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재 권벌

person 김성규 객원기자
schedule 송고 : 2008-03-04 16:29

 봉화 닭실마을 전경 - 충재 권벌의 종택이 있다. 사진제공: 봉화군청 



 

 

 

 

 

 

 

 

 

 


권벌은 1478년(성종 9년) 戊戌(무술) 11월 초 6일 안동군 도촌리에서 아버지 士彬(사빈)과 어머니 파평 윤씨(塘의 딸) 사이에서 4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안동부 도촌리에서 10년간 살던 충재는 10세에 작은 아버지 士秀(사수)를 따라 봉화로 옮겼다. 그리고 19세인 1496년(연산 2)년에 진사시에 15명 중 2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30세인 1507년(중종 2)년에 丁卯(정묘) 별시 문과에 병과 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소과와 문과에 급제하던 사이의 22세에 直長(직장) 화순 최씨 世演(세연)의 딸과 혼인하였다.

급제 후 바로 승문원의 副正字 權知(부정자 권지)에 입사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검열에 제수되어 다음해 11월 대교로 승진하는 12월 26일까지 1년여를 예문관의 전임관으로 史官(사관)직을 역임하였다. 곧바로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어 동왕 5년 3월 30일까지 지냈으며, 주서직 수행중이던 왕 4년 9월에 연산일기 수찬에 ‘기사관’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등과 후 바로 전임 사관직을 수행하면서 실록청(일기청)의 기사관으로 실록 편찬 사업에 깊이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충재 권벌 종손가 소장 유물  사진제공: 봉화군청

 

 

 

 

 


이어서 정언·예조와 병조좌랑·지평·이조와 호조 정랑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다가 37세때인 중종 9년 9월에 ‘爲親求外(위친구외)’한다는 명분을 들어 외직을 구하여 영천군수에 제수되어 지방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외직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곧 이어 京職(경직)에 제수되어 장령을 거처 사인, 사성,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의 정국흐름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보여진다.

41세(중종 13년 9월)인 좌승지 역임시에는 왕이 사정전에서 유생들을 강독 시험하는 자리에서, 입시했던 재상 鄭光弼(정광필)에게 『대학』을 강론하게 하고, 그리고 ‘仁’에 대해서 논의할 때, 그는 노산과 연산의 후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하였다.

“…지금 좌우의 신하에게 ‘仁道’를 강론하게 하니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말할 적에만 강론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나타나지 않으면 이는 인정을 행한다는 소문 뿐입니다. …연산군은 후사가 없어서 제사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同宗人(동종인)으로 후사를 삼아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무슨 불가 함이 있겠습니까?….”

위 기사 외에 문집에도 노산 및 연산의 후사를 주장하였던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후주장은 정광필 ·申用漑(신용개) ·安塘(안당) 등 삼공 및 李繼孟(이계맹) 등이 반대하였고, 왕마저 선왕 때 행하지 않은 일이라 하여 호응하지 않는 바람에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볼 때, 비록 무도하여 폐위되기는 하였지만 명분상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는 반드시 관철시키고자 하는 태도를 가졌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자세를 근거로 볼 때, 그는 사림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해 나가는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즉 영남에 근거를 둔 인물이면서 개혁성향의 기호 사림과 연결되어 개혁정치에도 깊이 관여하였다고 보여 지는 것이다.

 충재선생 종택안 청암정. 사진제공: 봉화군청 

 

 

 

 

 

 

 

 

 

 

 

