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에 관한 오해와 진실
직장의병원보에 낼까해서 생각해 두었다가 방송 프로그램에 활용할 생각도 해본 일이 있는 글이다. 병원보에 투고할 지는 아직 모르겠다.
혈액형에 관한 오해와 진실
대한민국 성인 중 자신의 혈액형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신의 혈액형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중고교 생물 시간에 배운 지식으로 부모 자식간의 친자관계를 판단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ABO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격을 규정짓기조차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혈액형에 대한 전문가들은 ABO 혈액형으로 친자 관계를 판단하지 않으며 성격과 연관짓지도 않는다.
1. Rh 양성인 부모 사이에서는 Rh 음성이 태어날 수 없다?
아니다. Rh 양성 부모 사이에서 Rh 음성이 태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태어나는 Rh 음성의 절대 다수가 양부모 모두 Rh 양성이다. Rh 양성 사이에서 Rh 음성이 태어어나면 부부간에 불화가 생기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Rh 양성 사이에서는 Rh 음성이 태어날 수 없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어느 여성이 이 문제로 남편이 이혼을 요구한다고 울면서 전화 상담을 해온 일도 있다. 이제 좀 어렵지만 대부분의 Rh 음성이 Rh 양성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는 이유를 알아보자.
Rh 양성을 나타나게 하는 D항원은 1번 염색체에 그 유전자가 있는데 1번 염색체는 한 쌍 즉 두 개가 있다. 우리나라 Rh 양성인 사람 중 10명에 9명 정도는 양쪽 염색체 모두에 Rh 양성을 나타나게 하는 유전자가 있고, 10명에 1명 정도는 한 쪽 염색체에만 Rh 양성을 나타나게 하는 유전자가 있다. 물론 Rh 음성인 사람에게는 이 유전자가 양쪽염색체 모두에 없다. Rh 양성인 부모 사이에서 Rh 음성이 태어나려면 한 쪽 염색체에만 Rh 양성을 나타나게 하는 유전자가 있는 남녀가 만나야 하는데 이런 조합으로 부부가 될 확률은 대개 100분의 1 정도이다. 이런 부부가 결혼하여 Rh 음성인 아이를 낳을 확률은 Rh 양성을 나타내는 유전자가 없는 염색체끼리 만나야 하므로 4분의 1의 확률이다. 다시 말해서 Rh 양성인 부모가 만나 Rh 음성인 아이를 낳을 확률은 약 400분의 1 즉 0.25% 정도이다. 우리나라 헌혈자 통계를 보면 Rh 음성 비율이 대개 0.3% 정도이다. 다시 말해 Rh 음성 약 30명 중 25명 정도가 양부모가 모두 Rh 양성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 Rh 음성 학생 약 30명을 모아 교육해 본 경험으로는 그 중 27~28명 정도가 양부모가 모두 Rh 양성이었다.
2. AB형과 O형 사이에서는 A형과 B형만 태어난다?
대개 그렇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실제 AB형과 O형 사이에서 AB형이나 O형이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대부분은 자신이 알고 있던 AB 형이나 O형이 아닌 경우이지만 실제 AB형과 O형 사이에서 AB형이나 O형이 태어날 수도 있다. 물론 다른 혈액형에서도 중고교 생물시간에 배운 내용과 다른 혈액형이 태어날 수가 있다.
먼저 A형이나 B형의 변이형으로 A형이나 B형이 아주 약하게 표현되어 AB 형이 B형이나 A형으로, A형이나 B형이 O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실제로 A형이나 B형의 변이형인 사람이 자신의 혈액형을 O형으로 알고 있을 수가 있다.
이런 경우 외에 우리나라와 일본에 많은 cis-AB형인 경우 Ab형과 O형 사이에서 AB형이나 O혀이 태어날 수 있다. ABO 혈액형의 유전자는 9번 염색체에 있는데 cis-AB형은 이 염색체 중 한 쪽에서 A형과 B형 모두를 나타내게 하는 유전자를 가진 경우다. 수천 년 전 한반도나 일본땅 에 살던 어떤 사람의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겨 그런 성질이 전해져 온 것으로 생각되는데 cis-AB는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주로 나타난다.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한 쪽 염색체에 AB형, 다른 염색체에 A, B, O,를 가질 수 있다. 가령 cis-AB/O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O/O 유전자를 가진 사람과 만나 아이를 낳으면 AB형이나 O형이 태어날 수 있다. 물론 cis-AB/A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O/O 유전자를 가진 사람과 만나 아이를 낳으면 AB형과 A형이 나올 수도 있다. 이 cis-AB형은 우리나라에 꽤 많다.
