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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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암정사에서 본 하회마을, 사진: 안동넷 |
겸암 류운룡 선생은 조선 명종, 선조 때의 학자로서 자는 應見(응현)이며 풍산인으로, 증의정부 영의정 풍산부원군 仲?(중영)의 장자이고 서애 류성룡선생의 伯氏(백씨)이다. 과거시험을 보아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고 평생 동안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둔 전형적인 선비였다. 시조는 고려초에 호장을 지낸 柳節(류절)이다. 선생은 중종 기해(1539)년 8월 6일 안동 풍산 하회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총명하여 보통아이들과 달랐다. 명종9년(1554) 16세 가을에 이씨부인에게 장가들었다. 이 때 부친이 掌樂院正(장악원정)으로 서울에 있었으므로 거기에서 모시고 공부하였다.
1557년 19세 때 조부 찬성공(柳公綽)을 간성 임소로 가서 문안하는데, 시 「杆城道中書懷간성도중서회」가 있고, 금강산 유람한 기행문 「遊金剛山錄유금강산록」을 지었다. 이듬해 무오년 3월 서울의 모친을 문안하고 시 「水山道中수산도중」 및 「金灘旅店曉起口占一律금탄여점효기구점일률」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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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 사진: 안동넷 |
1559년(21세) 5월 조부 찬성공의 묘갈을 지었으며 1563년 8월 동생 문충공(류성룡)과 함께 향시에 합격하였으며 1567년 봄에 겸암정사를 이룩하고 겸암으로 자호하였다. 퇴계 선생이 액자를 쓰고, 아래의 시 한수를 지어보냈다.
聞君構得新齋好 그대가 좋은 정사 지었다고 들었는데
欲去同牀恨末如 나아가 공부 함께 못함이 한스럽네
1569년 가을에 향시에 합격하고, 1572년 음직으로 典艦司(전함사) 別座(별좌)가 되고, 豊儲倉(풍저창) 直長(직장)으로서 유능한 관리의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계유년 議政公(의정공)의 상을 당하였으며, 1576년 5월에 의금부 도사에 제수 되었으나 6월에 벼슬하기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록에는 6월 1일 免新(면신례: 관청에 처음 출사한 신임자가 구임자를 초대하여 접대하는 일), 17일에 堂上(당상)에 下直(하직), 19일에 呈辭(정사:벼슬하는 사람이 벼슬을 사양하거나 말미를 청하는일)하고 성 밖으로 나아가서 金惇敍 金肅夫 등 모두 11인과 楮子島(저자도)에서 동숙하였고 20일에 廣津(광진)에 이르러 여러 벗들과 작별하였으며, 23일에 陰竹(음죽)에 머물면서 기대승과 담화하였고, 29일에 집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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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대 한쪽 자락에 숨은듯 위치한 겸암정사, 사진: 안동넷 |
1577년 겨울 禮賓寺(예빈시) 別提(별제)에 임명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南義仲(남의중)에게 한 편지에 ‘지난여름 물러나올 때, 장차 문을 닫고 조양하며 마음을 다스리려했고 또한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벼슬자리를 맡았네, 마음 같으면 인사를 그만두고 궁벽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심신을 수습하여 학업에나 전념하고자하네’ 하였다.
1579년 司圃署(사포서) 별좌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아갔다가 7월에 사표를 제출하고 근신하였다. 이듬해 다시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어 조정에 들어갔다.
1581년 3월에 청에 따라 안동복호소를 지었다. 읍지를 살펴보면 부의 동쪽 임하현에 申福(신복)이 그 어머니를 때려죽인 죄로 인해 부를 현으로 강등시키니, 민심이 흉흉했지만 신원하지 못한 지가 수년이 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많은 선비들이 선생에게 疏(소)를 지을 것을 청하여, 복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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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천서원(1786년 창건), 사진: 안동넷 |
44세 되던 1582년에 조정에서 庶官(서관)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몇 명 뽑았는데 선생이 선발되어 內資寺(내자시) 주부로 발령받았다. 가을에 진보현감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4월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와서 賓淵精舍(빈연정사)를 세웠다.
1584년 9월 인동현감에 임명되자 몸가짐을 간소히 하고 직무에 부지런했으며, 관리를 다스리는 데는 엄히 하고 백성에게는 은혜롭게 하였다. 고을에 호족 몇 사람이 鄕權(향권)을 잡고 휘두르므로 그들을 법으로 얽매어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니 얼마 뒤에 폐해가 그쳤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먼저 법령을 세워. 모든 土田(토전), 民戶(민호), 稅貢(세공), ??(조적) 등을 다 종이에 줄을 그어 양식을 만들어 균일하게 하기에 힘쓰니, 한편에서 모두 편리하다고 했으며, 관찰사가 그 법을 다른 고을에도 시행하게 하여 선생에게 그 일을 맡겨 거의 추진하였으나, 마침 관찰사가 교체되어 그만 그치고 말았으므로 識者(식자)들이 한스러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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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천서원 정면, 사진: 안동넷 |
여기 대해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 戶典(호전)에 자세히 소개하였다. 1585년 봄에 야은 길선생의 묘를 수축하고 오산서원을 창건하였다. 길선생의 묘가 현의서쪽 漆津(칠진)의 오른편에 있었는데, 황폐하므로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당연히 고을 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하고 牲禮(생례)를 갖추어 성묘를 하고 오태산 기슭 라월봉 아래에 院宇(원우)를 세우려 하니, 전후의 방백들이 힘을 다해 도우려 하고, 대구부사 권문해와 선산부사 유덕수, 성주목사 유몽정, 도사 이희 등도 서로 자력을 도왔다. 1587년 4월 砥柱中流碑(지주중류비)를 세우고 야은선생의 묘표를 새로 건립하였다.
