖(이오교감도)”라 하였다.
또 “四端七情說(사단칠정설)” 및 “初學入門(초학입문)”과 “內政篇(내정편)” 등의 저서가 있는데 다만 이치가 통하고 말이 順平(순평)하게 하였으며 詩(시) 또한 平易(평이)하고 담박하면서도 뜻은 깊고 멀게 執筆(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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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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