이런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cis-AB가 아닌 일반적인 A/B형인 사람과 O/O형인 사람 사이에서 O형이 태어난 경우가 우리나라에 실제로 있었다. 그 아이는 실제 A형이나 B형이 되어야 했지만 혈액을 만드는 줄기세포가 두 개로 나누어지기 전 단계에 돌연변이가 일어나 O형이 된 경우이다. 실제 A형, B형, O형 유전자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유전자에 작은 돌연변이가 일어나도 유전자가 만들어야 하는 효소의 차이로 인해 A형이나 B형이 되어야 할 사람이 O형이 될 수도 있다. 97년경에 이런 경우가 우리나라 학계에 처음 보고되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4건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3. ABO 혈액형으로 성격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믿고 있지만 이런 믿음에는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다. 혈액형과 성격과의 관계에 대한 설은 1971년 일본의 방송작가 출신 노미 마사히코가 '혈액형으로 알 수 있는 상성'이란 책을 내놓으면서부터라고 한다(인터넷 한겨레21 536호). 그런데 이 사람은 그 후에도 혈액형과 관련된 여러 책을 내었고 지금은 그 아들이 가업으로 물려받아 계속 신작을 내고 있다고 한다.
의학적으로 보면 ABO 혈액형은 인간이 가진 수많은 혈액형 중 한 가지 종류에 불과하다. ABO 혈액형 외에도 Rh 혈액형, Duffy 혈액형, Kidd 혈액형, MNSs 혈액형, Lewis 혈액형 등 수 많은 혈액형들이 있다. 그런데 ABO 혈액형과 성격과의 관계를 믿는 사람들은 유독 ABO 혈액형만이 성격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사실 A형과 O형의 차이는 적혈구에 있는 ABO 혈액형의 항원부에 N-acetyl galatosamine이라는 일종의 당이 붙어 있는가 아닌가 하는 차이 정도이다. B형과 O형의 차이는 이 물질 대신에 galactose라는 당이 붙어있는가 아닌가 하는 정도이다. 유전적으로는 이런 당이 붙는 효소를 만드는 유전자에 있는 몇 개의 뉴클레오타이드의 염기서열이 다를 뿐이다. 이 정도의 차이는 같은 혈액형을 가진 타인이 가진 상이한 염기서열의 차이에 비하면 차이랄 것도 없다. 혈액형과 성격과의 관계는 과학적으로 규명된 일이 없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대부분 O형이다. 남미의 어느 인디언 제국은 전 국민이 O형이었다. 이 남미 인디언 제국을 무너뜨린 유럽 인종은 약 50%가 O형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O형의 특징이라고 알려진 '생활력이 강하고, 적극적이고, 현실적이며, 이태타산이 분명하고, 욕심이 많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등등'과 어울리는 사람은 그 남미의 인디언일까 그 나라를 무너뜨린 유럽 사람일까? 우리나라 사람과 혈액형 구성이 가장 비슷한 민족은 일본과 북경 인근의 중국 민족이다. 그럼 우리나라 사람과 일본 사람은 소위 말하는 국민성이 비슷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내 성격은 외향적이고 적극적이지만 때론 내성적이고 소극적일 때가 있다.' 또 '내 성격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지만 경우에 따라 적극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성격 규정 모두를 아니라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경상도 남자는 무뚝뚝하고 서울 남자는 상대적으로 다정하다고 한다. 그럼 경상도 남자와 서울 남자들의 혈액형 구성에서 차이가 날까? 거의 차이가 없다.
혈액형과 성격과의 관계를 재미로 이야기하는 것이야 개인의 자유일 수 있지만 몇 년 전 혈액형으로 인권을 침해하는 사례까지 생겨났으니 더 이상 재미로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어느 직장에서 특정 직업군의 직원을 뽑는데 O형과 B형만을 뽑기로 했다가 취소했다고 한다. 또 어떤 보험회사는 혈액형별로 다른 보험상품을 권유하는 교육을 설계사들에게 실시한 일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TV에서의 혈액형 관련 방송으로 인하여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까지 있었다고 한다. 과거 유럽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O형이 많은 유럽 인종이 O형이 상대적으로 적고 A형이(혹은 B형)이 상대적으로 많은 아시아 인종보다 우수하다고 한 일이 있음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4. O형은 모든 혈액형에게 피를 줄 수 있고 AB형은 모든 혈액형으로부터 피를 받을 수 있다. ?
일면의 진실이 있지만 실제 그렇게 수혈하는 일은 거의 없다. 중고교 생물 시간에 적혈구가 가지 항원과 혈청에 있는 항체와의 반응 원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고 실제 수능 시험에 이 문제가 나온 일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주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병원에서는 같은 ABO 혈액형의 혈액만 수혈한다. O형 적혈구를 다른 혈액형을 가진 사람에게 수혈하더라도 항-A, 항-B 항체를 가진 O형의 혈장이 일부 섞여 들어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정도의 혈장은 대개의 경우 큰 문제를 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위급한 경우에는 그렇게 수혈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같은 혈액형의 혈액을 구할 수 없는 아주 위급한 경우나 꼭 필요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같은 혈액형의 혈액을 수혈하는 것이 원칙이다.