42세 때 조정의 정국이 급박하게 전개됨을 염려하여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자제할 것을 말했으나, 듣지 않자 또다시 외직을 요구하여 삼척부사에 제수되어 나가기도 하였다. 외직을 구하여 나가는 바람에 그는 기묘사화 당시에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연루되어 파직되면서 15년간 향리에서 지내다가, 56세(왕 28년)에 수차례의 논의를 거친 뒤 다시 불리어 용양위 부호군과 밀양부사를 거쳐, 한성좌윤 ·경상감사겸병마수군절도사 ·동지중추부사 ·형조참판 ·오위도총부부총관 등을 역임하였고, 이어서 지중추부사겸오위도총부도총관 ·한성좌윤겸지춘추관사 ·좌참찬겸세자좌빈객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리고 67세 때인 1544년 11월에 중종이 승하하자 빈전도감의 일을 맡았으며, 인종 즉위년에는 좌참찬겸지경연의금부사를, 명종 즉위년에는 삼공과 더불어 우찬성으로서 원상이 되어 機務(기무)를 결정하는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 해 8월 21일 尹任(윤임) 일당의 大尹(대윤)을 제거하는 논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공신에 책봉되었으나, 같은 달 26일에 피해자인 3사람(윤임 · 柳灌류관 · 柳仁叔류인숙)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도리어 護逆(호역)했다는 죄목에 몰려 체직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8월 21일 사화 때에 책봉된 공신 훈작은 9월에 삭훈되고, 10월에는 낙향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듬해에 대간이 상소문제를 재론하는 과정에서 다시 추죄되어 奪告身(탈고신)되었고, 70세 때인 1547년(명종 2년)에는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죄가 추가되면서 삭주로 유배되었고, 다음해 3월에 배소에서 사망하여 11월에는 고향인 봉화현 유곡산에 옮겨 안장되었다.

사화에 연루되어 삭탈되고 유배되었던 그는 선조 즉위년 10월에 삼공의 啓(계)에 의해 관위가 회복되었고, 12월에는 경상감사 朴啓賢(박계현)의 계로 李彦迪(이언적)과 함께 추증되고 좌의정에 증직되어 을사시의 화를 복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선조 3년 5월에는 ‘忠定公(충정공)’이라는 시호도 내려졌다.

  근사록, 사진: 문화재청 제공

 

 

 

 

 

 

 

 

 

 

 

 


한편 권벌의 학문관이라든지 인간성 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은 기사 등 몇 가지가 있다.

“늘 글 읽기를 좋아하여 혹 매우 간절한 성현의 말이나 행실이 쓰인 대목을 보면, 반드시 아들과 조카를 불러서 거듭 가르쳤다. 늙어서는 『自警編(자경편)』과 『近思錄(근사록)』을 좋아하여 언제나 소매 속에 넣고 다녔다. 일찍이 중종이 후원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모두 즐겁게 놀다가 돌아간 뒤에 내시가 조그만 책으로 된 『근사록』을 주웠다. 이에 임금은 ‘권벌에게서 떨어진 것이니 돌려주라.’하였다.”

위 기사를 보면, 그는 늘 덕행을 수양하기에 힘썼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비를 가리는 일이나, 변란이 일어났을 때는 의기가 얼굴에 나타나고 앞장서서 과감하게 담당하였는데, 그런 일은 노산과 연산의 후사를 논한 일이라든지, 명종 즉위 시 공신으로 녹공된 후에도 院相(원상) 이언적이 극력 반대했음에도 영화를 버리고 피해자 3인의 억울함을 호소한 일 등에서 알 수 있으며, 같은 기사 뒤에 논평된 사신의 사론에서 이러한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즉 그는 출사한 초기에 사관직 및 언론 삼사직을 주로 수행하면서 일상적인 언론활동 이외에 무오사화 피화인의 신원, 노산군 및 연산군의 입후문제의 啓請(계청) 등 사림들의 현실 인식과 대응 자세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공감했을 뿐만 아니라, 이의 현실 정치 반영에도 매우 집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의 역사에 관점 즉 역사인식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도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중종 3년 기사관시에 무오년에 사화를 야기 시킨 李克墩(이극돈)을 죄 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예문관의 전임 사관들과 연합하여 왕에게 아뢴 말 중에,

“…史局(사국)의 사이에는 비록 한 글자를 늘리거나 줄이더라도 드러내어 죽이거늘…”이라든지, 7년에 사간원에서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그 사실의 삭제를 요구하였을 때에도, “史筆(사필)은 임금의 거동을 기록하는 것이니 사간원이 고치려고 한 것은 잘못입니다.”

와 같은 기사 등을 통해서, 그의 역사관의 일단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이미 기록으로 남겨진 사실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고치는 것의 불가함을 주장함으로써 역사 기록에 대한 중요성을 명확하게 인지하였고, 나아가 역사가의 기본임무를 견지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다양한 경력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사관의 신분으로 실록 편찬 시에 기사관으로 참여한 것과 검열 및 대교직 수행시와 승정원에서 임무수행 시에 일기를 남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충재일기, 사진: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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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랍니다.-편집자 주)
* 김성규선생님은 <안동,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흔적을 찾아서> 등 의 저자이며, 현재 안동공업고등학교에 한문선생님으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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