라월봉 동쪽 우뚝 솟은 강심으로 들어가 있어 맑고 시원하며 장쾌하므로, 선생이 그 위에 돌을 세워 야은의 풍절을 칭송하였는데, 중원에 백이숙재 사당 앞에 있는 지주중류비의 묵본을 한강 정구 선생에게 얻어서, 돌을 깎아 ‘전면에 四大字를 새기고 뒷면에 서애 류문충공이 지은 음기를 새겼다. 또 야은 묘전의 구표에는 ‘야은 길재’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高麗門下注書冶隱吉先生之墓고려문하주서야은길선생지묘’라 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지냈다.
1588년 5월 오산서원이 낙성되어 경내의 모든 학생을 모아 공부를 시작하였다.
여러 서원의 원규와 五禮儀(오례의)를 취해 학교를 세워 院中(원중)에서 영원히 지키도록 하였으며, 吳山志(오산지)를 지었다. 1589년 推官(추관)이 되었을때, 정여립의 역옥 사건이 일어나 사방에서 체포하고 있었는데, 옆 고을의 수령이 權臣(권신)의 지령을 받고 무고하여 공을 세우려는 자가 있었으므로, 선생이 바로잡아 그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1590년에는 관찰사와 어사가 선생의 치적을 임금에게 아뢰었으므로, 일년을 더 유임하였다.
가을에 광흥창 주부로 가게 되어 7년간 재임하던 인동을 떠나려 하니 백성들이 사모함을 마지못해 송덕비를 세웠는데, 여헌 장현광 선생이 비문을 찬하였다.
1591년 한성부 판관에 임명되었고 宗系辨誣錄功(종계변무록공)으로 光國原從功臣(광국원종공신) 3등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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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천서원의 사당에는 겸암선생의 위판을 봉안하고 있다. 사진: 안동넷 |
1592년 司僕寺(사복시) 僉正(첨정)으로 승진되었으나 4월 왜란이 일어나 大夫人을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 왔으며, 순찰사로부터 풍기군수가 되어 달라는 격문을 받고 취임하였다. 이듬해 병으로 풍기군수를 사임하고 돌아왔는데 가을에 정식 풍기군수에 임명되었다.
1594년 겨울 통정대부로 승진되었고, 병난과 역질로 백성들이 이리저리 쓰러져 서로 깔고 죽어 가는데, 관원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있으므로, 선생이 지성으로 구휼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렸으며 또 방약을 써서 적을 쳐부수고 와해시켰다.
1595년 금계 황준량 선생이 금계위에 정사를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었는데, 守僧(수승)이 관역 때문에 지키지 못하던 것을 퇴계선생이 完護文(완호문)을 지어 고을 원에게 부탁하여 영원히 역사를 면제하게 하였으나, 오래되어 쓰러져 가고 있는 것을 선생이 鄕射堂(향사당) 벽 위에다가 퇴계의 完護記文(완호기문)을 새기고, 한 고을에서 영원히 옛일을 지키도록 발문을 지어 알게 하였다,
9월에 원주 목사로 전근 되어 11월에 부임하였다. 선생이 떠나자 고을 사람 황응규가 아래와 같이 노래를 지어 거사의 뜻을 부치었다.
소백산 아래에서
눈 멀고 입 비뚤고 귀또한 먼 이가
우리 유군 사모하여
때 지나고 해가 가도 얼마나 그리는지
이 어찌 나같은 한 늙은이 뿐이겠는가
대체로 그 덕택은 소두와 같았으니
난리의 중도에도 피륭(고통이나 재난을 당한사람)함도 있었지만
백성들 힘입어서 곤궁하지 않았다네
세모의 궁산에는 실과들이 붉었는데
그대를 보지 못해 서풍에 읊조리네
1596년 병으로 사임하고 돌아왔는데, 고을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軍國便宜(군국편의)를 개진하는 상소를 하였는데, 그 대략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죽령은 호서와 영남의 중간으로 백이(百二:두 사람의 군사가 백인의 군사를 대적할 수 있음. 천혜의 요새)의 험준한 곳이며 실지로 나라의 문호이다. 죽령 아래의 여러 고을은 다 땅이 협소하고 백성들은 잔약해서 요충지를 제어 할 수 없으므로, 마땅히 순흥부를 복고하여 풍기에 예속시키고. 단양, 영춘, 제천, 청풍, 네 읍을 합하여 하나의 큰 진을 삼아 굳게 지키게 하면 영로를 견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1598년 60세 봄에 대부인을 모시고 다시 道心村(도심촌)으로 우거하였다. 피난 중에도 학문과 자제들의 가르침에 조금도 소홀하지 않았으며, 승정원 승지에 오를 뻔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사위인 金弘微(김홍미)에게 답한 편지에 承宣(승선)의 바람이 어찌 나에게 미치겠으며, 우리 형제를 협박하고 규탄하는 무리들의 입방아에 올라서 더욱 파란을 일으키겠느냐 하였고, 동생 문충공도 선생에게 상서하기를 은대의 욕망은 화를 더욱 조장시킬 것 이라 하였다.
1601년 63세 3월 5일 축시 정침에서 운명하였으며 5월 15일 천등산에 장사 지냈다. 1605년 4월 扈聖原從功臣(호성원종공신) 3등에 봉해지고 5월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었다. 숙종 34년(1708) 11월 우곡서원에 위판을 봉안하였고, 1786년 9월 화천서원에 위판을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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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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