5.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서 자신의 혈액형을 알고 있는 것이 좋다?
자신의 혈액형을 알고 있다고 해도 병원에서 수혈하기 전엔 반드시 환자의 혈액형을 확인하고 적혈구의 경우 교차적합성 검사를 거쳐 수혈한다. 따라서 자신의 혈액형을 알고 있다고 해서 더 빨리 수혈을 받는 것은 아니다. 가령 내가 큰 사고를 당해 출혈이 심해 안동병원 응급실에 갔다고 가정하자. 혈액은행을 책임지고 있는 내가 직원들에게 난 O형이고 Rh 양성이니 검사를 생략하고 빨리 응급실로 혈액을 보내라고 지시했다고 하자. 우리 직원들이 내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할까? 아니다. 아무리 급해도 꼭 필요한 ABO 혈액형 검사, Rh 혈액형 검사, 교차적합성 검사를 실시한 후 혈액을 보낸다. 아마도 그 말을 들은 직원은 사고로 내 머리가 약간 이상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 약간의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형별로 혈액을 모두 갖추지 못한 작은 의료기관에 갈 경우에는 미리 혈액형을 이야기해서 그 혈액이 조금 빨리 병원으로 도착하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필수 검사는 거쳐야 한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응급 상황에 형별로 혈액을 갖추지 못할 정도의 소형 의료기관을 찾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므로 실제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집단으로 혈액형 검사를 실시하는 문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실제 서구 사람들은 자신의 혈액형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6. 가족의 혈액이 남의 혈액보다 더 좋다?
아니다. 부모, 자녀, 형제, 자매의 혈액을 수혈하는 것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수혈로 인한 에이즈 감염 소식 등으로 인해 적십자사에서 공급하는 혈액이 미덥지 못해 자신의 가족중 혈액형이 같은 사람의 혈액을 수혈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특히 수술이나 출산 직전에 이런 요청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아무래도 가족의 혈액이 더 적합하고 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 같다.
1차 혈연 관계의 사람의 혈액은 남의 혈액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수혈부작용 중 이식편대숙주병이라는 치명적인 수혈부작용이 있다. 살아서 수혈받는 사람의 몸에 들어온 림프구가 살아남아 도리어 주인행세를 하는 경우인데 남의 혈액을 수혈받을 때는 아주 드물게 일어나지만 1차 혈연관계의 가족의 혈액을 수혈 받으면 이 수혈부작용이 일어날 확률이 약 10배 정도 올라간다. 물론 1차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의 혈액이라도 방사선을 쬔 후 수혈하면 이 수혈부작용을 예방할 수 있지만 혈액에 방사선을 쬘 수 있는 장비는 대도시의 일부 대학병원에만 있다. 안동에서 방사선을 쬔 혈액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미리 예약해야 하므로 며칠의 시간이 필요하다. 응급 상황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1차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의 혈액을 수혈하지 않는 것이 좋다.
7. 선진국의 혈액을 수혈받는 것이 더 안전하다?
매스컴에서 우리나라 적십자 혈액원의 혈액으로 인한 에이즈 감염 보도가 자주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한다. 그래서 서구 선진국의 혈액이 대한민국의 혈액보다 훨씬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서구 선진국의 혈액이 우리나라의 혈액보다 안전할까? 적어도 통계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2004년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 혈액을 수혈받고 에이즈에 감염될 확률은 최고 천만분의 6, 최저 1억분의 6이다. 질병관리본부가 헌혈자들의 검사 통계를 가지고 계산한 결과다. 같은 방법으로 계산한 결과를 보면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의 서구 국가들의 확률이 우리나라보다 비슷하거나 높다. 이유는 우리나라가 특별히 관리를 잘 했다기보다는 에이즈 유병율이 그 나라들보다 낮아서 그렇다고 생각된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수혈로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은 16명인데 외국에 나가 수혈받고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은 13명이다. 우리나라에서 수혈 받는 사람과 외국에 나가 수혈 받는 사람의 수를 비교한다면 외국에 나가 수혈 받은 사람이 훨씬 높은 확률로 에이즈에 감염된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는 에이즈의 경우 효소면역법 검사에 핵산증폭 검사를 같이 실시하므로 확률은 더 낮아졌다. 물론 항체 미형성기라는 검사에 잡히기 전 단계가 존재하므로 검사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국민 유병율이 낮을수록 혈액은 더 안전해진다.
※ 김종규님은 현재 안동병원 진단의학과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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